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4년 미국의 포함외교에 일본이 굴복하여 중간기항항을 개항한 이후 점진적으로 반식민지적인 상태가 이후로 일본내에서는 양이론이 득세하였고 이는 개항기 일본사에 큰 영향을 미친다.
(△ 특히 시모노세키 전쟁 무렵은 일본내에서의 양이활동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이다.)
(△ 일본의 제 121대 천황인 코메이 천황)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서 1863년 쿄토의 코메이 천황으로부터 강력한 양이요구가 막부에 하달되었고 막부는 이를 수락, 양이의 실행을 약속하게 된다. 다만 비록 조정의 요구에 못이겨 이를 약속하긴 하나, 막부는 양이에 대하여 매우 신중한 입장이었다. 또한 조정과 막부의 양이에 대한 견해는 달랐는데, 조정의 관점에서의 양이는 무력을 수반한 강경한 형태의 양이였으나 막부의 관점에서의 양이는 무력을 수반하지 않는 온건한 형태의 양이였다.
조정과 막부의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얼마안가 양측간 갈등의 양상으로 드러나게 된다.
사실 조정이 양이칙령을 내린 큰 배경적인 이유중 하나는 당시 조정소재지인 쿄토의 정국을 존황양이파가 장악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기인하는데, 이 존황양이파 세력은 쵸슈번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있었다. 쵸슈번은 쿄토의 양이파 공가(公家)들과 기타 번 출신의 양이파들을 포섭하여 쿄토에서 일대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1863년 3월, 두 차례에 걸친 조정의 양이요구칙령을 받은 쇼군의 막부는 결국 양이실행을 약속하고, 5월에 조정에 양이결행을 다짐하고 제하 번들에 포고령을 내렸다.(다만 위에 언급한 것처럼 막부의 의도는 무력을 동원하지 않는 전제하의 양이행위였다.)
이에 존황양이파의 정치적 요새였던 쵸슈번은 일본의 그 어느번보다도 양이포고령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쵸슈번의 관할지인 나가토와 스오의 남쪽해안인 시모노세키 해협을 양이활동의 주무대로 삼고 기존의 해안포대를 정비하는 것은 물론 시모노세키 해협의 맞은편에 있는 큐슈 북단의 코쿠라번의 일부지역을 점령하여 그곳에 포대를 구축, 보다 더 확고하게 해협을 틀어쥐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시모노세키 해협을 완전장악한 쵸슈번은 시모노세키 해협을 통과하는 이양선을 상대로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사진의 시모노세키와 키타큐슈의 중간에 존재하는 가늘다란 해협이 시모노세키 해협이며, 이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최초 피해선박이라는 타이틀의 영예는 SS Pembroke라는 미국국적의 상선에게 돌아갔다. 그 이후로도 간헐적인 서양 상선에 대한 포격이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 하에 사실상 주요 항해루트인 시모노세키 해협이 봉쇄되는데 이로 인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서구측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무력을 수반한 회유를 시작한다.
네덜란드 함장 : Kienchang이 된통 당했다고? 하지만 우리 네덜란드는 일본과 200년 넘는 친교를 가지고 있지! 설마 먼저 공격하겠...
쵸슈번 포대장 : 서양오랑캐가 왔다! 발사!!
이렇듯 서구측의 회유는 사실상 실패로 막을 내렸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서구측은 좀 더 강경한 무력시위를 시작하는데, 곧 이어 발생하는 미 군함 와이오밍의 무력시위와 프랑스 함대의 무력시위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7월 16일 : 미국의 무력시위
미국의 슬루프함인 USS 와이오밍의 7월 16일 무력시위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USS 와이오밍은 쵸슈번의 수도인 하기의 항만 근처에 접근하여 포대의 맹렬한 포격을 뚫고 하기항에 정박중이었던 2척의 쵸슈번 증기선을 포격으로 침몰시키고 1척에 상당한 파괴를 가하고 쵸슈번의 4개 포대에 손상을 입히는 무쌍을 찍고 퇴각한다. 이를 시모노세키 해전이라고도 부르는데 쵸슈번측은 40명의 인명손실을 냈지만 와이오밍은 고작 4명의 전사자를 내는데 그쳤다.
7월 20일 : 프랑스의 무력시위
35문의 대포를 장착한 대형 프리깃함인 프랑스 동양함대 소속 라 세미라미 호와 슬루프함인 탕크레드로 구성된 2척의 프랑스 군함들이 쵸슈번을 침공해왔다.
