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친일경찰 퇴진하라"…어느 독립운동가의 최후
게시물ID : history_1610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오래된유머
추천 : 9/8
조회수 : 1641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4/06/04 10:10:48

[임기상의 역사산책 38]이승만 집권 후 첫 작품은 '독립운동가 최능진 체포'

비운의 민족주의자 최능진. 이승만과 친일경찰에 맞서 싸우다 처형당한다.
◈ 최능진, 대구 인근 야산에서 전격적으로 처형되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 11일 경북 달성군 가창면에 있는 야산. 

조용한 산중에 갑자기 '탕~탕~탕' 총소리가 울렸다. 

독립운동가이자 미 군정청 경무부 수사국장을 지낸 52세의 최능진의 심장을 향한 총성이었다. 

최능진은 가족들에게 한 장의 유서를 남겼다. 

"정치사상은 혈족인 민족을 초월해 있을 수 없다. 아버지의 금일의 운명은 정치적 모략에서 비롯된 것인 바, 너희는 조금도 누구에게 반감을 갖지 말고 또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생각도 하지 마라" 

해방 정국에서 국립경찰의 간부이자 대표적인 민족주의자인 최능진은 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일까? 

◈ 안창호 선생과 함께 투옥되다 

최능진은 1917년 미국유학을 떠나 듀크대학과 프린스턴대학에서 체육학을 공부하다 독립운동가인 형들의 영향을 받아 안창호 선생이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한다. 

귀국해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다 1937년 3월 흥사단을 말살하려는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돼 안창호, 조만식 선생 등과 함께 투옥된다. 

1935년 대전교도소에서 출감한 안창호, 조만식 선생을 여운형 선생이 반갑게 맞았다. 왼쪽부터 여운형, 안창호, 조만식 선생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해방 후 조만식 선생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의 치안부장으로 활동하다 공산당의 탄압을 피해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남쪽으로 향하던 중 그는 부하들로부터 어처구니 없는 소식을 듣는다. 

"남조선에서는 아직도 친일 부역 경찰 출신이 그대로 치안을 맡고 있는 모양입네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다른 건 몰라도 북조선에서는 친일파 청산 하나는 확실히 하고 있지 않습네까?" 

"내~ 이 놈들을 그냥 두지 안캈어" 

1945년 9월 15일 해주에 도착해 남조선 신문을 처음으로 구해 본 최능진은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경찰에 투신한다. 

◈ '친일경찰 청산'을 둘러싸고 경찰 수뇌부와 격론을 벌이다 

미 군정 당시의 경찰 수뇌부. 태반이 일제시대에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던 악질 친일파들이었다.
최능진은 능숙한 영어 실력을 무기로 미 군정청으로부터 첫 직장인 경찰관 강습소 책임자로 취임했다. 

그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제가 경찰관 강습소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이 곳에 남아 있던 조선총독부 경찰 출신으로부터 사표를 받아낸 일이었습니다" 

한달 후 미군정이 오늘의 경찰청인 경무부를 창설하자 수사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최능진은 이 곳에서 이승만과 한민당 일파가 친일파를 경찰의 요직에 앉히는 것을 보고 격분했다. 

수없이 많은 독립운동가를 고문하고 죽였던 노덕술이 수도경찰청 수사국장에 취임한 것을 비롯해 이익흥, 최운하, 최연 등 악명 높은 친일경찰들이 속속 중용됐다. 

최능진은 경찰 수뇌부에게 친일경찰 퇴진을 주장했다. 

돌아온 대답은 어처구니 없는 논리였다. 

"일본경찰 출신이라고 모두 Pro-JAP(친일파)가 아니라 Pro-JOB이었다" (조병옥 경무부장) 

"경찰은 기술직이라 어쩔 수 없다"( 장택상 수도경찰청장) 

당시 수도 서울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었던 장택상 수도경찰청장. 이승만의 집권을 위해 친일경찰을 등용하고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다.
친일경찰 청산을 둘러싸고 최능진과 조병옥. 장택상이 정면으로 충돌한 계기가 1946년 10월에 대구 일원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였다. 

조병옥은 '좌익세력의 불순한 파괴적 정치활동'이라고 발표했지만, 현지에 다녀온 최능진은 이를 반박했다. 

"좌익도 문제지만, 일제시대의 고등계 형사들이 해방 후에도 버젓이 경찰에 몸담고 있어 일반 양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는 것도 큰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최능진은 경찰 수뇌부의 압력에 밀려 친일경찰이 장악한 경찰을 떠나게 된다. 

그는 사퇴 성명을 통해 "조병옥. 장택상 씨가 경찰 행정을 한민당의 책동에 의해 자행해온 것은 사실이다. 일제 주구가 일조일석에 애국자가 되어 민중의 지휘자가 될 수 없다"고 일갈했다. 

◈ 이승만에 맞서 5.10 단독선거에 출마하다 

한민족 역사상 처음 치러진 5.10선거. 북한 주민들과 상해임시정부 계열이 빠진 반쪽 선거였다.
최능진은 일제 때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부터 이승만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집권하면 통일의 길도 멀어지고 독재체제가 굳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그에 맞서 출마하기로 했다. 

