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도 광해군도 세조도 태종도 아닌 정조
정조의 비밀편지 299통 첫 공개
과격한 언사·노회한 정치··· 기존의 성군 이미지와 거리
다혈질적 성향 반영하듯 비속어·구어 남발 '눈길'
각 당파 원격조정 등 탕평 구도도 통념과는 차이
정조는 어떤 군주였을까. 그리고 조선 후기 정치구도는 어떻게 짜여 있었을까.
정조 대왕은 조선의 왕 중에서도 몹시 입이 험한 편이었는데
이 사실은 최근에 발견된 비밀 편지 299통으로 밝혀졌다.
조선 22대왕 정조가 신하에게 보낸 비밀편지가 발견됐다. 정조의 꼼꼼한 성격, 막후정치의 실체가 여실히 드러난다.
9일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정조가 친필로 쓴 299통의 편지를 공개했다.
1796년 8월20일부터 1800년 6월15일까지 작성된 편지로 정조가 노론(老論) 벽파(僻派)의 지도자 심환지(1730∼1802)에게 보낸 편지다.
정조는 편지를 없애라는 지시를 계속 남겼다.
“불에 태워라”, “찢어버려라”, “세초하든지 돌려보내든지 하라”는 등의 문구가 다수 확인된다.
하지만 심환지는 편지를 읽고 나서 즉시 없애라는 정조의 명령을 거부하고 어찰을 고스란히 보관해 뒀다.
어찰을 받은 날짜와 시간을 기록해 어찰의 작성 시기도 명확하게 남겼다.
편지를 통해 대립각을 세웠던 인물로 알려진 심환지를 자기 사람로 만들려던 정조의 노력을 엿 볼수 있다.
정조는 자신의 건강 상태 같은 기밀도 편지 첫머리에 써서 알려줘 심환지에게 그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보여 주려 한 것으로 보인다.
“간밤에 잘 있었는가. 나는 곽란(癨亂)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며칠 동안 괴롭게 앓고 있다. 정사년(1797) 1월 5일.”
“며칠 동안 소식이 없었는데 편지를 받으니 마음이 놓인다. 나는 시사(時事)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마다 그저 마음속에 불길이 치솟게 만들 뿐이다. 불은 심장에 속하니,
여기에 따라 眼花가 나을 기미가 없으니 너무나도 안타깝다. 동문(洞門) 무오년(1798) 7월8일.”
격정적인 군주, 정조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이 9일 발굴해 공개한 정조의 비밀 편지는 지금껏 알려져 있던 정조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탕평책을 시행하고 문치(文治)를 내세워 '개혁 군주'이자 '실학(實學) 군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 정조다.
그러나 이번에 발굴된 편지는 정조가 과격한 언사를 서슴지 않았으며, 정치적 공작에도 상당히 능한 임금이었음을 드러낸다.
또한 정조가 노론(老論) 벽파(僻派ㆍ다수 강경파)와 대립하면서 남인(南人), 노론 시파(時派ㆍ소수 온건파) 등을 고루 등용했다는
탕평(蕩平)의 정치구도도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심환지에게
"갈수록 입조심을 안하는 생각없는 늙은이 같으니.."
'개에 물린 꿩 신세'(犬囓之雉), '꽁무니 빼다'(拔尻), '마누라 장의'(抹樓下長衣)….
정조가 우의정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 등장하는 문구들이다.
정조는 이처럼 구어적 표현뿐 아니라 저잣거리의 표현이나 비속어도 가리지 않고 편지에 썼다.
측근으로 알려진 서영보(1757~1824)에게
'호로자식'(胡種子)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김매순(1776~1840)에 대해서는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과 김이영(金履永)처럼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하는 놈이 편지와 발문으로 감히 선배들의 의론에 대해 주둥아리를 놀렸다. 정말 망령된 일이다”면서
비난을 퍼붓는 내용이다.
황인기와 김이수에게
"이놈들이 어떤 놈들이기에 주뒹아리를 함부로 놀리느냐!"
서매수에게
"늙고 힘없는"
김의순에게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하고 졸렬한"
이노춘에게
"약하고 물러터진 X"
그외에
개에 물린 꿩 신세’ ‘볼기까고 주먹 맞기’ 등의 속담도 마구 구사하였다
“오장에 숨이 반도 차지 않았다"
"도처에 동전 구린내를 풍겨 사람들이 모두 코를 막는다"
빡치느라 마구 쓰다보니
“놈들이 한 짓에 화가 나서 밤에 이 편지를 쓰느라 거의 5경이 지났다.
