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금으로부터 35년전인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사건이 일어나자 육군 참모총장인 정승화는 김재규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에게 10.26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겼다. 11월 6일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마치고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는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주요 보직을 독점해온 일부 정치군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인사조치안’을 작성하여 실행을 계획했다.
이에 반발한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는 대통령인 최규하의 승인 없이, 10.26 사건의 책임이 육군 참모총장인 정승화에게 있다는 명분으로 12.12 군사 반란을 이르켜 정승화를 체포하고 군권을 장악했다. 국가를 지켜야 할 군인들이 국가와 국민을 지키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군사반란을 이르킨 것이다. 반란에 성공한 신군부는 정권의 실세로 등극했다.
이듬해인 1980년 5월 군사반란으로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는 무시한 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각종 방법으로 언론을 신군부의 통제하에 장악하여 민주화 여론을 잠식시킴과 동시에 신군부를 홍보하는 자신들의 나팔수로 만들려 했다. 사회적으로는 각종 시위를 의도적으로 조장하여 국가 혼란사태를 만들어, 안보를 빌미로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이른바 "K공작 계획"을 실시했다.
서슬퍼런 유신 독재의 억압 속에서 제대로 조직되지 못했던 시민단체, 노동조합, 대학생들이 1980년 겨울과 봄을 걸쳐 체계적으로 조직되었다. 신군부의 점차적인 권력장악과 민주화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에 대항하여, 1980년 5월부터 시민들은 신군부와 정치권력이 민주화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과 의지를 밝히고, 전두환은 퇴진하라는 목소리를 냈다. 대학생의 본격적인 가두 시위는 5월 13일 부터 시작되었으며, 전국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가 터저 나왔다.
이에 신군부는 '비상계엄 전국확대'·'국회 해산'·'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를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로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했다. 그것의 화룡정점으로 5월 15일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은 김대중·김종필 등 주요 정치인을 연행하기 위해 '국기문란자 수사계획', '권력형 부정축재자 수사계획'을 마련해 전두환에게 보고하고, 전두환은 이학봉에게 검거 준비를 지시했다.
신군부의 폭정에 분노가 폭발한 여론은 대학생 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이 합세한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로 분출됐다. 5월 15일 서울역에선 10만명 이상의 시민이 모였으며 지역을 가리지 않고 각종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다. 그러나 서울역 시위에서 무력충돌을 우려한 지도부는 서울역 회군을 결정했다. 그렇게 무기력하게 끝난 시위는 다시 불붙지 못 했다.
"그러나 광주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것이 5.18 민주화 운동의 배경이다.
2.
신군부는 광주에 국가 전복 세력이 침투해서 시민들이 폭도가 됐다며, 폭도들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광주에 가혹하게 훈련중이었던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공수부대는 전쟁 상황에서 국가를 전복하려는 북한사람을 잡는다는 생각으로 광주 시민들을 학살했다. 신군부는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져서 국민을 외부로부터 보호할 군인이 광주시민을 학살하라 명령했다.
자신들의 아들 딸들이 경찰과 군인들에게 짓밟히는 것을 보며 광주 시민들은 분노했다. 광주 시민들은 정권과의 싸움이 질줄 알면서도, 자신들의 고향을 지키자는 마음 하나로 자신들의 어머니를 아버지를 누나를 형을 동생을 친구를 아들을 딸을 지키자는 마음으로 신군부에 대항하였다.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10일간 광주의 시민은 군인과 대치하였다. 광주 시민들은 불법으로 정부를 장악한 신군부에 대항하기 위해 무장을 하고 시민군을 조직하였다. 시민군은 경찰서와 파출소에 구비된 총을 들었다. 군대를 갔다 온 사람을 중심으로 지휘체계를 확립하였다.
그뿐만 아니었다. 총을 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먹밥을 만들고 시민군을 도왔다.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고 보호해주었다. 시민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모두를 도왔다. 그 중 누구도 이길 수 있는 싸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의 고향을 지키려는 마음 뿐이었다.
거짓을 보도하는 언론사를 불태웠다. 내 가족을, 내 친구를 죽인 군인들에게 대항했다. 공수부대가 전라남도청을 들어올 때까지 그들은 광주를 지켰다. 그리고 그 혼란스러운 과정에서 단 한 개의 약탈과 범죄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이 민주화의 성지인 광주의 정신이다.
3.
5.18 광주는 한국 정치에 대안 세력이라 불렸던 386(30대,80년대 학번,60년대생)을 낳았다. 광주에 아파하고 눈물을 흘린 386들은 죽음을 각오한 광주를 잊지 않았다. 그들에게 광주는 총칼과 폭력으로 억압하는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원동력이었다. 광주가 있었기에 386은 청춘이란 이름 아래 독재와 싸울 수 있었다.
386은 노무현 정권을 만들었다. 조선 건국 이래 600년동안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장악한 첫번째 승리었다. 이어지는 2004년, 탄핵의 역풍으로 총선을 승리했다. 386은 결국, 단군 이래 최초의 정치권력의 교체를 달성했다.
386이 꿈꾼 나라, 386이 만든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외환위기에서 정권을 이어받은 민주화 세력은 노태우정부까지 적자에 허덕이던 경상수지를 흑자로 전환시켰다. 사상 최대의 외환 보유고를 달성했고 낮은 물가 상승률과 OECD 상위권의 경제성장을 달성했으며 1인당 국민 총소득이 2만달러 라는 성과를 이루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복지체계를 개편하고, 사회 안전망과 공공성을 늘려갔다. 노동자의 인권을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미국과 북한과의 주체적인 외교를 위해 노력했다. 민주적 제도와 절차에 대해 확립해갔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은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달성하였으며, 중진국의 함정을 탈출한 세계사적으로 유래가 없는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다시 말해 오늘 내가 서있는 땅이, 내게 노력 없이 주어진 절차와 제도가 5.18 광주를 기억하고 아파한 386이 만든 것이다.
4.
지금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훼손을 걱정한다. 각종 민주적 절차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거나, 절차만 지켜지고 있다. 첫째로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선 민주주의를 망치는 정치권력을 끌어내려야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항상 위기이다. 단순히, 제도로서 민주주의가 아니라 철학적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선 정치 권력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검토하여야한다. 단순히 정치 권력의 교체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관심과 애정을 기반한 비판이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엔 어떤 이익으로부터 자유로운 20대, 청춘이 있다.
5.
386이 5.18 광주를 기억하고 아파하며 분노하여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것처럼 386을 계승하고 발전시킬 작금의 20대도 5.18 광주를 기억해야 한다. 광주를 기억함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제도가 공짜가 아님을, 수많은 사람의 피로서 세워진 것임을, 우리 역사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걸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꿈꿔야 한다. 386의 실수와 잘못을 세밀하게 성찰해야 한다. 그들의 공을 계승하고 과는 발전시켜야한다. 모두가 각자 자기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어 민주적인 제도 아래 토론하고 합의하며 국가를 운영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
그때, 도덕성과 전문성을 갖춘 세로운 세대가 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