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년 9월 모용황의 사망한 이후 337년 세자로 책봉된 둘째아들 모용준(慕容儁)이 연왕에 즉위했습니다. 모용준의 즉위에 동진은 349년 모용준에게 사지절·시중·대도독·독하북제군사·유평이주목·대장군·대선우·연왕(使持節 侍中 大都督 督河北諸軍事 幽平二州牧 大將軍 大單于 燕王)에 책봉했습니다. 같은 해에는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동이호군(東夷護軍) 송황(宋晃)을 전연으로 보냈습니다. 모용준은 송황을 용서하고 그를 용서하고 이름을 활(活)이라 바꾸고 중위(中尉)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용준은 350년 1월 20여만 명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석호 사망한 이후 혼란에 빠진 후조(後趙)를 공격합니다. 이는 전연의 중원(中原) 진출의 신호탄이었습니다. 후조 공격은 성공적이었고 같은 해 3월 모용준은 도읍을 용성에서 계성(薊城)으로 옮기고 기주(冀州) 일대를 공격합니다.
당시 후조는 염민(冉閔)이 세운 염위(冉魏)와 전쟁 중이었습니다. 모용준은 이 기회를 잘 이용해서 많은 이득을 취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조가 염위에 의해 멸망한 후인 352년 4월에는 염위를 맹공격하여 염민을 사로잡았고 또 염위의 수도인 업(鄴)을 함락시켰습니다. 350년에 시작되어 352년까지 3년간 진행된 전연의 중원 공략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전연은 후조 영토의 동쪽 절반을 획득하였습니다. 이제 전연은 새북(塞北)의 이민족 소국이 아니었습니다.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도 당당한 중원의 대국(大國)으로 변모했습니다.
※ 335년 이래 15년간에 이르는 대조천왕(大趙天王) 석호의 치세기간은 후조의 국운이 가장 번창한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우습게도 이 시기는 후조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석호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아들인 석수(石邃)를 태자로 삼아 국정을 위임하고 자신은 군사와 형옥을 관리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석수는 사냥을 즐기고 토목사업을 벌리고 후궁의 규모를 확장하여 민간에서 수만의 부녀자를 징발하는 등의 행동을 하는 등 실정을 거듭했습니다. 이런 석수의 행동에 민간에서는 목매어 죽는 여자, 남편에게 살해당하는 여자, 달아나는 여자가 속출했습니다.
게다가 석수는 태자였고 국정을 위임받았지만 형제인 석선(石宣), 석도(石韜)가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고 아버지인 석호가 그들을 총애하고 있었기에 그의 지위는 안정적이라고는 볼 수 없었습니다. 이에 석수는 아버지를 죽이고 제위에 오르리라는 무리수를 두었지만 그의 계획은 미연에 발각되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때가 337년으로 석수가 태자로 임명된지 2년째의 일이었습니다.
석수 사후 석선이 태자가 되거 석도는 태위(太尉 : 최고 군사령관)에 임명되어 두 사람이 하루씩 교대로 국정을 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석선과 석도도 석수와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냥에 몰두하고 궁녀를 거느리고 환관들을 키워 음란한 생활에 빠집니다. 후조의 국정은 환관들에 의해 처리되고 또 한편으로 석도와 석선은 서로 대립하여 348년 석선은 몰래 동생인 석도를 죽여 버립니다. 이 사실을 안 석호는 석도를 죽입니다.
석호는 겨우 열 살 난 석세(石世)를 태자로 세우고 다음해인 349년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해가 가기 전에 병사했습니다. 그가 병사했을 때 후조는 사실상 해체되어 황족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참극을 연출했습니다. 이 사이에 석호의 양자였던 한인(漢人) 석민(石閔. 훗날의 염민) 세력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석민은 338년부터 후조의 장군으로써 후조를 지탱하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349년 5월에 석호가 사망하자 석민은 이농(李農)과 결탁하여 석준(石遵)과 석감(石鑒)을 차례로 옹립하여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습니다.
