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더코아의 詐欺 列傳.
*번쾌.역상.하후영.관영열전(樊噲․酈商․夏侯嬰․灌嬰列傳)
고조유방은 복이 많았던듯 하다.
시골의 작은 고을에서 나고 자라 그곳을 멀리 벗어나지도 못하고 그 주변의 인물들과 교류했지만
그주변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영웅호걸 이었다.
사람을 사귀다 보면 인걸도 있고 변변치 않은 인물도 있을터인데 한동네에서 어찌그리 많은 인물이 날수 있었던가?
일찌기 단재선생은 아무리 나폴레옹이라도 안동의 도산서원 근처에서 났으면
나아가 홍경래가 됐거나 물러나 도포입고 글을 읽어 송시열이 되었을것이라 했는데
고조의 본향인 패현 풍읍이라는곳은 그 풍수가 남달랐던가?
시정의 건달도,거리의 백정도 크게 성공하여 황제가 되고 제후 왕이 되었다.
이것이 시대가 영웅을 부른것인지 아니면 영웅이 시대를 만든것인지 알수 없지만
그래도 고조의 주변에 위대한 인걸들이 구름처럼 모여든것은 고조유방의 홍복이라 아니할수는 없을것이다.
성시를 공략하고 야전에서 공을 세운후 돌아와 보고하는데는 번쾌와 역상이 가장 뛰어났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여 천군만마 사이를 달리고 위기때마다 한왕을 도왔으므로
한왕이 생명을 부지할수 있었다.
지금부터 번.역.등.관 의 이야기를 알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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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입주부당위왕자(且入誅不當為王者)
무양후 번쾌(樊噲)는 패 사람이다.
그는 개를 잡아 고기를 파는 개백정 노릇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유방이 죄를 짓고 도망다닐때는그와 함께 숨어 살기도 했다.
번쾌는 유방을 따라 풍에서 군사를 일으켜 함락시키고 유방이 패공이 되자 그의 가신이 되었다.
그는 언제나 유방을 따라다니며 여러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다.
성을 공략할때마다 가장 먼저 성벽에 올랐으며 적의 수급을 벤것이 수도 없이 많았다.
한왕의 선봉장은 항상 번쾌였다.
항우가 한왕을 공격하려 할때 항백의 주선으로 강화 하고 한왕이 홍문의 회에 갔을때
번쾌가 한왕을 수행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었을때 범증이 한왕을 죽이기 위해 항장에게 검무를 추게 했다.
그때마다 항백이 몸으로 한왕을 가리며 보호해 주었기떄문에 한왕이 위험을 모면할수 있었다.
그 연회장에는 한왕과 장량만이 참석했는데 장량이 보니 아무래도 한왕이 크게 위험했다.
그래서 장량이 밖으로 나와 번쾌에게 위급을 알렸다.
번쾌가 칼과 방패를 들고 연회장으로 뛰어들었다.
경비병들이 제지했지만 번쾌는 가볍게 그들을 밀어제끼고 연회장의 장막을 걷어부친후 항우의 앞에 섰다.
항우가 물었다.
"저자는 누구인가?"
장량이 대답했다.
"저사람은 패공의 참승 번쾌입니다."
"장사로다 저사람에게 술과 고기를 가져다 주어라."
사람들이 번쾌에게 항아리에 술을 따라주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날것의 돼지다리 하나를 통째로 가져다 주었다.
번쾌가 단숨에 술단지를 비운뒤 칼을 뽑고 방패를 도마삼아 돼지다리를 베어 순식간에 모두 먹어 치웠다.
"더 마시고 먹을수 있는가?"
항우가 놀라서 묻자 번쾌도 지지않고 대답했다.
"신은 죽음도 사양치 않거늘 어찌 한말의 술인들 사양하겠습니까?
제가 두려워 하는것은 대왕께서 소인배들의 참언을 믿으시고 패공을 적대시하고 계시는것입니다.
