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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군주중 가장 과소평가된 군주
게시물ID : history_1614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전설의코딱지
추천 : 11
조회수 : 1993회
댓글수 : 50개
등록시간 : 2014/06/06 12:21:21
자료는 대부분 엔하위키or 인터넷백과에서 긁어온걸 제가 편집한것입니다


http://mirror.enha.kr/wiki/%EB%AC%B8%EC%A2%85<- 엔하위키 문종항목

(어진은 불타 소실돼 없음)

묘호 문종(文宗)
시호 조선 흠명인숙광문성효대왕(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
공순(恭順)
향(珦)
휘지(輝之)
출생 한성 사저
사망지 경복궁 강녕전
배우자 현덕왕후(顯德王后)
아버지 이도(李祹)
어머니 소헌왕후(昭憲王后)
생몰
기간
음력 1414년 10월 3일 ~ 1452년 5월 14일
양력 1414년 11월 15일 ~ 1452년 6월 1일 (37세 208일)
재위
기간
음력 1450년 2월 17일 ~ 1452년 5월 14일
양력 1450년 3월 30일 ~ 1452년 6월 1일 (2년 64일)



문종은 학문을 좋아했고 학자(집현전 학사)들을 아끼고 사랑하였다. 부왕인 세종은 각종 질환으로 인해 1437년 일치감치 세자(문종)에게 서무(庶務)를 결재하게 하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1442년 군신(群臣)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자가 섭정(攝政)을 하는 데 필요한 기관인 첨사원(詹事院)을 설치, 첨사(詹事)·동첨사(同詹事) 등의 관원을 두었다.

또한, 세자로 하여금 왕처럼 남쪽을 향해 앉아서 조회(朝會)를 받게 했고(南面受朝), 모든 관원은 뜰 아래에서 신하로 칭하도록 하였다. 또한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서무는 모두 세자의 결재를 받으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수조당(受朝堂)’을 짓고 세자가 섭정을 하는 데 필요한 체제를 마련했으며, 1445년부터 세자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이 섭정은 세종이 죽기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로 인해 문종은 즉위하기 전부터 실제적인 정치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따라서, 문종 시대의 정치 방법과 분위기는 세종 후반기의 그것과 크게 변함이 없었다.



한마디로 한국사의 유일한 이과출신. 문무 전부 통달에 인품도, 정치 능력도, 얼굴도( 관우의 풍모가 있고 몹시 잘생겼다고 기록) 모두 완벽했던 엄친아.




1. 재위기간은 짧으나


세종 말년,(정확히 사후 8년전)부터 세종은 거의 식물인간처럼 지내야만 했고, 이에 세종은 문종에게 대리정사를 맡김.

즉 세종 말년에 치적들은 전부 문종이 한일. 실제로 세종이 시작해서 문종이 끝내버린 일들이 대다수라고 함

세종이 문종에게 보낸 신뢰는 상상 초월했다고 함

신하들에게 섭정기간에 임금에 준하는 예(신하로 부터 4배받기, 대신들이 세자에게 신이라고 칭하기, 남면하여 조회 받기)를 받게 하여 실질적인 임금을 만들어줌.

즉, 세종의 태평성대는 세종 혼자만의 업적이 아니라 문종 그리고 그 둘의 후원을 받았던 일군의 선비들의 합작품인것.

실제적으로 통치한 기간은 10년 남짓으로 봐야한다고 함. 문제는 재위한뒤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버린거지만.

일단 문종은 성종보다는 오래살았다. 평균보단 못하지만 극심한 단명은 아니라는 말.

하여튼 문 무 가릴것없이 조선 초기 쌓아올린 업적은 상당하다. 만약 문종이 오래살았다면 세종-문종 테크로 조선은 역사가 크게 좋은쪽으로 바뀌었을것이라고 함.



