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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곤양전투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1609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4
조회수 : 1800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6/03 22:34:57

왕망은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세우고 여러 가지 개혁을 시행하지만, 현실과 맞지 않은 왕망의 개혁은 사회적 혼란을 가져오게 되고 곧 전국각지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납니다. 적미의 난으로 대표되는 농민반란 그리고 남양 유씨 일족이 일으키는 호족 반란 등이 대표적인 반란이었습니다.

 

이 중 남양 유씨 등을 중심으로 한 호족 세력들은 한왕조 부흥에 초점을 두고 기원후 23년 2월 유연을 황제로 추대하고 경시(更始)를 연호로 삼았습니다.

 

형식적으로나마 왕조 체제를 갖춘 경시제는 즉위 다음 달인 3월부터 대대적인 영역 확장에 들어갑니다. 3월에는 편장군 유수(훗날 광무제)가 북방으로 진격하여 곤양, 경릉. 언 등을 공략하였고 5월에는 대사도 유연(유수의 형)이 완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 6월 갱시제는 완을 수도로 정합니다.

 

이러한 경시제를 중심으로 한 한 부흥세력의 맹공에 왕망은 대사도 왕읍과 사도 왕심을 사령관으로 하여 무려 42만이나 대군을 낙양에 집결시켜 경시제 토벌을 명합니다. 그리고 이 토벌군이 처음으로 공격한 곳이 바로 곤양이었습니다. 곤양은 낙양에서 완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도중에 있는 곳이었습니다.

 

당시 곤양에는 편장군 유수를 중심으로 하여 1만의 병력만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유수 휘하의 병사들은 성 밖을 가득 메운 엄청난 수의 병력에 질려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휘하 장수들은 철군을 주장할 정도였습니다. 유수 역시 이 상태로는 왕망의 토벌군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남은 이들을 격려하고 13기의 병력만을 거느리고 성을 탈출하였습니다. 왕심과 왕읍은 완 공격이 중요하니 곤양의 포위를 풀자는 부하들의 제안을 무시하고 압도적인 병력만을 믿고 계속 곤양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하지만 곤양에 남은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기에 공격은 수월치 못하였습니다.

 

한편 유수는 언과 정릉 지역에서 병력 1만을 이끌고 6월 초하루, 왕읍과 왕심의 본영을 급습했습니다. 유수가 이끈 구원군 선발대 1천 명은 왕망의 토벌군에서 불과 4, 5리 떨어진 곳에 주둔하였습니다. 왕읍과 왕심은 군사 수천을 보내 이들을 공격하였고, 유수는 직접 선두에 서서 군사들을 지휘하며 왕망의 군사 1천 명을 죽이고 그들을 패퇴시켰습니다. 동시에 유수는 왕망의 토벌군 내부에 헛소문을 흘리게 하여 왕망 토벌군의 사기를 뒤흔들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군사 3천을 뽑아 곤수를 건너 왕망 군대의 본진을 공격했습니다. 당시 본진에는 왕읍과 왕심이 이끄는 1만의 병력이 있었습니다. 다른 부대는 왕읍의 명령으로 주둔지에서 움직이지조차 못하여 유수의 기습적 공격에 대처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유수가 이끈 3천 병력들은 거세게 왕읍과 왕심의 본진을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42만이나 되는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유수의 기습적인 공격 그리고 왕읍의 잘못된 명령으로 인하여 왕망의 토벌군은 전혀 대응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유수의 공격을 신호로 곤양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던 병력들도 몰려나와 왕망의 토벌군을 공격했습니다. 치열한 난전 끝에 사도 왕심은 전사하고 대사도 왕읍은 도주했으며 42만이나 되는 대군은 완전히 와해되어 흩어져 버렸습니다. 1만이 겨우 넘는 병력으로 42만의 대군을 물리친 것이었습니다.

 

곤양 전투는 안 그래도 불안정하던 왕망 정권의 붕괴를 더욱 가속화시켰습니다. 이 전투에서 살아남아 각 지역의 주군으로 돌아간 자들이 왕망군의 허약함을 선전했고, 곧 각 지역에서 스스로를 천자라 일컫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신나라의 수도인 상안(常安 = 장안)이 위치한 관중에서도 농민반란과 호족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경시제도 이해 10월 수도를 완에서 낙양으로 옮기고 적미의 지도자들도 갱시제에게 복속하는 등 경시제를 중심으로 하고 있던 한 부흥세력은 더욱 기세등등해졌습니다.

 

여담 : 이 전투 직후 경시제는 유수의 형이자 당시 남양 호족집단의 우두머리인 유연을 죽였습니다. 이는 남양 호족집단과 라이벌을 이루고 있던 신시와 평림 출신 영수들의 책동도 있었지만, 경시제도 유연이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유연에게 가해진 위해는 유수에게까지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는 곤양전투를 승리로 이끈 장본인이었고 유수 자신도 경시제에 대해 복종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 출처 : 중국의 역사 ‘진한사’, 네이버 지식백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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