패공께서 먼저 함양에 진입하여 평정한 후에 군사들을 패상에 노숙시키며 대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도하신 대왕께서는 패공을 의심 하시니 천하가 흩어지고 대왕을 의심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항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유방이 측간에 가는척하고 슬그머니 연회장을 빠져나오자 번쾌도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유방이 번쾌에게 말했다.
"지금 연회장을 나오면서 항왕에게 퇴출한다는 인사를 못했는데 어쩌면 좋겠는가?"
번쾌가 말했다.
"지금 저들은 칼과 도마이고 우리는 어육의 신세인데 무슨 인사를 챙기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그냥 도망치기로 했고 장량이 남아서 대신 사과 하기로 했다.
유방은 항우의 군영을 벗어나자마자 타고온 수레와 기병들을 버리고 번쾌등 몇명만을 데리고 뒷산을 넘어
패상의 한군 진영으로 달아났다.
유방만 말을 타고 번쾌.하후영.근강.기신등은 뛰어서 패공을 쫓았다.
유방이 멀리 달아났을시간이 되어서야 장량이 항우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패공은 술이 취해서 인사도 못올리고 먼저 갔나이다."
이일로 항우는 유방을 죽일 마음을 버렸다.
만일 번쾌가 아니었더라면 유방은 그날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것이다.
그 후에도 번쾌는 한왕을 따라다니며 수없이 많은 성읍을 함락 시키고 공을 세웠다.
항우가 죽고 유방이 황제에 즉위한후에 황제는 번쾌의 공을 치하하여 많은 식읍을 봉했다.
연왕 장도가 모반했을때 번쾌는 고조를 따라 참전하여 장도를사로잡았으며
회음후가 모반했을때에는 진에 이르러 한신을 체포하고 초나라를 평정했다.
그래서 열후의 작위를 받고 무양의 땅을 식읍으로 받아 무양후가 되었으며
할부를 갈라 그 작위를 세습할수 있게 되었다.
한왕 신 과 진희가 모반 했을때도 수없이 많은공을 세워 한의 좌승상에 올랐다.
번쾌의 아내는 여후의 동생 여수 였고 아들의 이름은 항 이었다.
번쾌는 고조의 가족들과 가장 친밀한 장군이었다.
경포가 모반했을때 고조는 심한 우울증에 빠져 사람을 만나는것조차 싫어했다.
고조는 조칙을 내려 모든 군신들의 출입을 막고 궁중 깊숙히 드러 누웠다.
황제의 엄명 때문에 주발.관영등 대신들도 감히 궁으로 들어갈수가 없었다.
참다못한 번쾌가 궁의 쪽문을 밀치고 들어가 고조를 뵈었다.
고조는 환관의 무릎을베고 한가로이 누워 있었다.
번쾌가 눈물을 흘리며 아뢰었다.
"전날에 폐하께서 저희들을 이끌고 풍과 패에서 기병하시어 천하를 평정할 때는 그렇게도 강건하시더니
천하를 이미 평정한 지금은 어찌 그토록 피곤해 하십니까?
폐하께서 병을 앓으시니 저희 신하들은 가슴이 떨려 두려운 마음뿐입니다.
하온데 폐하께서는 정사를 돌보지 않으시고 일개 환관 하나만을 상대하시다가 붕어하시려 하십니까?
설마 옛날 진나라의 환관 조고의 일을 잊으신것은 아닙니까?"
고조는 멋적게 웃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수 없었다.
그뒤에 고조의 어릴적 친구인 노관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고조가 노관을 총애했던만큼 그 배신감은 클수밖에 없었다.
고조가 그 실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실제로 병들어 자리에 누웠다.
고조는 친정하지 못하고 번쾌를 시켜 노관을 정벌하게 하였다.
그런 와중에 어떤자가 번쾌를 중상하여 고조에게 아뢰었다.