2. 유례없는 밀덕후 군주


문종은 능력면에서 어렸을적부터 완벽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 말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닌데, 그가 지은 오위진법은 조선건국의 설계자인 정도전의 진법을 조잡하게 보이게 할 정도였다.(정도전은 정치,지략면에서도 최고였지만, 학문면에서도 여말선초를 대표하는 매우 빼어난 인물이었다.) 오위진법은 당시에 이론과 실전을 겸비한 완벽한 진법으로 평가받았는데, 훗날 조선을 대표하는 명장인 이순신장군도 이 오위진법으로 싸워 승리하셨다. 오위진법은 조선이 망하는 날까지 큰 틀에서 유지되었다고 한다.

위 글을 보면 알겠지만 학문뿐만 아니라 병법까지도 통달. 그 세자가 정도전을 발라버릴 정도로 병법에 뛰어나다니 이건 뭐..



3_1-chosun4.jpg

우리가 신기전으로 알고있는 이것. 바로 문종이 오리지날을 만든거다. 일명 문종화차

이것은 국왕이 직접 만든 무기로는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실전에 배치된 무기로써 임진왜란때도 요긴하게 쓰임. 개량을 거치긴 했지만.

(輪對)하고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이 끝나자 임금이 말하기를, “대사헌 안완경(安完慶)이 이르기를, ‘『근사록(近思錄)』의 강(講)을 끝마친 뒤에 마땅히 육전(六典)을 강해야 한다.’고 하나, 내가 생각하건대 육전(六典)은 반드시 강할 필요가 없으나 병서(兵書)는 강하고 싶다. 병서(兵書)는 문장의 뜻을 알기 어려운 것이 많이 있으나, 만약 경연(經筵)에서 강론(講論)한다면 거의 찾아서 연구하여 해석(解釋)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참찬관(參贊官) 정창손(鄭昌孫)이 대답하기를, “병서(兵書)는 성경(聖經)이나 현전(賢傳)이 아니므로 경연(經筵)에서 진강(進講)하기에는 마땅하지 않으니, 청컨대 사서(四書) 오경(五經)과『대학연의(大學衍義)』를 돌려 가면서 진강(進講)하소서. 만약『강목(綱目)』,『송감(宋鑑)』이나『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등의 책이라면 또한 이를 강(講)하는 것이 마땅합니다.”전하 밀덕질은 그냥 너 혼자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의 말이 옳다. 그러나 병서(兵書)도 또한 부정(不正)한 책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강(講)하고 싶을 뿐이다.” 하고, 이어서 부검토관(副檢討官) 이예(李芮)·사경(司經) 윤기견(尹起畎)에게 이르기를, “집현전(集賢殿)에서도 또한 반드시 불가(不可)하다고 이를 것이다. 그러나 동료(同僚)와 더불어 모여서 가부를 의논하여 아뢰어라.” 하였다. 이예 등이 임금의 교지(敎旨)를 가지고 의논하니, 모두 의논하기를, “병서(兵書)가 비록 불경(佛經)이나 도서(道書)에 비할 바가 아니라 하더라도 또한 기모(奇謀) 비계(秘計)의 책이므로 경연(經筵)에서 진강(進講)하기에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이 뜻을 아뢰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깊은 한숨이 느껴진다 정녕 밀덕을 위한 나라는 없는 것인가 이어서『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講)하였다.

출처-http://blog.naver.com/lord2345/50117638545

밀덕후 답게 신하들에게 경연때 병서를 강연하자고 제의까지할정도. 그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 유생 얼라들 무술 가르치고 싶다 <- 이말한거(...)

밀덕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는지 스스로 제갈량보다 조금 미치지 못한 수준이라고 자화자찬하는 부분까지 존재함.

(웃긴건 수양대군이 옆에서 어디 제갈량따위가 형님에게 미치겠습니까 아부떰)

그외 

부왕의 사업을 이어받아 4군 6진의 북방 정비를 완료

군제를 개편하여 3군의 12사를 5사로 재정비하고 병력을 증강

이전까지 없었던 칼의 규격 제정 등등..


3. 하지만 문도 뛰어났으니 문종이겠지


'평상시에는 다른 사람과 논변(論辨)하지 않지마는, 논난(論難)한 데 이르러서는 비록 노사숙유(老師宿儒)일지라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무(武)만 좋아하는 사람인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학문에서도 먼치킨 수준. 