프랑스 함대는 우세한 화력으로 단노우라와 마에다에 구성되어있던 쵸슈번측 포대를 침묵시킨 연후 상륙을 감행하여 이를 점거하였으며 주변마을을 철저히 파괴 및 약탈하였다.
이 보고를 접한 쵸슈번은 긴급히 원군을 연안포대로 파견하였으나 프랑스 함대의 연안포격에 발이 묶여버렸고 쵸슈번의 원군부대의 포대진입이 지연된 틈을 타 프랑스군은 상륙한 해전대를 다시 선박으로 회수한 후 시모노세키 해협으로부터 완전히 철수하고만다.
미국과 프랑스의 무력시위(특히 프랑스에 의해) 큰 피해를 본 쵸슈번이었으나, 서양세력은 이와 같은 무력시위로 쵸슈번의 양이에 대한 의지를 꺾진 못하였던듯하다.
쵸슈번은 다음있을 공격을 대비하여 병력을 증원하고 포대를 정비하였으며, 쵸슈번 출신 유명 양이지사인 타카스기 신사쿠는 하급 사무라이, 농민, 죠닌등을 끌어들여 '기병대'(奇兵隊)를 조직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쵸슈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든 환경이 쵸슈번에게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우선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서남지역의 유력세력이었던 사츠마번(당시 쵸슈번은 사츠마번과 대립관계였다.)이 영국과의 교전후 사실상 양이대열에서 이탈해 버렸다. 그 뿐만 아니라 사츠마번은 영국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기 시작하여 점차 실력을 쌓아나가게 되었다.
또한 사츠마와 쵸슈의 양이활동의 결과를 목도한 막부가 무력행사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제재를 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쵸슈번에 대하여는 나카네 사절단을 파견하여 무투파적인 포격행위와 코쿠라번 침공의 죄를 물어 엄하게 문책하였는데, 이 나카네 사절단을 타카스기 신사쿠의 기병대가 습격하여 척살해버린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쵸슈번과 막부의 관계는 험악일로에 치닫게 된다.
그 뿐만이 아니라 쿄토의 정국을 장악하고 있던 쵸슈번계가 주도하는 양이파가 천황과 반양이파 공가, 사츠마번 세력과 쿄토의 수호직이였던 아이즈번 세력의 합작품인 친위쿠데타로 인하여 쿄토 정국에서 일소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모든 사건이 불과 프랑스군의 쵸슈번 침략 후 1달 이내에 일어났다.(...)
졸지에 사면초가에 몰리게 된 쵸슈이지만, 여전히 양이활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고(근성과 뚝심의 쵸슈번) 여전히 일본의 주요항해로인 시모노세키 해협은 굳게 봉쇄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서구상인들은 이로 인하여 피해가 가중될 수 밖에 없었다.
서구측의 공사관들은 이와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이미 개털상황 일보직전에 몰린 쵸슈번을 외교테이블로 끌어내려고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이러한 시도들은 실패하고, 결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4개국은 연합함대를 결성하여 쵸슈번에 빅엿을 날릴 계획을 추진하게 되는데, 마침내 1864년 9월 5일 시모노세키 해협 전방에 대규모 함대가 출현하고 시모노세키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1864년 9월 5일 : 시모노세키 전쟁
연합군측 전력
영국 함대
HMS Euryalus(기함)
함종 : 프리깃
승무원 수 : 540
무장
- 110파운드 암스트롱포 5문
- 40파운드 암스트롱포 8문
- 기타 포 38문
HMS Conqueror
함종 : 2층갑판(투데커) 전열함
승무원 수 : 830
무장
- 68파운드 포 1문
- 8인치 포 32문
- 32파운드 포 56문
HMS Leopard
함종 : 프리깃
승무원 수 : 310
무장
- 110파운드 암스트롱포 1문
- 10인치 포 1문
- 32파운드 포 4문
HMS Barrosa
함종 : 코르벳
승무원 수 : 240
무장
- 110파운드 암스트롱포 1문
- 8인치 포 20문
HMS Tartar
함종 : 코르벳
승무원 수 : 250
무장
- 110파운드 암스트롱포 1문
- 40파운드 암스트롱포 4문
- 8인치 포 14문
HMS Argus
함종 : 슬루프
승무원 수 : 175
무장
- 110파운드 암스트롱포 1문
- 10인치 포 1문
- 32파운드 포 4문
HMS Perseus
함종 : 슬루프
승무원 수 : 175
무장
- 40파운드 암스트롱포 5문
- 68파운드 포 1문
- 32파운드 포 8문
HMS Coquette
함종 : 포함
승무원 수 : 90
무장
- 110파운드 암스트롱포 1문
- 10인치 포 1문
- 32파운드 포 1문
- 20파운드 포 2문
HMS Bouncer
함종 : 건보트
승무원 수 : 40
무장
-68파운드 포 2문
---------------------------
프랑스 함대
La Semiramis
함종 : 프리깃
승무원 수 : 521
무장
- 포 35문
Dupleix
함종 : 코르벳
승무원 수 : 204
무장
- 6.4인치 포 10문
Tancrede
함종 : 슬루프
승무원 수 : ?