"번쾌는 여씨의 일당입니다.
만일 폐하께서 붕어하시면 번쾌는 군사를 이끌고 조왕 여의와 척부인을 모두 죽일것입니다."
병중에 심신이 나약해 있던 고조는 그말을 믿고 크게 노했다.
즉시 진평을 불러 주발과 함께 가서 번쾌의 군사를 주발에게 맡기고 번쾌의 목을 베라고 명했다.
진평은 여후의 세력이 두려워서 차마 번쾌를 참수하지 못하고 일단 체포하여 수차에 싣고 장안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그들이 장안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고조가 붕어하고 말았다.
여후는 번쾌를 즉시 석방하고 그의 작위와 봉읍도 그대로 회복시켰다.
번쾌는 효혜제 6년에 죽었다.
시호를 무후라 하였다.
번쾌가 죽고 그 아들 번항이 그 작위를 계승 했다.
또 번쾌의 부인이며 항 의 모친인 여수는 임광후가 되었다.
그들은 고후의 시대에 맘대로 권력을 휘둘렀지만 고후가 죽은후 대신들에 의하여 여씨 일족들이
모두 주살될때 여수와 번항도 함께 주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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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주후 역상(酈商)은 고양 사람이었다.
진승이 봉기했을때 역상은 젊은이들을 모아 주변을 닥치는대로 공략하며 수천의 부하를 얻었다.
패공이 진류에 머물고 있을때 역상은 장수 몇명과 군사 4천을 이끌고 패공에게 귀순했다.
패공이 관중을 공략할때 선봉에 서서 많은 공을 세웠다.
항우가 패공을 한왕으로 봉했을때 한왕은 역상에게 신성후의 작위를 하사하고 농서도위로 삼았다.
그뒤 역상은 별동군을 이끌고 북지.상군 등을 평정했으며 장한이 버리고간 잔당들을 소탕했다.
또 한왕을 따라 항우군을 공략하고 종리매의 군사와 싸워 승리해서 양나라의 상국이 되었다.
항우가 죽고 고조가 즉위한후 연왕장도가 모반했을때 그가 선봉장이 되어 적군을 격파했다.
그 공으로 우승상의 자리에 오르고 탁현을 봉읍으로 받아 탁후가 되어 열후의 반열에 오르고
할부를 갈라 대대로 세습이 허용되었다.
진희를 토벌하고 경포를 토벌하는데도 큰 공을 세워 곡주의 땅을 하사받고 곡주후가 되었다.
역상은 효혜제를 섬기고 여후때는 신병으로 정사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의 아들 역기는 여씨의 일족과 친했는데 여후가 죽은후에 대신들이 여씨를 멸하려 했지만
여록이 북군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강후 주발등이 역상을 미끼로 역기를 협박하여 여록을 유인해 나오게 했고
여록은 철석같이 믿던 친구 역기에게 속아 진지를 벗어나 강가로 나가 사냥하며 술을 마시고 즐겼다.
장군이 없는 틈을 타서 주발이 재빨리 진영으로 들어가 군권을 탈취하고 나서야 여씨의 일족을 멸할수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역기를 "친구를 팔아먹은 놈" 이라고 욕했다.
역상은 그해에 죽고 그 시호를 경후 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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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음후 하후영(夏侯嬰)은 패 땅 사람이다.
그는 패현의 역사에서 일했다.
그는 사신이나 빈객을 전송하고 빈수레로 돌아올때마다 사수의 역정에 들렀다.
그곳 사수의 정장이 하후영이 친구 유방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만날때마다 시간이 가는줄도 모르고 유쾌하게 떠들며 놀았다.
그후 하후영은 패현의 말단관리가 되었고 그 후에도 두사람은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
어느날 두사람이 장난을 치다가 유방이 하후영을 다치게 하여 상처를 입혔다.
누가 그것을 보고 유방을 고발했다.