하나를 가르치면 열개를 알아듣고, 토론같은걸 하면 상대를 발라버리는 위엄도 선보임.

측우기의 실제 아이디어도 사실 문종 세자시절에 나온거임. 만든건 장영실이었고.(하여튼 공돌이들 클라스란 대단하다)


성품또한 가히 대인배라 신하들에게 간언하기를 소홀히 하지말라고 부탁하고, 원래 왕에게 간언할수있는 권리인 윤대는 4품이상 관리들에게만 있었는데,

이걸 6품까지 확대시켜버림. 어느 신하가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들어 주는 이런 임금을 안좋아하겠음?

또한 고려왕씨에 대한 멸족령을 거두고, 숭의문을 세워 고려왕씨에 대한 제사를 지내게 함.

문종 사후 모든 만백성이 슬퍼했다는 기록이 나오며, 이는 사랑받는 군주가 아니면 불가능한일이란건 다들 알거임.


-안평대군과 더불어 명필 투탑을 겨뤘다고함.

-말을 매우 잘탔다고함. 활도 증조부만큼은 아니지만 명궁.

-부왕이 앵두를 좋아한다고 동궁에 앵두나무를 직접 가득히 심어버릴정도로 효자. 세종의 건강이 안좋을때 전복도 직접 진상할정도로 극진했다고.

-우애도 매우깊어서 동생들을 매우 잘챙겨줌. 수양대군이 국법을 어기는 양아치짓하고 다닐때에도 수양 쉴드를 엄청나게 쳐줌. 근데 결과는...


4. 단종에게 뒷 배경 심어준일이 없다?


일단 문종은 여자 관계가 몹시 안좋았음. 어떤 의미냐면 한명은 꽃뱀수준으로 음탕했다고 하고 한명은 레즈비언이었고 (이 둘은 폐위)

한명은 단종 낳자마자 바로 사망(...) 

결국 세부인을 둔 홀아비가 되버림.. 결국 죽을때까지 왕비가 없었으며 이는 단종의 뒤를 봐줄 웃어른이 없다는 얘기였음.

이때문에 문종 나름 대책을 세워두는데, 신권을 강화시켜 왕족을 견제시키고 믿을 수 있는 신하들에게 단종의 보좌를 부탁한다. 비는 저런 사정때문에 

어쩔수 없었다 치지만.. 동생사랑때문에 수양견제를 조금 안한게 문제긴했음.

하지만 문종 본인의 왕권은 막강 그자체임. 성군의 적장자로 태어나서 8년간 대리왕도했고 흠잡을데도 없는 능력덕분에 왕실내 권위는 최고봉.

그놈의 재위기간 짧은탓에 사극에서 유약하게 그려낸거임. 사실 이 시기 수양대군은 큰 형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버로우타기 일수였음.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를수 있었던것은 서찰을 읽고 있는 김종서를 철퇴로 내리쳐 죽인 일 덕분. (+한명회라는 먼치킨)

매우 비열한 일임. 달리말하면 이렇게 비정상적이고 비열하게 반란을 일으키지 않으면 수양의 세력이 정상적으로 싸우기에는 매우 약했다는 것을 보여줌.

실제로 당시에 수양은 김종서,안평대군 다음의 제 3당의 영수에 불과했음.

그렇기에 문종의 입장에서 수양은 별로 신경쓸만큼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임. 그리고 그놈의 동생사랑(..)

여담으로 실록을 보다보면 단종은 임금에 오르고 나서, 세종과 문종의 적통 임금답게 점점 군주로서의 자질을 보여준다. 아마 별일 없었다면 영민한 군주가 됐을듯.

아마 수양이 단종을 상왕으로 빨리 몰아낸 이유는, 단종이 더 성장하기 전에 몰아 내지 않으면 자기가 위험해질거란 생각에서였음.


하여튼 여러모로 수양이 개새끼임.



결론을 내리자면 문종은 역대 가장 과소평가된 성군이며, 이게다 수양때문이다. 수양을 죽입시다 수양은 나의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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