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년 1월, 모용준이 사망한 이후 그의 아들 모용위(慕容暐)가 황제에 즉위합니다. 모용위는 원래 모용준의 셋째 아들이었지만 형인 모용엽(慕容曄)이 죽었기 때문에 357년에 태자에 책봉되었습니다. 하지만 황제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국정은 모용황 시절부터 활발한 활약을 보였던 모용준의 동생 모용각(慕容恪)이 담당했습니다. 모용각은 태재(太宰), 태부(太傅), 태보(太保), 태사(太師), 대사마(大司馬), 사도(司徒), 사공(司空)까지 일명 8공(公)을 정점으로 하는 지배 기구를 구축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용각은 태재가 되어 전연을 이끌어나갑니다.
※ 모용위 연간의 연호는 건희(建熙 : 360년 - 370년)입니다.
이 모용각이 섭정을 했던 360년 1월부터 367년 5월에 이르는 이 7년간은 전연의 전성기였습니다. 전연은 점차 세력을 넓혀가면서 362년에는 환온이 장악한 낙양을 공격하여 364년에 획득하였고 366년까지는 거의 회북(淮北)을 제압하였습니다. 게다가 모용각은 외부적으로는 영토를 확장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선정을 베풀어 전연의 국세는 날로 커져만 갔습니다. 하지만 모용각은 367년 5월에 병사하고 맙니다. 그리고 모용각 사후 모용황의 동생이자 태부(太傅)이었던 모용평(慕容評)이 전연의 국정을 맡습니다. 모용평은 부패한 인물로써 뇌물을 받고 국정을 농단하면서 전연의 국력은 날로 쇠약해집니다.
한편 기회를 살피고 있던 동진(東晉)의 대사마(大司馬) 환온은 전연의 힘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동진 내에서 감히 범접할 수 조차 없는 공고한 권위를 세워 실질적으로 동진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3번째 북벌을 감행합니다. 이때가 369년 4월이었습니다. 환온의 군대는 북부군단의 근거지인 경구(京口)에서 출발하여 호릉(湖陵)을 지나 황하 유역에 다다랐습니다. 모용준이나 모용각 시절의 전연이라면 동진의 군대가 황하 유역에 다다르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일단 전연군은 방두(枋杜)로 퇴각합니다. 그리고 모용평은 도읍인 업을 버리고 용성까지의 후퇴까지 검토했습니다. 그리고 낙양 동쪽의 호뢰(虎牢) 이서 지역을 할양을 조건으로 전진(前秦)에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모용평의 이러한 행동은 집 앞에 나타난 늑대를 막겠다고 호랑이를 마당으로 불러들이는 꼴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전연에 인물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용위의 숙부이자 훗날 후연(後燕)을 건국하는 모용수(慕容垂)는 방두에서 전연군을 지휘하여 전진의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환온의 동진군을 박살을 내버립니다. 이 방두의 전투 이후 동진 내에서 환온의 위신은 추락하고 맙니다. 방두의 전투 승리로 모용수의 평가는 매우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모용평은 모용수의 권위가 높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태후인 가족혼씨(可足渾氏)와 함께 모용수를 암살하려 모의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된 모용수는 전진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이렇게 전연은 내부부터 붕괴하고 있었지만 전연의 불운은 외부에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진(前晉)의 군주 부견(苻堅)을 만났다는 것이었습니다. 부견은 한인 출신의 명재상 왕맹(王猛) 등의 도움을 받아 제도를 정비하고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이런 부견의 통치에 전진의 국세는 날로 커져갔습니다. 부견은 모용수의 망명을 계기로 전연은 두려워할 필요 없다 판단하고 지난날 방두의 전투에서 구원군을 파견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전연을 공격했습니다. 왕맹을 필두로 한 전진군은 낙양을 빼앗습니다. 그리고 부견은 370년 9월 6만 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전연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합니다. 전연은 모용평이 지휘하는 40여만 명의 군사로 대항했지만 패배하여 진양(晉陽)을 빼앗기고 같은 해 11월에는 도읍인 업성을 함락당합니다. 부견은 업에 남아있던 모용위 이하 선비족 4만 호를 장안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렇게 모용황이 이 연왕을 칭한 337년부터 시작된 전연의 역사는 모용위를 마지막으로 3대 33년만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전연의 성장은 「모용외 - 모용황 - 모용준과 모용각 (모용준과 모용각은 형제입니다.)」이 3대에 걸쳐 82년이나 걸렸지만 전연이 멸망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겨우 3년에 불과했습니다.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제국 전연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맙니다.
※ 부견은 업 함락 직후에 전연의 호적(戶籍)을 입수하였습니다. 이 호적에 의하면 전연의 인구는 998만 7935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장안으로 끌려온 모용위는 신흥후(新興侯)에 임명되었고 이후 383년 비수의 대전 무렵에는 모용수와 함께 운성(鄖城)에 주둔하였다가 부견이 패배하면서 장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모용위는 부견의 암살을 모의하지만 결국 실패하여 384년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훗날 모용위는 남연을 건국하는 모용덕(慕容德)에 의해 유제(幽帝)라는 시호를 받습니다. 한편 전연 멸망의 일등 공신인 모용평은 살아남아 고구려로 도망칩니다. 하지만 고국원왕은 그를 붙잡아 그대로 전진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전연의 마지막 인물 모용수는 383년 전진이 비수의 대전 이후로 흔들리자 그 틈을 이용하여 384년 후연(後燕)을 건국합니다. 하지만 그의 후연도 초기에는 영토를 급속도로 확장하며 하북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는 듯 보였지만 모용수의 사망과 그리고 북방의 강력한 국가인 북위와 그리고 광개토대왕 이후 급성장하고 있던 고구려의 공격과 왕족들간의 내분으로 23년만인 407년에 멸망하고 맙니다.
※ 출처 : 오호십육국(삼기양장),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위진남북조사(이공범), 삼국사기,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