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삶은 언젠가 끝날 테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멀고도 먼 이야기라 역설적으로 지금 여기에 살아있다는 사실로 묘한 기쁨을 느낀다.
버스에서 죽음을 생각해보았다. 아니, 생각되었다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누가 죽음을 생각하고 싶겠는가? 문득 죽음을 떠올리는 뇌가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그렇게 심상이 떠오르고 난 후에는 버스에 앉아있는 지금이 소중해지기에 고맙기도 하다. 그러고 난 뒤에 사람들을 보았다.
사람들은 대부분 스마트폰에 몰두하고 있다. 몇몇은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내가 보고 싶은 사람들은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어디론가 가고 있다. 그러면서 창밖을 바라본다. 가는 길을 보고 싶기도 하고, 이런 저런 생각을 정리하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 이어폰에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면.. 문득 외로움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이상한 멜랑꼴리를 느낀다. 고독은 정말 채워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나를 누군가가 조건 없이 사랑해줬으면, 완전하게 공감해줬으면 하고 이뤄질 수 없는 욕망을 본능적으로 갖고 태어나기에 삶은 본질적으로 부조리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삶의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부단히 노력했던가. 이러한 노력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것이다.
운명이냐 의지냐 하는 질문은 나에게 별로 의미가 없다. 삶은 운명이기에 의지가 더욱 빛나기 때문이다. 물론 의지도 운명에 편입된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갑자기 좋아하는 선배를 닮은 사람을 보았다. 그리고 내가 가진 돈과 지식과 외모에 대해 생각해봤다. 나는 그 사람을 가질 수 있을까? 나의 모든 문제는 이 질문 안에 편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