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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오초칠국의 난 - 칼을 빼들다
게시물ID : history_1617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3
조회수 : 601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6/07 23:42:06

제북왕 유흥거의 반란과 회남왕 유장의 모반 사건은 동성제후조차도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전한의 조정에서도 이에 대한 대책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로 제후왕 억제 정책을 내놓은 사람은 중랑(中郞) 원앙이었습니다. 그는 회남왕 유장의 모반사건 직후, 제후왕의 봉토를 삭감하여 그 세력을 약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1]. 하지만 그의 의견은 채용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를 시작으로 조정에서는 제후왕 억제에 대한 각종 정책이 빗발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본격적인 의견을 내놓은 것은 가의였습니다. 가의는 20살의 나이로 박사에 임명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원앙보다 더 구체적인 의견을 내놓았는데 그 의견은 이러했습니다. 그는 기존의 제, 조, 초 등의 대국을 여러 국으로 분할하고 그 자손을 각각 그곳에 분봉하자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이는 훗날 문제의 손자인 한무제 때의 「추은령」과 그 내용을 같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의견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그러한 정책을 시행하기엔 중앙정부의 힘이 미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의는 여기에서 꺾이지 않고 문제의 아들인 유무를 제후로 삼을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훗날 황태자(훗날 경제)가 황제가 되었을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의견을 받아들여 유무를 양나라의 왕으로 삼고 40여 성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가의의 판단은 정확하여 훗날 유무는 오초칠국의 난 때 한경제의 편에 서서 큰 활약을 하게 됩니다.

 

 

 

가의 다음으로 의견을 내놓은 것은 조조(삼국시대 조조와는 다른 인물입니다)였습니다. 조조의 의견 또한 가의와 그 내용을 같이 하였습니다. 그는 중앙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동성제후들의 세력을 억제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제후왕들의 봉국을 분할하고 새로운 법령을 만들어 규제를 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2].

 

 

 

군신들의 빗발치는 제후왕 억제 정책에 따라 중앙정부에서 동성제후들에 대해 하나둘 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일단은 약점을 가진 제후들에 대해 우선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문제 전원 16년(기원전 164년) 예전에 모반 사건을 벌인 회남왕 유장의 세 아들들에게 회남국을 삼등분하여 각각 회남왕, 형산왕, 여강왕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황제가 자신의 이복동생의 자식들에게도 은덕을 베풀고 있다는 명분도 동시에 주어 다른 제후들도 이에 반발할 수 조차 없었습니다.

 

 

 

또한 같은 해에 제의 도혜왕 유비의 여섯 아들들을 각각 제왕, 제북왕, 제남왕, 치천왕, 교동왕, 교성왕에 봉했습니다. 이는 이 전 해에 제왕 유양이 후계자 없이 죽어 절국된 것을 황제가 은덕으로 도혜왕의 뒤를 잇는다는 명분으로 원래의 제나라를 여섯 등분하여 각각 왕을 세운 것이었습니다. 명분은 이렇게 황제의 은덕이었지만 제후왕들의 세력을 깎아버리겠다는 것과 다름 없었습니다[3][4][5].

 

 

 

가의와 조조의 주장은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둘 실현되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중앙정부가 점점 강력해지면서 기존의 동성제후들간의 갈등은 필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불만은 수면 아래에만 감돌고 있었고 이것이 폭발하게 된 것은 경제 시절이었습니다.

 

 

 

[1] 회남의 여왕이 입조하여 벽양후를 살해하는 등 행동이 매우 교만하였다. 이에 원앙은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 “제후가 지나치게 교만하면 반드시 우환이 생기니, 그를 꾸짖으시고 그의 봉토를 깎는 것이 좋을 듯 하옵니다.” 그러나 황제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 사기 원앙조조열전

[2] 그는 효문제 때에 자주 상서를 올려 제후들의 봉토를 깍아야 하고 법령을 개정해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상소를 수십번이나 올렸다. 그러나 효문제는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의 재능을 기이하다고 여겨 그를 중대부로 승진시켰다.

조조는 어사대부로 승진하여 제후들의 죄가를 들어 그들의 봉토를 삭감하고 그들 봉토 변경에 있는 군을 몰수하자고 주창하였다. - 사기 원앙조조열전

[3] 문제 16년 5월, 제 도혜왕의 아들 6명과 회남 유왕의 아들 3명을 세워 모두 왕으로 삼았다. - 한서 문제기

[4] 문제 16년에 회남왕 유장을 추존하여 시호를 여왕이라 하고 그의 아들 세 명을 회남왕, 형산왕, 여강왕으로 세웠다. - 사기 효문황제 본기

[5] 효문제 12년 성양왕을 회남의 원래 땅으로 옮겨 왕으로 삼았고, 회남왕을 추존하여 여왕으로 삼고, 묘지를 만들어 여전히 제후로써의 예의를 갖추었다.

효문제 16년에 회남왕으로 옮겼던 희를 다시 성양왕으로 삼았다. 황제는 회남의 여왕이 법을 폐지하고, 정도를 따르지 않다가 스스로 나라를 잃고 일찍 죽은 것을 불쌍하게 여겨 마침내 그의 세 아들들을 즉위시켰다. 부릉후 안을 회남왕으로, 안양후 발을 형산왕으로 양주후 사를 여강왕으로 봉하니, 이로써 모두 다시 여왕 때의 옛 땅을 얻어 셋으로 나누어가지게 되었다 - 사기 회남형산열전

 

 

 

※ 출처 : 한서 문제기, 사기 효문황제본기, 사기 회남형산열전, 사기 원앙조조열전, 중국의 역사 진한사,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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