유방은 당시에 정장이었기 때문에 관리를 다치게 하는것은 중죄에 해당되는것이었다.
유방이 말했다.
"나한테 맞아서 다친게 아니라고 해라."
그리고는 유방은 관청으로 가서 자기가 부상을 입힌것이 아니라고 발뺌을 했고
하후영 역시 그렇게 증언했다.
흐지부지 넘어갈줄 알았던일이 의외로 커져서 하후영은 위증죄로 옥에 갇혔다.
그는 수백대의 태형을 맞으면서도 끝내 유방을 감싸고 그의 혐의를 부인했다.
하후영은 그일로 1년간 옥살이를 했다.
유방이 패현에서 봉기할때 하후영은 패현의 문서를 담당하는 관리였다.
그래서 유방을 위해 안에서 내응했다.
그 덕분에 유방은 하룻만에 패현을 항복시기고 패공이 되었다.
패공은 하후영에게 7대부의 작위를 주고 태복으로 임명했다.
하후영은 패공이 진나라 군사들과 싸울때 제양 을 치고 호유 를 함락 시켰으며 옹구에서 이유를 격파했다.
하후영은 젊어서부터 수레를 모는데 일가가 있었기때문에 항상 전차속공전을펴서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또 동아.복양 등에서도 역시 전차 속공전으로 장한을 크게 깨뜨렸다.
그는 항상 패공의 수레를 직접 몰았다.
적을 공격하여 수없이 항복을 받아 적장의 도장을 얻은것만 한 궤 가득 이었다.
하후영은 눈부신 전공을 세워 등공의 칭호를 받았다.
항우가 패공을 한왕에 봉했을때 한왕이 하후영을 소평후로 봉했다.
그는 한왕이 항우와 대전할때도 항상 한왕의 옆에 붙어서 직접 마차를 몰았다.
팽성의 전투에서 한왕이 항우에게 크게 패해서 성을 버리고 달아나게 되었다.
하후영은 위급한 상황에도 효혜와 노원을 수레에 실었다.
추격군이 따라오는것을 본 한왕은 적에게 사로잡힐것이 두려워서 두 아이를 발로 차서 수레 밖으로
떨어뜨렸다.
하후영은 수레를 세우고 뛰어내려 아이들을 다시 수레에 태우고 달렸다.
유방이 다시 아이들을 밀쳐 낼때마다 하후영은 울면서 수레를 세우고 다시 아이들을 태웠다.
유방이 화가나서 발길질을 하자 하후영이 몸으로 아이들을 막으며 그 발길질을 다 받았다.
마침내 유방이 칼을 뽑아 하후영을 치려하자 하후영도 칼을 들어 한손으로 유방의 칼을 막고
한손으로는 병차를 몰았다.
두 아이들은 놀라서 하후영의 목에 매달리고 하후영은 울며불며 유방의 칼을 막으랴,아이들을 보호하랴,
병차를 몰랴,정신이 모두 빠져나갈 지경이었다.
그러나 결국 어찌어찌 무사히 적의 수중에서 빠져나올수 있었고
하후영의 덕분에 효혜와 노원은 생명을 건질수 있었다.
한왕이 황제로 즉위한후에 연왕장도가 모반했을때 하후영은 전차부대를 이끌고 장도를 쳤다.
이듬해 진땅에 이르러 회음후를 체포하고 초나라를 평정했다.
하후영은 여음땅을 봉읍으로 하사받고 여음후가 되었다.
고조는 할부를 갈라 작위를 세습하도록 허용했다.
그는 흉노를 정벌할때도 큰 공을 세우고 진희.경포를 토벌 할때도 공이 높았다.
하후영은 유방이 처음 봉기할때도 태복이었고 고조가 붕어할때까지도 언제나 태복이었다.
효혜제때도 태복으로 황제를 섬겼다.
