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5년, 화려하기 이를데없던 오사카성이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불에 타들어갔다.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가의 위용이 오사카성과 함께 사라져가고 있던 것이다.
이제 전일본에서 토쿠가와 가문에 맞설 세력은 사라졌다.
(토쿠가와 이에야스 : 게임 소개가 아니라능 뀨잉뀨잉)
하지만 일본은 봉건제 사회였고 과거 센고쿠 다이묘들이 그랬던것처럼 지방세력들이 힘이 생기면, 그리고 막부가 쇠약해지면 언제든지 그들은 토쿠가와 가문에 도전할 수가 있었다.
다시금 일본을 통일한 토쿠가와 가문은 아시카가 가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영구공고히 하기위한 정책들을 수립한다.
먼저 결정해야 할 문제는 새로운 토쿠가와 가의 막부의 소재지였다. 당시 일본의 양대 최대도시는 쿄토와 오사카였는데 쿄토는 반막부적인 성향이 강한 공가(公家)세력과 천황의 눈치를 볼수밖에 없는 지역이었고, 더군다나 최근에 망한 막부인 무로마치 막부의 소재지였으며 오사카는 토요토미 가가 부흥시킨 지역이라 토요토미 가에 대한 충성도가 매우 높은 지역이었다.
따라서 토쿠가와 가는 일찌기 토쿠가와 가가 전봉되어 세력기반을 다져놓은 무사시 지역 동쪽의 에도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기로 결정한다.
둘째는 지방세력의 통제론에 관한 문제였다. 토쿠가와 가는 토요토미 가와의 전쟁에서 토요토미를 지지한 루저세력들을 숙청하거나 혹은 감봉하여 촌구석으로 보내버리고 공신들과 지지세력들은 우대하여 상대적으로 에도와 가까운 지역을 통치하게끔함으로서 에도의 안정을 도모했다.
하지만 이것보다 보다 더 토쿠가와 체제의 특징적인, 그리고 다소 혁신적인 제도가 등장하는데 바로 산킨코타이 제도이다.
산킨코타이 제도는 모든 영주들이 1년마다 에도와 영지를 왕래하고 처자식은 에도에 볼모로 보내도록 한 제도이다. 이 제도는 특히 상대적으로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전직 루저토자마 다이묘들의 견제수단으로 더 탁월했는데, 거리가 멀수록 경비와 시간이 더 소요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토쿠가와 정권은 역대 어느정권보다도 체제유지장치를 타이트하게 조직했지만 이들은 막강한 토쿠가와 가문의 위용에 의하여 별다른 저항없이 일본사회에 정착하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근 100여년간 헬게이트가 오픈된 사회였던 일본에 정치적 안정이 도래하였고 정권 초기부터의 정치적 안정은 곧 장기평화의 전주곡이었다.
평화가...! 올거라구요...
일본에 평화가 도래하자 일본인들은 사회의 에너지와 민족의 역량을 내부발전으로 돌릴수 있게 되었다. 에도막부 성립이후 일본전역에서 신전(新田)개발 붐이 일어난다. 쵸슈번이나 토사번의 경우 농지규모 성장률이 에도초기에서 말기까지 연 평균 3%를 넘기기까지 하였다. 1600년 일본의 경지규모는 206만 5000정이었으나, 1850년에는 317만정으로 확대된다.(하야미 아키라, 미야모토 마타오의 연구)
비단 신전의 개발뿐만이 아니라 수차와 같은 진보된 농기구의 확산또한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는데, 카토 히로시의 연구에 따르면 1600년 1200만 규모였던 일본의 인구는 불과 100여년만에 3000만을 돌파하게 된다.
급증하는 생산력과 인구는 상업의 발달을 촉진하였는데, 상업의 규모가 팽창하는만큼 상업의 기법도 발전하였다. 오사카의 도지마에는 쌀 거래소가 형성되는데, 경제사가들은 이를 세계 최초의 선물거래시장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화폐거래가 활발히 일어남에 따라 오사카와 에도 등 대도시에서는 전환업, 금융업, 그리고 보험업 등 고급상업이 형성된다.
(오사카의, 그리고 일본 전역의 쌀거래의 메카 도지마)
농업,상업 뿐만이 아닌 수공업의 발전도 괄목할만한 수준이었는데 일례로 자기 산업의 발전은 에도시대의 경제발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6세기 말엽까지만 해도 일본은 자기산업의 후발주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일본의 자기산업은 단기간에 급속도로 성장하여 곧 후발주자에서 선두주자로 거듭나는데 특히 중국이 혼란기에 빠진 17세기에는 사실상 세계 자기시장을 독점하기에 이른다.