내 성품도 별나다고 하겠으니 우스운 일이다”
이건 마치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나 정신없이 천플을 달며 키배를 벌이다 보니 새벽이 된 이치와 같다
편지를 쓰다가 중간에
呵자를 세번 써서 呵呵呵
이 단어의 의미를 찾자면 껄껄껄 요즘 식으로 하면 "ㅋㅋㅋㅋㅋㅋ"
그는 경연 중에 "경들에게는 더 배울것도 없다." 하며
경연을 폐지하기도 하였으며
신하에게 대놓고"공부 좀 하시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담배를 정말 사랑하여 신하들의 빗발치는 금연 상소도 물리치고 끝까지 담배를 피웠으며
심지어 조선의 대학자들을 모여놓고 시험 주제로 담배를 내기도 하였다.
심지어 한문 편지 한가운데 近日僻類爲뒤 쥭박 쥭之時, 有時有此無根之 라는 부분이 보인다.
즉, 한글로 '뒤쥭박듁'(뒤죽박죽)이라고 갈겨 쓴 부분도 있다.
흥분해서 말하다가 너무 빡쳐서 생각이 마땅한 한자가 생각이 안났는지 한글로 뒤쥭박쥭이라 적어주는 센스를 발휘하기도 하였다.
비밀스러운 편지임을 감안하더라도 정조가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경우에 따라 격한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성격이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자료에도 정조가 현릉원(사도세자의 묘)을 참배하면서 감정이 북받쳐 우는 부분 등이 묘사돼 있지만,
이번에 발굴된 편지는 훨씬 적나라한 정조의 인간적 면모를 담고 있다.
특히 구어를 마구 섞어 쓴 문체는 기존에 알려졌던 문장가 정조의 이미지와 판이하게 다르다.
공식 사서(史書)들은 정조가 북학파 실학자 박지원(1737~1805)의 '열하일기'에 대해
"글이 순정(醇正)하지 못하다"며 고쳐 쓸 것을 명할 정도로 문체에 있어서 엄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정치공학
이번에 발굴된 편지는 정조의 인간적 면모와 더불어 정조의 노련한 정치력,
그리고 당쟁으로 얼룩진 조선 후기의 정치구도를 짐작하게 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편지가 던지는 가장 큰 의문은, 정조가 왜 노론 벽파의 우두머리였던 심환지와 내밀한 서신 교환을 했느냐, 하는 것이다.
노론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게 만들었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드러내놓고 반대했던 세력이다.
김문식 단국대 교수는 "조선 후기 당쟁 구도는 단편적 도식으로 이해하기 힘들다"며
"정조도 1795년부터는 벽파를 중요한 세력으로 인정하고 이용하려 했다"고 말했다.
임형택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은 "정조는 정치적 수가 상당히 높은 사람"이라며
"심환지를 자기 심복으로 여기지 않았더라도, 친밀감을 담은 편지를 통해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편지 중에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내는 약품 물목을 적은 것, 심환지의 아들이 과거 시험에 떨어지자 안타까워 하는 것 등도 포함돼 있다.
심환지가 "즉시 불태워버려라"는 정조의 명을 어기고 편지를 파기하지 않은 것은 정조의 정치 의도를 증거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과,
임금의 친필 편지를 버리기 힘든 아쉬움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정조가 심환지뿐 아니라 다른 정치세력도 비슷한 방법으로
관리ㆍ조종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백승호 서울대 교수는 "정조는 남인의 중심 인물이었던 체제공(1719~1799)과도
비슷한 편지를 주고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며 정조가 편지를 통해 각 정치세력을 '원격 조종'하는 노회한 정치력을 지녔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또 편지 가운데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미리 짜고' 상소를 올리게 하는 등 정도를 벗어나는 정치적 술수에도 주저함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심환지는 누구인가
심환지(1730~1802)는 마흔 나이가 넘은 1771년(영조 47년) 문과에 급제해 주로 언관(言官ㆍ임금에게 간언을 하는 관리)으로 일했다.
직언을 서슴지 않아 여러 차례 유배에 처해졌으나 강직함과 업무 능력, 정치적 리더십을 인정받아 노론 벽파의 영수 자리에 오른다.
정조의 정적이었던 정순왕후 측과 가깝게 지내는 등 정치적으로 정조와 대척점에 있었다.
말년의 정조가 벽파를 정치적 동반 세력의 하나로 인정한 후에는, 껄끄러운 관계에도 불구하고 중용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 돼 있었다.
벽파의 우두머리라는 상징성 때문에, 후세에 정조 암살설을 제기하는 여러 소설작품이나 영화 등에서 정조 독살의 배후로 지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