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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초기 국군의 승리 "춘천지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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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모카초코
추천 : 4
조회수 : 2953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4/06/09 15:05:57
들어가기 전에..이 글을 보는 당신이 6사단 예비역일 가능성 80%ㅋㅋㅋㅋ

국군의 패배와 관련하여 보면 현리전투 이외에도 사창리 전투를 뺴놓을수가 없죠. 그리고 이 사창리 전투에 6사단이 등장하고 그러다보니

국군의 승리에 대해서도 한번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구요? 국군 6사단이 한국전쟁 초기 상당히 의의가 큰 승리를 거둔 부대이기 때문입니다.

(사족으로 사창리 전투 당시 6사단은 치욕적인 패배를 당합니다. 말 그대로 사단 전체가 뿔뿔히 흩어져 도망가는 최악의 상황을 빚어내죠.

물론 이후에 와신상담하여 6사단 2개 연대가 중공군 3개 사단을 섬멸시키는 전과로 명예를 회복하긴 했습니다만..)


이 승리가 바로 춘천지구 전투입니다.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의 전면적인 남침 앞에 춘천도 무사할 수는 없었습니다.

남쪽으로는 원주, 남서쪽으로는 서울에 이르는 교통의 요충지인 탓입니다.

따라서 북한군은 남침 당일 춘천을 점령하고 크게 우회하여 서울에서 후퇴하는 국군의 퇴로를 차단 섬멸코자 했습니다.

그에따라 상당한 규모의 부대를 투입하여 초전박살을 이끌어 내고자 했는데 

당시 투입된 부대는 북한군 제 2군단 소속의 2개사단과 1개 모터사이클 연대 및 증강된 1개 전차연대입니다.

6tkeks.jpg


이에 6사단은 2개 연대(2연대, 7연대)를 방어선상에 배치하고 예비연대(19연대)를 원주에 집결시킵니다.

당시 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유능한 지휘관이었습니다.

이미 전쟁 발발전 귀순한 북한군의 진술을 바탕으로 파견한 정찰대가 적의 움직임을 확인하였고 이에 

조만간 국지적 / 전면적 공격이 있을것이라 판단한 6사단장은 나가있던 모든 장병들에게 귀대명령을 내립니다.

당시 계속된 경계령으로 지친 장병들을 위로하고 농번기의 일손을 돕기위해

육군본부는 전쟁 발발 몇일전 경계령을 해제하고 전군을 대상으로 장병들에게 휴가 / 외출 / 외박을 실시합니다.

김종오.jpg
<6사단장 김종오 당시 대령>


또한 춘천시민과 합동으로 진지정비를 실시하는 한편

강력한 훈련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적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6사단 예하 16포병대대의 훈련은 가히 살인적이어서

모든 대대장병들이 훈련이 힘들하는 하소연을 했고 심지어 군의관까지 포사격이 가능하도록 훈련시켰다합니다.

하지만 개전 당일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전방의 경계진지는 순식간에 돌파 당하고 맙니다.

또한 작계지역 중 탱크가 강(북한강)을 건널 수 있는 유일한 다리인 모진교의 폭파에 실패하면서

6사단은 경계지역에서의 방어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주저항선까지 밀리게됩니다.


심일.jpg


이때 6사단 7연대 소속의 대전차포 중대 심일 소위가 적 자주포를 저지하는 전공을 세웁니다.

심일소위는 곰나루터에 대전차포 2문을 배치하고 적을 기다리던 도중 적의 전차(당시에는 전차와 자주포를 구분하지 못하였음)를

발견하고 매복공격을 가합니다.

하지만 선두전차가 공격을 받고도 계속 전진하자 소대를 철수시켜 후퇴하죠.

그리고 다시 포를 매복시켜 두고 있다가 전차가 등장하지 다시 공격을 가합니다. 하지만 실패하죠.

이에 오직 육탄공격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한 심일 소위는 결사대 5명을 선발 / 지휘하여

수류탄과 화염병만으로 무장하고 적 자주포로 뛰어듭니다.

다행이 무사히 포탑에 올라간 심일 소위는 수류탄과 화염병을 투척 3대의 자주포를 파괴하는데 성공합니다.

