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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어느 귀족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1604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5
조회수 : 117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6/01 09:52:59

양나라 말기 무렵에 사교(謝僑)라고 하는 사람은 원래 제일류의 고귀한 가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귀족인데도 불구하고 원체 집에 돈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쌀이 떨어졌습니다. 귀족체면에 구걸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농사를 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장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사실 농사나 장사를 하고 싶어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사교가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보다 못한 그의 아들이 말했습니다.

 

 

※ 이 사교란 사람 책에서는 어느 가문이라고는 나오지 않았지만 낭야 왕씨와 함께 동진 최고의 일류 귀족으로 칭송받았던 진군 사씨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이 진군 사씨 출신으로 유명한 사람으로는 왕도와 환온 사후 사실상 동진과 귀족들을 이끌었던 사안(謝安)이나 비수대전 참전했던 사현(謝玄 : 사안의 조카로써 북부 군단의 총사령관이었습니다.), 사석(謝石 : 사안의 동생으로 비수대전 당시 동진군 총사령관이었습니다.), 사령운(謝靈運 : 유송의 문제 무렵에 일대를 풍미한 시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송문제 원가元嘉 10년인 433년에 송왕조를 진秦왕조에 비유하고 당시 황제인 문제를 왕망과 같은 찬탈자로 비유하여 광동의 번화가에서 반역죄의 죄목으로 사형에 처해졌습니다.「세설신어」에서 이 사령운을 참다운 귀족으로 살아간 마지막 인물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등이 있습니다.

 

 

「아버지, 한서(漢書)를 저당 잡히고 돈을 빌립시다.」

 

그러자 사교가 정색하며 말했습니다.

 

「설사 굶어죽는다 해도 책을 밥값으로 쓰겠느냐.」

 

물론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 시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상이 온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돈」의 열풍이 남조 귀족 사회를 강타하면서 귀족의 체면 따위는 우스운 소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양나라 말기에 그러니까 「후경의 난」이전까지 남조의 경제는 번창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남조 여러 왕조 내부적으로 여러 일이 있었지만 전진이 침공한 비수대전이나 송문제 무렵의 태무제 공격(장강 북부는 쓸었습니다.)을 제외한다면 장강 남쪽은 평온하였습니다. 이러한 안정된 상태에서 「동진-송-제」이들 세 왕조가 축적해온 경제 성장이 꽃핀 시기였습니다. 역시 귀족들도 이 흐름을 탔고 그들 생활에도 화폐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상업행위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상인들에게 의존을 했고 그들이 화폐를 원하면 원할수록 귀족들의 상인 의존도는 심해져 갔습니다. 약삭빠른 상인들은 이들 귀족들을 이용하여 큰 돈을 벌었지만 그 반대로 귀족들의 수익은 갈 수록 줄어들었습니다.

 

 

※ 양나라 당시에는 2만 곡(斛)짜리 배라고 할 만한 대형 화물선들이 물자를 수송하며 왕래하고 있었고, 수도인 건강 남쪽에는 진회(秦淮)라고 하는 운하가 있었는데 이 운하는 장강과 남조 최대의 경제 중심지인 동방 삼각주로 통해 있었습니다. 이곳은 오가는 상인들의 발착으로 매우 번잡했고 양나라로 넘어가면서는 홍등가로 번영해서 유명해졌습니다.

 

 

※ 양나라 말기의 황족, 귀족 등 상층부들은 사치에 완전 빠져버린 상태였습니다. 「일순간의 환락을 위해 태산같은 재산을 소비한다. 이것이 세상의 풍조가 되고 게다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라고 당시의 식자가 비판할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이들 상층부뿐만 아니라 은행들의 호사스러움은 당시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습니다.

 

게다가 양무제가 스스로 「삼보의 노」가 되어 사원에 몸을 던지고, 다시 정부가 노예가 된 황제를 속신시키기 위해 억만전을 사원에 지불하는 이러한 것도 상층부들의 소비 열기를 부추겼습니다. 다른 귀족들도 사원들에 대한 거액의 희사를 했습니다. 황제를 비롯한 상층부 모두가 소비의 열기에 미쳐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치에 빠진 귀족들은 옷에 향수를 뿌리고 분과 연지를 바르고 하이힐 비슷한 신발을 신고 다녔다고 합니다. 거리에 나갈 때는 수레를 타고 집에 있을 때는 시종에게 몸을 맡기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치에 빠져서 허우적 거려 유약해진 귀족들은 훗날 「후경의 난」에서도 제대로 대처조차 하지 못합니다. 가령 어떤 귀족은 말이 소리를 내며 바릴질을 하는 것을 보고 무서워 하며 「저건 호랑이다! 왜 말이라고 부르는 것인가!」라고 했으며 후경이 수도를 공략했을 때 유명한 문사로 알려진 유신(庾信)은 철면(鐵面 : 철가면)을 쓴 적병을 놀라 쏜살같이 도망갔다고 합니다.


 

※ 출처 :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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