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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전한의 지방행정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1598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8
조회수 : 705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05/28 20:38:16
전한은 이전 왕조인 진나라와 달리 군국제를 채용하고 지방에 왕국, 후국 등을 설치했지만 그 외 나머지 지역에는 전부 군현제를 시행했습니다. 전한의 군현제는 진나라 시절의 군현제와 동일했습니다. 


대략적으로 보면 이러했습니다. 


주 - 군 - 현 - 향 - (정) - 리 


주(州) : 무제 원봉 5년(기원전 106년)에 설치되었습니다. 장관은 자사((刺史)였으며, 전한은 전국을 13주로 나누었습니다. 
군(郡) : 수(守 : 장관), 승(丞 : 부관), 위(尉 : 군관) 
현(縣) : 령(令 : 큰 현의 장관), 장(長 : 작은 현의 장관), 승(丞 : 부관), 위(尉 : 군관)


이들 군현의 관리들은 모두 중앙에서 파견했기에 장리(長吏)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군현의 하급관리들인 공조(功曺), 독우(督郵) 등은 군현의 장관들이 부임한 임지에서 채용했으며 소리(少吏)라 하였습니다. 경제 중원 2년(기원전 148년)에 군의 장관인 수와 그리고 군에서 군사 업무를 담당하는 위는 각각 태수(太守), 도위(都尉)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현 밑으로는 향(鄕)이 있었는데 향에는 삼로(三老), 색부(嗇夫), 유요(遊邀)라는 향관이 설치되었습니다. 삼로는 향 자체적으로 뽑았지만 색부와 유요의 경우 현에서 파견한 관리들이었습니다.


삼로 : 향 내부에서 덕이 있는 자를 선임하여 향내의 교화를 관장
색부 : 소송처리, 세금징수
유요 : 향내 도적을 단속, 치안유지 


향은 다시 리(里)로 나뉘는데. 리는 전한의 지방행정의 최소 단위로 대개 백호로 구성되었습니다. 리의 주위는 토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리로 들어가는 문은 여(閭)라 하고 이 문을 지키는 보초는 감문(監門)이라 하였습니다. 리로 출입하려면 이 여를 반드시 통과해야 했습니다. 이 리의 장은 리정(里正)이라 하였고 리의 지도층은 부로(父老), 부형(父兄)이라 하였고, 리의 일을 하는 젊은이들은 자제(子弟)라 하였습니다. 리는 향과는 달리 리 단독으로 존재하는 경우도 있었고, 몇개의 리가 모여 정(亭)이나 향을 구성하기도 하였습니다. 



※ 한창 항우와의 쟁패를 벌이고 있던 시기에 유방은 역이기의 제안을 받아들여 육국의 후예들을 제후에 임명하여 주나라 시절의 봉건제를 실시하려 했지만, 이 이야기를 들은 장량이 젓가락을 들어 8가지의 이유를 대며 조목조목 반대함으로써 모두 철회했다고 합니다. 유방이 장량의 의견에 얼마나 충격을 먹었는지 먹던 음식마저 뱉어버리고 "세상물정 모르는 유생 놈 때문에 하마터면 천하의 공사(公事)를 망칠뻔 했구나!"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 전한 건국 초창기에 고조 유방은 공신들에게 1개 현 단위로 봉읍을 주고 제후로 삼았습니다. 고조 유방 초기에 설치된 군국은 103개 였는데 이 중 중앙정부에서 직접 통제가 가능한 것은 15개 군에 불과했습니다. 한마디로 전한 전체의 3분의 2가 제후들의 손에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고조 유방은 이후 제후들(특히 이성제후)을 하나씩 제거하였고, 고조 말기에 이르러서는 장사왕을 제외하고 모든 이성 제후들이 숙청당하고 다른 제후들은 동성제후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동성제후들도 전한 문제 시절에 있었던 제북왕 흥거, 회남왕 유장의 반란으로 중앙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기 시작했으며 경제 시절의 오초칠국의 난을 계기로 제후국의 행정과 조세를 중앙에서 보낸 관리가 담당케 함으로써 그들의 권한을 약화시켰습니다. 마지막으로 무제 시절에는 제후국의 영지를 제후의 모든 자제들에게 분봉하는 추은령을 시행하여 사실상 군국제는 유명무실화되고 맙니다. 



※ 출처 : 중국의 역사 '진한사'. 사기 유휴세가, 네이버 지식백과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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