한편 이승만 세력은 선거구인 동대문 갑구에 무투표 당선을 내심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 최능진이 출마하자 온갖 수단을 동원해 방해공작에 나섰다. 

동선거위원회가 계속 트집을 잡아 접수를 연기시키는가 하면 서북청년단원들이 나서서 추천서 가방을 탈취했다. 

결국 최능진의 출마는 '정치테러' 끝에 무산된다. 

자기외에는 아무도 출마하지 못하도록 공작한 후 여유있게 투표하는 이승만.
선거가 끝나자 이승만은 정치공작의 대가로 선물을 준다. 

뒤에서 진두지휘한 백성욱은 내무장관에, 하수인인 서북청년단 리더 문봉제는 교통부장관에, 하수인 이성수는 백성욱의 공보비서로 발탁된다. 

◈ 체포…전쟁 중 정전과 평화운동…다시 투옥된 후 처형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한 달 보름이 지난 1948년 10월 1일 새벽. 

수도경찰청 형사대가 최능진의 자택에서 그를 연행했다. 

이른바 '혁명의용군 사건'이었다. 

그에게 씌어진 혐의는 서세충(독립운동가), 오동기(광복군 출신으로 14연대장 역임) 등과 함께 쿠데타를 사주해 이승만 정부를 전복한다는 어마어마한 내용이었다. 

이 사건은 나중에 악질적인 관동군 헌병 출신인 김창룡 특무대장이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승만과 김창룡 특무대장. 김구 선생 암살을 시작으로 부하들에게 사살되기까지 온갖 정치공작을 저질렀다.
혐의는 어마어마한데 형량은 3년 6개월에 그쳤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던 최능진은 인민군에 의해 석방된다. 

그는 중도파 국회의원들과 함께 전쟁을 중단하자는 평화운동을 벌인다. 

서울이 수복되자 최능진은 다시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죄목은 평화운동을 벌여 적을 이롭게 했다는 것이다 

그가 총살된 후 가족들은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간 뒤에야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국가는 유가족에게 사과하라" 

2009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최능진은 이승만에게 맞선 것을 계기로 설치 근거도 없고 법관의 자격도 없으며 재판 관할권도 없는 재판부에 의해 사실관계가 오인된 판결로 총살됐다"고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국가는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법원은 재심을 수용하라고 권고했다. 

최능진의 명예를 국가기관에서 59년만에 회복시켜준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최능진을 억울한 죽음으로 몰고간 김창룡은 비명 횡사한데 이어 죽어서도 갈 곳을 못찾고 있다. 

◈ 수난받는 김창룡의 묘…그를 칭송한 친일학자 이병도 

관동군 소속 헌병으로 독립군을 잡으러 다니던 김창룡은 이승만의 총애를 무기로 대한민국 국군을 갖고 놀았다. 

온갖 조작 사건의 중심 인물이었던 그도 결국 부하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된다. 

현재 대전현충원 장군 묘역에 안치된 그의 묘 앞에는 매년 시민단체 회원들이 몰려와 시위를 벌인다. 

김창룡의 묘역은 "파내라"는 시민단체들의 집회와 프래카드로 늘 어수선하다.
이들의 주장은 "독립군을 고문한 민족반역자가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는 것은 애국지사를 욕되게 하고 민족정기를 훼손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특히 "김창룡의 묘 인근에 백범의 모친과 큰 아들이 안장돼 있다"며, 즉시 국립묘지 밖으로 이장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김창룡 묘는 원래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에 있는 관악산 기슭에 있었는데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한 것이다. 

원래 묘지에는 대표적인 친일 사학자인 이병도가 비명을 지은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식민사관 보급에 노력했던 이병도.
세월이 흐른 후 이 묘비가 사위가 소유하고 있는 승마장 마굿간에 버려져 있는 것을 시민의 신문 정지환 취재부장이 확인했다. 

묘비는 여러 조각으로 쪼개진 채 야생동물의 배설물과 흙덩이와 뒤엉킨 채 쓰러져 있었다. 

후손들이 버린 것은 이병도일까? 아니면 욕된 인생을 산 조상일까? 

친일학자 이병도가 비문을 쓴 김창룡의 비석이 부러진 채 나딩굴고 있다. (사진=정지환 시민의 신문 취재부장 제공)
이 묘비를 읽어 보자. 

"조국 치안의 중책을 띠고 반역분자 적발에 귀재의 영명을 날리던 고 육군특무부대장 김창룡 중장은 4289년(1956년) 1월 30일 출근 도중에 돌연 괴한의 저격을 받아 불행히도 순직했다. 이 참변을 듣고 뉘 아니 놀래고 어 하랴. 아! 이런 변고가 있을까? 나라의 큰 손실이구나… 아~ 그는 죽었으나 그 흘린 피는 전투에서 흘린 그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기리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 - 문학박사 이병도 지음 

관동군 헌병으로 독립군에게 총질을 하던 친일파와 민족의 혼을 파먹던 총독부 사학의 거두 간의 찐한 우정이 느껴진다. 

그래서 초록은 동색이라고 했던가?

http://www.nocutnews.co.kr/news/4035836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