여후와 효혜제는 예전에 하후영이 어린 효혜제와 노원공주를 구해준것을 잊지 않고 궁궐에서 가까운곳에
저택을 하사하고 그 집의 이름을 근아'라 했다.
황실에서는 그만큼 특별히 하후영을 존중했다.
효혜제도 붕어하고 고후가 집권할때도 하후영은 태복으로 고후를 섬겼다.
고후도 죽고 대왕이 장안으로 들어왔을때 하후영이 동모후와 함께 청궁으로 들어가 소제를 폐하고
다시 어가를 몰아 대왕을 맞이하여 대신들과 함께 효문황제로 세웠다.
그는 그 후에도 태복으로 일했다.
하후영은 그로부터 8년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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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음후 관영(灌嬰)은 수양에서 비단장사를 하던 사람이었다.
패공이 봉기하여 옹구에 머물때 진장 장한이 항량을 죽이고 초군을 격파했다.
패공도 하는수없이 후퇴하여 탕 땅에 주둔했다.
관영은 그때부터 패공을 따랐다.
패공이 관중을 공격할때 관영은 유방을 따라 중연의 직위로 전투에 참여했다.
관영은 이곳저곳에서 용맹하게 싸워 공을 세우고 선릉군의 칭호를 받았다.
패공이 한왕이 되어 그를 낭중에 임명했다.
항우군의 용저와 항타를 격파하고 열후의 작위를 받아 창문군으로 봉해졌다.
관영은 한신에게 소속되어 제나라를 공략하여 전광을 생포하고 전횡을 추격해 영.박 에서 격파했다.
또한 한신과 함께 고밀에서 용저를 베고 부장 주란을 생포했다.
항우가 해하에서 패주할때 관영은 어사대부로서 조칙을 받고 항우를 추격하여 항우의 군사를 격멸하고
항우가 자살하도록 궁지에 몰아 넣었다.
그 공으로 열후에 봉해진 관영은 그 후에도 오.예장.회계등 항우의 본거지를 평정할때 큰 공을 세웠다.
한왕이 황제로 즉위하여 관영에게 식읍3천호를 증봉했다.
연왕 장도가 모반했을때 관영은 거기장군으로 고조를 따라 종군하여 장도를 격파하고
이듬해 고조를 따라 진 땅에서 회음후 한신을 사로잡았다.
귀환하여 영음의 2천5백호를 식읍으로 받고 영음후로 봉해졌으며 할부를 갈라 대대로 세습이 허용 되었다.
한왕 신.진희 등이 모반했을때와 경포가 반란을 일으켰을때도 거기장군으로 출전하여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고조가 붕어한뒤 관영은 그대로 열후로서 효혜제와 여후를 섬겼다.
그후 여후가 죽자 여록.여산등이 스스로 장군이 되어 군권을 점령하고 장안에 포진하여
난을 일으키려 했다.
제나라 애왕이 이 소식을 듣고 병사를 일으켜 장안으로 진격했다.
"왕이 되어서는 안될자들을 주멸하러 간다."
상장군 여록이 이 소식을 듣고 관영에게 군사를 주어 제왕을 치게 했다.
관영은 형양까지 갔지만 주발과 상의 한후에 그곳에 주둔하고 제나라를 공격하지 않았다.
낙양으로 돌아간 주발등은 여씨의 일족을 모두 주살 했다.
그러자 제왕도 본국으로 돌아가고 관영은 형양에서 돌아와 주발.진평등과 상의하여 대왕을 세워
효문황제로 옹립했다.
효문제는 관영에게 3천호를 증봉하고 황금1천근을 하사했다.
관영은 태위의 벼슬에 임명 되었다.
3년후 승상 주발이 퇴임하고 뒤를 이어 관영이 승상이 되었다.
이해에 흉노가 대거 침입하여 관영이 기병 8만5천을 이끌고 흉노를 물리쳤다.
흉노가 물러가자 이번에는 제북왕이 모반을 했다.