우선 석민은 349년 5월에 석세를 내쫓고 팽성왕(彭城王) 석준을 옹립하고 도독중외제군사 보국대장군(都督中外諸軍事 輔國大將軍)으로 병권을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황태자가 되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석준은 이를 약속했기에 그는 석준을 옹립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석준은 석민을 배제를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석민은 11월에 석준을 죽이고 의양왕(義陽王) 석감을 옹립했습니다. 석감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석민은 대장군이 되었고 그는 대사마(大司馬)가 된 이풍과 함께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황족들의 반격도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같은 해 12월에 석감은 석민과 이풍을 밤에 습격하였습니다. 이는 실패로 끝났지만 석감의 공격은 양국(襄國)에 있던 신흥왕(新興王) 석지(石祗 : 훗날 후조의 마지막 황제가 됩니다.)와 업에 있던 석성(石成)과 석계(石啓)가 차례로 석민과 이농을 살해하기 위해 공세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공세는 모두 실패하고 석민과 이농은 석씨 일족을 중심으로 한 갈족들의 배반을 인식하고 같은 달 갈족 20만 명 학살을 단행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350년 윤달 2월에 석민과 이농은 석감을 살해하고 석호의 손자 38명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석민은 업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대위(大魏)를 건국하고 성씨도 염(冉)으로 되돌렸습니다. 황제의 자리에 등극한 염민은 대위 건국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이농을 죽였습니다. 이농을 죽인 것은 결과적으로는 염민의 정치적 기반 안정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살아남은 신흥왕 석지는 양국에서 황제에 자리에 오르면서 후조는 일시적으로 이어나가는 듯 싶었지만 염민과 내통한 부하 유현(劉顯)에 의해 351년 4월 살해당했습니다. 하지만 이 유현 역시 같은 해 5월 염위의 공격으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352년 11월 이러한 분위기를 말해주듯 모용준은 중산(中山)에서 황제를 일컬었으며 원새(元璽 : 352년 - 357년)라는 연호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모용준은 즉위할 때 동진(東晉)의 사신에 대해 「나라(동진)에 돌아가면 너의 천자에게 나는 황제의 자리가 공석으로 있었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된 것이라고 전해주거라.」라고 말했습니다. 그와 함께 그는 모용외와 모용황 시절부터 있었던 동진에 보냈던 사신마저 보내지 않음으로써 동진과의 관계를 단절했습니다. 한편 고국원왕은 전연의 세력을 살피면서 아직 전연에 남아있는 어머니를 돌려받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전연이 후조를 공격하고 염위를 멸망시키면서 도읍을 계성을 옮기면서 전연이 중원 공략에 열을 올리는 상황이 되자 355년 12월에 사신을 전연에 보내 인질과 조공을 바치면서 어머니를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모용준은 이것을 허락하고 전중장군(殿中將軍) 조감(刁龕)을 보내 왕의 어머니 주씨를 고구려로 돌려보내고, 고국원왕을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영주자사(營州刺史)로 삼고, 낙랑공(樂浪公)으로 봉하고, 왕호는 예전과 같게 하였습니다. 모용준의 눈에는 고구려는 왕의 어머니를 인질로 잡으면서까지 싸움을 피할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전연의 국력은 고구려의 공격 정도로는 휘청거리지 않을 정도로 강대해진 상황이었습니다.
※ 모용준은 중산(中山)에서 제위에 올라 358년 업으로 천도한 이후 태위, 시중, 상서령, 좌우복야, 중서령, 중서감 이하 백관을 두어 위진(魏晉)체제에 따라 관료기구를 정비하고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황제로 추존하였습니다.
이후 전연은 후조의 잔존 세력과 단부의 잔당을 평정하면서 357년 도읍을 계성에서 업으로 옮겼습니다. 계성이 비록 중원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새북과 중원 사이에 위치한 애매한 곳이었다면 업은 아예 중원의 한가운데나 다름없는 곳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연호를 원새에서 광수(光壽 : 357년 - 360년)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모용준은 사방으로 진출하여 현재의 산서성, 산동성, 하남성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중국의 정세는 서쪽에서 발흥한 저족의 전진(前秦)이 현재의 섬서성을 중심으로 산서성에도 세력을 뻗치면서 전연과 충돌하고 있었고 강남을 장악하고 있던 동진(東晉)은 환온(桓溫)이 지휘하는 북벌이 낙양을 탈환하면서 황하 연안까지 그 세력을 뻗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350년부터 360년에 이르는 시절은 후조와 염위 멸망 이후 이들 세 나라가 흡수하고 병탄하면서 정립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세력을 급속도로 확장한 전연이었지만 그 내부가 안정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아직 영역 내에는 후조의 계통을 이어받은 오벽(塢壁) 집단 등이 잔존해있었고 이들은 전진과 동진과 연대하여 반란과 복종을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모용준은 이러한 오벽 집단들을 달래며 또 한편으로는 무력으로 짓누르면서 중원을 통일할 준비를 합니다. 그 첫번째 상대로 낙점한 동진을 정벌하기 위해 모용준은 대군을 징발하였지만 이는 모용준이 360년 1월에 사망함으로써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 제가 이 글을 쓰면서 참고로 하고 있는 삼기양장이 지은 「오호십육국」에는 모용준이 보병 150만 명의 징발을 도모했다고 합니다.
모용준은 할아버지인 모용외와 아버지인 모용황의 업적을 그대로 이어받아 실시하며 결국에는 중원 진출에 성공하고 황제에 올랐습니다. 그가 조금만 더 오래살아 5호 16국 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군주라고 일컬어지는 전진의 부견과 상대를 이루었다면 어땠을지 궁금해집니다. 모용준은 사후 열조(烈祖) 경소제(景昭帝)에 추존되었습니다.
※ 출처 : 삼국사기, 오호십육국(삼기양장),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