일본에서 자기산업이 가장 발달했던 도시는 큐슈 북단의 아리타였다. 이 아리타라는 지명은 일본자기의 대명사이자 고급자기의 대명사로 쓰이기도 하였으며, 아리타의 가마(도기를 굽는)는 유럽이나 중국으로 수출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자본재 수출이라고 평할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자기는 세계시장에서 고가였지만 불티나게 팔려나갔는데, 이러한 일본의 자기가 서구에서는 상품으로서 팔려나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한 종류의 문화현상을 불러일으켰는데, 자포니즘(Japonisme 혹은 Japanism ; 일본애호주의)이 그것이다.
사실 자포니즘은 일본 자기 그 자체보다는 일본 자기의 포장지에 찍혀있던 판화가 촉발시켰다. 근대 서구(특히 프랑스)에서는 당시 매너리즘이 농후해지는 서구 예술문화에 식상해있던 서구 예술가들은 도자기 선적상자에서 발견한 포장지에 찍혀있던 단순명료하면서도 강렬한 우키요에(에도시대 일본을 대표하는 미술양식)로부터 컬쳐쇼크를 받았고, 이는 많은 수의 서구(특히 프랑스)의 예술가들을 우키요에덕후로 만들기 충분하였다.
(우키요에 덕후 반고흐; 그는 우키요에 수집광으로 알려져 있음)
우키요에는 원래 수작업으로 그려졌으나, 17세기 말에 인쇄술을 이용한 판화기술이 개발 및 보편화되면서 염가에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되었는데, 19세기 초 우키요에 1매의 시세는 동화 32문 수준이었다.(당시 스시 4개 가격)
비단 우키요에뿐만이 아니라 일반서적들도 대량으로 찍혀져 대중에게 널리 읽히게 되었는데, 이가 가능해진 이유는 비단 인쇄기술 발전 뿐만이 아닌 에도시대 교육의 보급에도 그 이유가 존재한다. 다수설에 따르면 에도시대 전 인구의 40%가 문자를 읽을수 있었는데, 이는 전근대 사회로서는 상당한 계몽이 이루어진 사회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로 인하여 다채로운 서민문화가 발전하였다.
우키요에가 에도시대 일본의 미술을 대표한다면 카부키는 에도시대의 극문화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카부키 극장은 일본 전역의 주요도시에는 빠짐없이 건설되었으며, 이곳에서 오늘날의 연예인에 해당하는 배우들은 매일 유명한 극을 상연하며 관객을 즐겁게 해주었으며, 극작가들은 관객들을 즐겁게 할 극을 짜기 위하여 고심하였다.
(카부키와 현재까지 남아있는 카부키 극장인 쿄토의 미나미자)
기타 에도시대에 등장한 서민문화
분라쿠(Bunraku)
: 카라쿠리(기계인형)를 카라쿠리 술사가 조종하여 펼치는 에도시대의 기계인형극. 위 사진에 나온 남녀가 카라쿠리.
이케바나(Ikebana; 꽃꽂이) : 곁식물의 배치를 통해 주화의 미학적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는 일본식 식물예술.
오리가미(Origami; 종이접기) :
드래곤볼츠루
7개1000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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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된 사회는 단지 서민문화 뿐만이 아닌 학문의 발전 또한 이끌어내었고, 에도시대 일본에서는 유학, 난학, 국학 등 다양한 학문들이 발전하였으며, 이들은 각기 통치체계의 사상적 기반마련, 서양문물에 대한 이해의 증진과 친숙도의 증대(이로 인하여 훗날 서구문물 수용에 대한 일본사회의 거부감이 줄었다는게 다수설이다.), 그리고 일본이라는 사회의 정체성 확립 등의 사회적 이익을 창출하였는데,
이렇게 장기평화가 지속되는 동안 일본사회는 전례없는 경제적, 문화적 발전을 거듭해나갔고, 이에 도취된 사람들은 이와같은 평화가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비록 에도를 쑥대밭으로 만든 겐로쿠 대지진, 수차례에 걸쳐 발생한 대규모 화재, 그리고 일본 전역을 휩쓴 텐메이 기근 등의 대참사가 에도시대에 발생하긴 하였지만 그러한 사건들은 토쿠가와 막부의 견고한 체제를 흔들기엔 그 파급력이 역부족했다.
하지만 고립이라는 벽속에서의 닫힌 평화체제는 200년이 넘는 긴 세월을 넘기면서 그 벽을 부수려는 외부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고, 이러한 일련의 외부의 도전행위는 장기에 걸쳐 구축된 체제를 흔들게 되는데, 그 전조는 저 멀리 북쪽에서 나타났다.
The Winter is Coming!!
P.S : 일단 [연재]를 붙이긴 했지만, 연재되지 않을수도 있음. 잇힝~
P.S 2 : 적절한 태클과 지적은 글 작성에 도움이 될수 있으므로 적극권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