관영이 원정하려 했지만 황제는 관영이 고령인점을 감안해서 조칙으로 그의 원정을 막았다.
그 다음해에 승상 관영이 죽었다.
시호를 의후 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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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열전의 말미에 사마천은 다음과같이 평하였다.
내가 풍.패로 가서 소하.조참.번쾌.등공 등의 옛집을 둘러보고 노인들을 만나
그들의 평소 행장같은것의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평판은 듣던것과는 사뭇 달랐다.
칼을 휘둘러 개를 잡고 비단장사나 할때는 고조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조정에 이름을 날리고
자손대대로 그 여덕을 남길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고 한다.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번쾌의 후손 번타광과 친했기때문에 고조와 공신들의 그당시 얘기를 자세히 들을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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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번.역.등.관 의 이야기를 모두 알아보았다.
사마천이 이야기 한것처럼 저리도 이름높은 공신들도 젊었을적에는 한낱 개백정이나 장사치노릇을 하면서
자신들의 성공을 예상하지 못했을것이다.
그들이 영웅호걸 이었기때문에 고조가 성공할수 있었던것인지
아니면 고조가 천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크게 성공할수 있었는지는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구분하는것이야 무엇이 중요한 일이겠는가?
고조가 천명을 받았으니 인걸이 따른것일것이고
수많은 인걸이 모이니 자연히 천명도 고조에게로 돌아간것일 터인즉 누가 누구의 덕으로 성공했는지를
따지는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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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방송의 어느 후기에 한 청취자가 남긴말이 인상깊게 남는다.
ㅡ말꼬리에 붙은 파리가 천리를 간다ㅡ
이는 고조의 친구 노관이 고조와의 친분관계 덕으로 연왕의 자리에까지 오르는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필자는 굳이 누가 누구의 덕으로 성공한것인가를 따지고 싶지는 않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이 모든 사람이 고조 한명의 천운으로 모두 큰 인물로 남은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조는 어릴적부터 적제의 아들로 교룡의 기운을 받아 태어났으며,
항상 그의 주변에는 황제의 서기가 감돌아서 진시황조차도 그 기운때문에 크게 신경을 썼다고 하니
애초에 하늘이 그 한 인물에게 천명을 주어 천하를 제패하고 주변의 많은 인물을 성공으로 이끌었을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제 이땅에 천명은 어디에 있는가?
지도자의 위치에 올랐으면서도 하늘의 명을 알지못해 학정으로 국민의 생명을 잃게 만들고
온 국민을 비통함에 빠지게 하였으니 분명히 하늘의 뜻은 그에게 있지 않을것이다.
만약 그에게 천명이 있다면 어찌하여 그 주변에 인걸이 나타나지 않고 오래전 독재시대의 유물들이
다시 나타나 그 주위를 감싸고 있겠는가?
정권의 주변에 인걸은 없고 계속되는 사고마다 그 주변 인물들로 자리를 돌려막고 있는것이
진나라가 멸망할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듯 하다.
진나라가 멸망할때는 환관 조고와 그 일당들에 의해 2세황제의 눈과 귀가 가리워 지고
늘 태평성대라는 보고만 들을수 있었으니,
지도자란것이 그러한데도 망하지 아니한 나라는 아직까지 한번도 본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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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루라도 빨리 천명을 받을 영웅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려본다.
그러나 분명한것 하나는
그 천명은 하늘에 있는것이 아니고 내 가슴속에 있다는것이다.
예전과는 달리 국민이 곧 하늘이고 나 스스로의 생각이 바로 천명이다.
나와 우리 모두가 마음을 모아 명을 준다면 그 마음을 받는이가 곧 천명을 받는것이니
나의 천명을 받을자는 그 누구인가?
나는 누군가에게 천명을 내려줄 준비가 되어있다.
독자 제현들도 그러한 준비가 되어있기를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