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시대 문학의 시초라 할 수 있는 건안문학을 시작으로 서진(西晉) 시대에는 수도 낙양을 중심으로 이른바 '태강문학' 이란 것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앞서 말한 건안문학의 '건안(建安)' 이 후한 말의 연호인 '건안' 에서 따와 만들어진 말이듯이 이 '태강(太康)' 역시 진이 삼국 중 최후의 국가 오(吳)를 멸하고 난 후 정한 연호인 '태강' 시대에 유행하였다 하여 따온 말입니다.
건안칠자 - 조조, 조비, 조식 이 조씨 삼부자를 주축으로 그 외 공융, 진림, 유정 등 총 7인의 문인들이 모여 만든 일종의 문학 동아리(?)입니다.
바로 앞시기의 건안문학이 당시 시대인 후한 말의 어지러운 세태를 반영하여 주로 비분강개한 필체로 시궁창인 현실을 개탄하였던 것이 주를 이루었던 것에 반면 태강문학은 주로 좋게 말하면 화려한 문장, 나쁘게 표현하자면 군더더기 투성이의 시들이 많이 등장하며 다루는 주제도 귀족들의 향락생활이나 당시 유행하던 도가사상과 섞인 주제들을 다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문학은 귀족들의 소유물이 되었던 것이지요.
이는 태강문학이 건안문학과 태강문학 중간에서 교량 역할을 했던 '정시(定始)문학' 의 시풍을 계승하고 따랐기 때문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정시(定始)는 삼국시대 위(魏)의 연호로서 시기상으로는 서기 240~249년 까지의 약 10여년 동안의 기간을 말합니다. 위진시대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청담사상의 유행이기도 하지만 유독 이 시기에는 청담사상(도가의 한 갈래로 주로 형이상학적인 것을 주제로 토론하는 사상으로, 화려하면서도 퇴폐적이고 몽환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한마디로 뜬구름 잡는 소리나 늘어놓는 사상이라 보시면 되겠습니다)이 성행하는데요, 당시 위나라에서 정적 사마의를 몰아내고 권력을 차지한 조상(曺爽) 휘하 관료들 및 문인들 대다수가 청담사상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청담가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치가였지만 문인이기도 햇던 이들은 청담사상의 영향을 받은 시들을 쏟아내었던 것이지요.
청담사상 역시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지라 이 정시문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태강문학 역시 귀족주의적 성격의 정시문학과 별반 크게 다르지 않은 형태를 보였던 것입니다. 다만 정시문학의 주를 이루었던 청담사상만은 태강문학 시기에는 유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듯 정시문학을 계승했다는 점도 태강문학의 귀족적 성향을 설명하는 한 요인 중 하나지만 또한 헬게이트 급의 후한 말~삼국시대가 종결된 후의 안정된 시기였으니 아무래도 문학부문에 있어서도 비교적 안정되고 향락적인 방향으로 발전했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이러한 시대적 배경의 영향으로 태강문학은 사회적으로 대두되는 문제는 물론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고찰수준에까지 접어들던 건안문학과는 180도 다르게 사회, 인간문제 이딴건 뒷전으로 고이 모셔두고 순전 놀자판으로 노는게 체고시다를 연발하며 문학의 창작자인 귀족문인들의 사상과 생활관을 주입하며 정시문학 시기부터 조짐을 보이던 시의 내용보다는 시 자체의 형식과 문장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시류를 좇아, 어려운 말로는 유미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문학이 여전히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음은 두말 할것도 없고요.
이 태강시대의 대표적인 귀족문인들로는 장화(張華), 육손의 손자인 육기, 육운 형제, 좌사(左思), 반악(潘岳) 등이 있고 특히 조정의 중신이었던 장화는 아예 과거 건안시대에 조조가 문인들을 모아 문학그룹을 만들었던 것을 본따 '24우(二十四友)'라고 하는 문인모임을 만들기까지 합니다.
정리하자면 태강문학은 점차 귀족적 성격을 보이던 건안문학-정시문학에 이어 먼 훗날 당(唐)대를 거쳐 송(宋)대 이전까지 문학작품이 귀족들의 전유물로 확립된, 귀족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결정적인 시기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태강문학의 뒤를 이은 것이 영가(永嘉)문학이란 것인데요, 사실 중국 문학사의 큰 흐름에서 보았을땐 이 영가문학은 그다지 큰 의미는 없습니만 위진시대의 문학흐름을 다루는 글이니 만큼 영가문학도 이 시대의 하나의 흐름으로 간주하고 다루어볼까 합니다.
