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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서위와 북주 시대의 부병제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1607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6
조회수 : 1581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6/03 00:38:21

북위 말 효명제 정광(正光) 5년(524) 3월에 옥야진민(沃野鎭民)인 파락한발릉(破落汗拔陵)이 진장을 죽이고 진왕(眞王) 원년이라고 하고 시작된 육진반란은 다음해인 효창(孝昌) 원년(525)에 이르러서는 북위의 북방 전선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이윽고 북위는 우문태의 서위와 고환의 동위로 갈라집니다.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갈라질 무렵 서위의 중앙군은 우문태가 하주자사 때의 약간의 병력과 하발악의 유중(遺衆) 2천여 명 그리고 과거 북위시대 관서 연변의 고평진과 박골진 등에 주둔시킨 선비 병사의 자손들과 하주와 양주의 군진에 배치된 선비 병사의 자손들로써 군역을 지고 있던 군사들과 효무제가 몽진하였을 때 수행한 1만명의 정도의 병사가 전부였습니다.

 


이에 비해 고환은 북위시절 북위의 주력군인 경사의 금위군과 병주, 사주, 분주 이 3주에 이주시킨 선비부민으로 구성된 수십만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병력 수에서 압도적으로 뒤지고 있던 우문태는 그 지역의 토착 한족을 징모하여 이를 주력으로 중앙군을 편성하게 되니다. 이것이 북주와 수나라 그리고 당나라 초기 군제의 근간을 이룬 부병제의 시작이었습니다.

 


대통 3년(537) - 사원에서 벌인 동위와의 회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하동지역까지 확보한 우문태는 동위에 대한 전선 기지를 화주(華州)에 패부(覇府)를 설치하고 중앙군도 이주시킵니다.

대통 4년(538) - 낙양 부근에서 벌인 전투에서 서위의 군대가 패배합니다. 이 패배 이후 우문태는 중앙군의 정비와 확충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기존의 중앙군을 화주에 정착시키고 화주의 한족 농민을 병사로 징모하는 한편 군제의 체계화를 도모하기 시작합니다.

대통 8년(542) - 6군 창설

대통 9년(543) - 낙양 북쪽 망산에서 서위에 대패. 이후 병력 보전과 확충을 위해 관중의 중부와 서부로 징모 범위가 확대됨.

대통 16년(550) - 중앙군 24군 편성.

 


부병제의 근간을 이루는 병사들은 그 지역 토착 호족들의 사병인 향병(鄕兵)이었습니다. 우문태는 6군을 설치하면서 각 지역의 향병들을 육주국(六柱國)의 지휘계통에 편입시켜 지방에 분산된 무력집단을 중앙화시켰습니다. 우문태의 이러한 조치에는 이들 호족이 이끄는 사병집단을 정식 군대화시킴으로써 군사력의 강화와 유민들의 정착, 치안의 유지와 지방 호족을 관료화하여 이들을 국가 권력 하에 두어 지배, 통제시키겠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각 지역의 호족들은 향병 세력의 대소에 따라 수도독, 태수, 자사, 대도독 등의 관직을 제수받았습니다. 24군의 편성이 완료된 이후에도 지방에 설치된 의동삼사(義同三司)에는 그 지방 출신의 수망, 향망 등으로 칭해지는 유력자가 선임되고 있었습니다.

  



부병제 구조

 


주국대장군 6인 - 대장군 12명 - 개부의동삼사 24명 - 의동삼사 96명

24군 - 48단 - 96의동부

 


각 지방에는 의동삼사들이 파견되어 의동부를 설치해 관내의 병사를통솔하고 유사시에는 의동부 병사가 동원되어 2개의 의동부를 1단으로 편성하고 다시 2개의 단으로 1군을 편성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24군이 조직되었습니다. 24군은 병력의 기초가 되고 지방의 의동부가 지속적으로 병력을 공급하여 의동부 전체를 24군이라고 불렀습니다.

 


24군 창설 당시인 대통 16년(550)에는 팔정(八丁)에 대하여 1병을 징모하는 팔정병(八丁兵)이었지만 보정(保定) 원년(561)에 12정에 1병을 징모하는 제도로 개정되었습니다.

 


* 수서 권24 식화지

- 보정 1년(561)에 8정병을 고쳐서 12정병으로하였고 매년 1개월씩 복역하게 하였다. 건덕 2년(573)에 군사를 시관(侍官)으로 고치고 백성들을 모아서 충당했으며 현적(縣籍)을 없앴다. 이후 한인의 반은 군사가 되었다.

 


부병은 유사시에는 출정하고 그 밖에는 의동부의 부주인 의동삼사는 대도독, 수도독, 도독 등의 인솔 아래 중앙에 번상하였는데 번상은 1회에 약 1개월, 1개월 가운데 15일은 당번일로 의장경위에 복무하고 남은 15일은 비번일로 훈련에 종사하였습니다.

 


우문태는 패부를 화주에 두고 항시 상주했기에 당시 서위의 수도였던 장안보다 더 많은 부병이 화주에 번상하여 우문태의 위병이 되었습니다.

 



부병

 



부병의 무기, 융의(戎衣) 기타 필수품 중 부병이 스스로 갖춘 것은 활과 화살 그리고 도(刀)였고 나머지는 국가에서 지급하였습니다.

 


* 왕해 권138 병지 업후가전

처음에는 여섯 집에서 중등이상의 신체를 가진 백성을 부병으로 하였고, 집에서 남자가 셋 있으면 한 사람의 능력만 이용하고 그의 조용조를 면제해 주었다. 농한기에는 열병하는 것을 가르치고, 양곡과 무기는 짐 싣는 소와 노새, 양식에 의거하여 6집이 같이 준비하여 기르고 훈련시키며, 그래서 만약에 자식이 있으면 소수로써 다수를 이길 수 있게 되는 까닭이다.

 



주국대장군과 대장군

 



24군은 우문태의 승상부가 관장하였습니다. 우문태는 24군의 총수였으며 그 아래로 주국대장군 6명과 대장군 12명은 선비계 내지 북족계(北族係) 그리고 무천진 영주 한인 자손 즉 선비화한 한족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훈귀라고 불렸으며 우문씨를 포함해 서로 밀접한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 출처: 위진남북조사(이공범),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가와카쓰 요시오), 위진남북조사(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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