무장
- 포 4문
---------------------------
네덜란드 함대
HNLMS Metallen Kruiz
함종 : 코르벳
승무원 수 : 240
무장
- 6.3인치 포 8문
- 30파운드 포 8문
HNLMS D'Jambi
함종 : 코르벳
승무원 수 : 240
무장
- 6.3인치 포 8문
- 30파운드 포 8문
HNLMS Medusa
함종 : 코르벳
승무원 수 : ?
무장
- 포 16문
HNLMS Amsterdam
함종 : 코르벳
승무원 수 : ?
무장
- 포 8문
---------------------------
미국 함대
USS Ta-kiang
함종 : 포함
승무원 수 : 40
무장
- 30파운드 패럿포 1문
쵸슈 측
쵸슈직속 시모노세키 해안수비대 1500명
해안포대 100문
피해규모
4국연합군 : 사상자 72명, 함선 2척 파손
쵸슈군 : 사상자 47명, 해안의 전포대가 점거 및 파괴됨
9월 5일, 4국연합 함대는 마에다와 단노우라의 포진을 향하여 맹렬한 포격을 뿜어대었다. 쵸슈번의 포대도 응전하였지만 화력의 차는 극명했고 이로 인하여 포대는 차례로 분쇄되어갔다. 4국연합함대는 해상포격의 지원하에 마에다의 해안가에 육전대 2000명을 상륙시켜 포대를 점령하고 포대를 파괴하였다. 다음날엔 연합군 육전대가 단노우라의 포진을 점령하고 이를 철저히 파괴한 연후 일부는 포진에 주둔하고 일부는 시모노세키 시가지로 진격하였고 이로 인하여 시가지 근교에서 쵸슈군과의 교전이 발생하였다.
9월 7일 연합함대는 히코시마의 포대를 공격하여 포 60문을 노획하였으며, 8일까지 쵸슈번의 모든 포대를 파괴하였다.
9월 8일 쵸슈번은 4국연합함대에 대하여 항복을 선언하였고, 나카네 사절단 척살이후 탈번한 죄로 근신중에 있던 타카스기 신사쿠를 소환하여 4군연합군 측에 협상사절로 보내 정전협정에 조인한다.
연합군 측은 300만달러라는 거액의 배상금을 제안하는데 쵸슈번에 이의 지불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호구막부에 배상금을 요청한다. 연합군측은 배상금의 감면을 조건으로 효고항의 조기개항을 요구하였지만, 쿄토로부터 가까운 효고항을 개항함에 따른 쿄토와의 관계악화를 우려한 막부는 이 안을 거부하고 배상금 300만달러를 지불하기로 한다.
양이파의 중심지였던 쵸슈번은 시모노세키 전쟁을 거치면서 전날 살영전쟁을 치렀던 사츠마번과 마찬가지로 서양측의 우세한 무력을 통렬하게 실감하고 양이노선을 포기하게 된다. 시모노세키 전쟁은 쵸슈번이 훗날 사츠마번과 삿쵸동맹을 형성하여 토막파의 선두로 서게되는 전환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쵸슈번의 개화노선으로의 전환으로 인하여 일본 내에서 문명개화파의 세력은 한층 더 확장하였고 이는 새로운 일본의 형성의 밑거름이 되었다.
다만 서구측도 쵸슈번의 의외의 저항력에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피해를 입었는데, 이로 인하여 전날의 살영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서구사회에서 일본에 대한 신중론이 불거지게 되었으며, 영국의 경우 서남웅번지지 대일외교노선에 한층 더 확신을 가지게된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