먼저 '영가(永嘉)' 는 서진(西晉)의 3대 황제 회제(懷帝)의 연호로서 서진 말에서 서진을 계승한 동진(東晉) 초까지의 시기를 말합니다. 기간으로 따지자면 서기 307년~312년으로, 고작 5~6년 남짓한 시기 밖에 안됩니다.
이 영가문학이 대두된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 시대적 배경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삼국을 통일해 안정기를 누리던 서진이었지만 무제(武帝) 사마염 사후를 기점으로 서진은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급격하게 쇠락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틈을 타 북방에서는 그 사이 힘을 기른 흉노가 건국한 한(漢)이 남하하여 서진을 멸망시켜버리는데 이를 '영가의 난' 이라고 합니다. 앞서 설명한 회제의 연호인 영가 시기에 발발한 난이라고 해서 영가의 난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영가의 난으로 진(晉) 왕조는 화북을 상실하고 강남으로 밀려나게 되니 이것이 동진(東晉)입니다. 그리고 화북에서는 이민족 월드인 5호 16국 시대가 전개되고요.
이 영가의 난으로 흉노의 한(漢)에 밀려난 서진은 강남으로 천도하는데 이를 동진(東晉)이라고 합니다. 졸지에 나라의 절반이 떨어져 나가고 궁벽한 강남에 쳐박히게 되었으니 자연스레 그 시대를 반영하는 문학작품들 역시 영토를 잃은 슬픔과 분노, 그리고 언젠가는 중원을 수복하겠다는 의지를 노래하는 시 작품들이 등장하게 되는데요, 이것이 영가문학입니다.
유곤.
대표적인 시인들로는 서진의 신하이자 동진에서도 중신을 역임한 유곤(劉琨), 곽박(郭璞), 노심(盧諶) 등이 있습니다. 특히 유곤은 서진에서도 알아주었던 유명한 시인으로 영가의 난으로 나라가 거덜나버리자 호방하던 그의 시풍이 비분강개해져 망국의 서러움을 노래한 것으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이후 동진을 섬기면서도 그가 남긴 작품들로는 <부풍가(扶風歌)>나 <중증노심(重贈盧諶)>이 대표적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뭐니뭐니 해도 동진에는 위진시대를 넘어서서 중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왕희지나 도연명 같은 거물급의 네임드 문인들이 있긴 합니다만 유곤 역시 동진의 유명문인 중 한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망국의 서러움과 분노, 수복의지를 노래한 시들도 있는 반면에 시궁창인 현실에 좌절하고 체념하여 현실을 외면하고 벗어나려는 도피성 짙은 작품들도 등장합니다. 중국사를 보면 시대가 혼란스러우면 사람들이 대체로 정신적 위안처로 찾는 것이 바로 도가사상입니다. 이 시대의 동진이 그런 경우였습니다. 아마 우린 안될꺼야 식으로 체념한 나머지 현실을 외면하며 많은 이들이 은둔하며 신선이나 불로장생과 같은 도가사상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위에서 설명한 정시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청담사상이 다시 유행하기도 했고요.
이와같은 시류는 먼 훗날 북송(北宋)이 여진족의 금(金)에 밀려나 강남에서 남송(南宋)으로 명맥을 유지하며 문학분야에서 나타난 현상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겠네요. 송(宋)을 대표하는 문학작품인 사(詞)도 남송시기에는 금과의 투쟁을 부르짖는 강경파와 현실에 체념한 온건파 두 부류로 나뉘었으니 말입니다.
이러한 영가문학의 추세는 이후 동진의 주요 문학성향으로 굳어져 동진의 양대 시풍인 현언시(玄言詩)와 유선시(遊仙詩)로 발전하게 됩니다. 현언시나 유선시 모두 노장사상에 기초하여 현실보다는 가상의 신선계에 몰두하고 탐닉하는 현실도피성 짙은 시를 말합니다. 결국 동진은 중원회복의 꿈은 이룩하지는 못했는데 동진의 존속기 내내 이런 암울한 분위기가 사회전반에 깔려 있어 현언시와 유선시 같은 시풍이 유행했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물론 예외적으로 동진 중기 무렵에 <귀거래사>를 남긴 도연명 같이 민생을 노래하고 소박한 삶을 주제로 한 '전원시가' 의 시풍도 등장합니다. 도연명의 시들은 서진~동진 시기의 문학을 점하다시피 했던 현실도피성의 청담사상과는 달리 전원 속의 즐거움과 삶을 노래하는 비교적 현실적인 시풍을 보였던 독특한 시가였습니다.
도연명(陶淵明). 사실 자(字)가 연명이고 실제 이름은 도잠(陶潛)입니다.
나중에 시간이 나거든 위진 시대에 이은 남조(南朝) 얘기도 써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