놀란 적 자주포 승무원이 뛰쳐나왔지만 주변에 매복중이던 병력들에 의해 사살되고 나머지 자주포는 북쪽으로 도주합니다.

su-76m.jpg
<SU-76자주포>

이 전공은 곧 전군으로 파급되어 전차도 파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됩니다.

이런 강력한 저항에 부딪친 북한군은 2사단을 투입하여

북한강 도하를 시도하였으나 이미 이곳을 주공격로로 예상하고 훈련을 반복해온

아군 16포병대대의 화력앞에 괴멸수준의 타격을 입고 물러나게 됩니다.

예상치 못한 공격과 대규모 피해 앞에 당황한 북한군은

홍천방향으로 진군하던 12사단과 모터사이클연대의 주력  뺴서 춘천에 투입시킵니다.

허나 주력이 빠진 잔류부대는 대치하고 있던 아 2연대와 2연대를 지원하러 올라온 19연대, 긴급전개한 16포병대대에 의해

전멸하고 맙니다. 이때 19연대 육탄 11용사가 적 자주포 10대를 파괴 및 노획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이렇듯 성공적으로 전선을 방어하였으나 6사단은 전선의 단절을 우려하여 

사단편제를 고스란히 유지한 상태로 철수하게 됩니다.

춘천에서의 전투는 북한군의 전체적인 전쟁계획을 완전히 틀어버리는 결과를 가지고 옵니다.

"서울 동남방으로 진출하여 국군의 주력을 포위 섬멸함으로 국군 자체를 와해시킨다"라는

북한의 계획이 저지당한것입니다.

거의 5:1의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도 춘천을 뚫지 못한 2군단에게 김일성은 엄청난 분노를 보였고

결국 2군단장은 2참모장으로 강등, 소속 사단장들 전원 교체 시키는 한편 사단장이 전사한 제 7사단을 해체시키고

제 12사단을 창설하는 초강경책을 취합니다.


06417_004.jpg


이후 충주축선을 따라 철수한 6사단은 충주, 음성 등지에서 수시로 반격하여 북한군을 괴롭히게 되는데

특히 음성에서는 북한군 15사단을 기습하여 2천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오죽했으면 당시 북한군 군단장이었던 김무정이 "6사단을 박살내어야 한다. 남조선 사단은 그것 하나다. 그것만 잡아 족치면 우린

중부 이남을 확 쓸어버린다. 밀어 족쳐서 6사단을 박살내고 사단장을 포로로 잡아오라!"라는 명을 내릴 정도 였습니다. 



20131121173645_2494.jpg



이후 북진과정에서는 압록강까지 진격 초산에서 수통에 물을 뜨는 부대가 되었고 전쟁 이후에는 서울을 함락시켰던

북한군 4사단에 대응하여 철원으로 이동, 현재까지 주둔하며 제 2땅굴을 발견하는 등 임무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사실 전쟁초기 우리가 알지 못하는 국군의 피같은 노력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후방을 차단당한 상태로 북한군의 추격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역으로 반격하며 사단편제를 유지 / 철수한

8사단의 사례 등 우리 선배들은 열악한 상황에서도 조국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비록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는 등 어이 없는 상황이 많이 있었던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6사단이나 8사단의 경우처럼 최선을 다한경우도 같이 묻어버리는것은 안 좋다고 봅니다.

절대적인 열세의 상황속에서도 자신의 피로써 지연전을 펼진 육탄용사들과 호국영령들을 기억하며

김종오 장군이 1군단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지은 시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양의 가죽이 호랑이의 가죽의 문채가 되는 것을 나는 부끄러워한다.

한 두 성을 수복한것은 나의 처음 품은 뜻이 아니고

자리 한 장의 좁은 땅 치안한 것이 어찌 명예가 되겠는가.

조국의 어려움을 민망히 여겨

감히 이 몸을 군막에 드러내어

호적을 물리쳤으나 이 어찌 나라에 입은 은혜의 만문의 일이 될 것인가?

20130524151955_5519584_163846.jpg
<춘천전투부터 백마고지전투 등 한국전쟁 10대 전투 중 절반을 참전하신 고 김종오 육군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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