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에 모용부(慕容部)의 부족장의 지위에 오른 모용외(慕容廆)는 서진을 공략하고 주변의 선비 일파인 단부(段部)와 우문부(宇文部)를 비롯해서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 등과 투쟁을 하면서 세력을 확장해나갔습니다. 하지만 모용외는 서진에 대한 공략을 중지하고 서진(西晉)에 스스로 복속하고 서진에게 선비도독(鮮卑都督)이라는 지위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모용외는 289년에 요서 도하(徒何)의 청산(靑山)으로 이동해 세력을 다지면서 부여와 전쟁을 벌입니다. 이 부여와의 전쟁에서 모용부는 부여왕 의려(依慮)를 자살하게 만드는 등 큰 승리를 거둡니다. 부여와의 전쟁 후인 294년에는 극성(棘城)으로 이동했습니다. 극성에 정착한 이후 농경과 정착 생활을 시작하면서 모용외는 서진의 제도 등을 받아들이면서 모용부 안정에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노력하는 와중에도 모용부에 대한 외부 세력의 위협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 초창기 모용외는 우문부를 공격하였지만 서진에서 이를 허락하지 않아 서진과 적대시하였습니다. 모용외는 서진의 유주(幽州) 일대를 공격하여 노략질하였습니다. 이에 무제(武帝)는 모용외를 공격하여 격파했지만 서진에 대한 모용부의 노략질은 계속되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고구려와의 전쟁이었습니다. 모용부는 이미 293년(봉상왕 2년) 가을 8월에 고구려를 침공하였습니다. 이 침공으로 봉상왕을 거의 잡을 뻔했지만 신성 재(新城 宰)인 북부 소형(小兄) 고노자(高奴子)가 이끄는 500명의 기병들에 의해 패퇴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모용외는 굴하지 않고 2년 뒤인 295년(봉상왕 5년)에 재차 침공하여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러 봉상왕의 아버지인 서천왕의 무덤을 파기까지 했습니다. 모용부의 침공에 봉상왕은 창조리의 의견을 받아들여 2년 전 모용외 격퇴에 지대한 공을 세웠던 북부 대형 고노자를 신성태수로 임명하였습니다. 고노자는 무인(武人)으로써 자질도 대단했지만 백성들에게도 선정을 베풀어 모용부의 침공은 줄어들었습니다.
이후 모용부와 고구려 사이에서 전쟁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 사이에 모용외는 307년 스스로 선비대도독(鮮卑大都督)이라 일컬으며 자립의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309년 12월 요동태수 방본(龐本)이 동이교위(東夷校尉) 이진(李臻)을 살해하면서 시작된 요동 지역의 혼란시기를 이용하여 모용외는 모용부의 세력을 더욱 넓혀나갔습니다. 그리고 영가의 난 이후 중원에서 요서와 요동 지방으로 흘러들어온 유민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극성 주변에 기양군(冀陽郡), 성주군(成周郡), 당국군(唐國郡), 영구군(營丘郡)이라는 교군(僑郡)을 두어 적극적으로 유민들을 도입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중원의 유민들을 받아들인 것은 모용부의 힘을 몇 배나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구의 증가는 당연한 것이었고 이들을 통해 농경 기술을 더욱 전진시킬 수 있었고 중원 문화의 도입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또 모용외는 이들 유민들과 그리고 기존의 토착 한인들을 정권에 참여시켰고 모주(謀主), 고굉(股厷), 추요(樞要) 등의 초보적인 관료기구를 설치하였습니다.
※ 당시 유민들은 모용부뿐만 아니라 왕준(王浚)과 평주자사 최비(崔毖), 선비 단부에 많이 의지했습니다. 하지만 모용외의 저런 적극적인 유민 유치 전략으로 인해서 왕준에 귀속한 후에 다시 모용부로 귀속하는 등 상당히 많은 유민들이 모용부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용부에도 위기는 다가왔습니다. 319년 평주자사 최비는 고구려로 도망와 미천왕에게 말하여 우문부와 단부와 힘을 함쳐 모용외를 치자는 건의를 하였습니다. 굉장히 팽창적인 정책을 구사하고 있던 미천왕은 최비의 건의를 받아들여 우문부와 단부와 연합하여 극성을 공격하였습니다. 이 세나라의 극성 공격에 모용외는 극성을 지키기만 하며 우문부에게 소와 술을 보내 위로하였습니다. 이에 고구려와 단부는 우문부를 의심하며 각각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습니다. 뒤늦게 우문부의 대인(大人) 실독관(悉獨官)이 「두 나라가 비록 돌아갔으나 나는 홀로 성을 빼앗겠다.」라고 하며 극성을 공격하였지만 이미 모용부는 우문부의 일개 힘으로 당해낼 정도의 세력이 아니었습니다. 모용외는 아들인 모용황(慕容皝)과 장사(長史) 배의(裵嶷)를 시켜 정예군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뒤를 따랐습니다. 우문부의 실독관은 크게 패하고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 이후 최비는 형의 아들인 최도(崔燾)를 시켜 극성으로 가서 거짓으로 축하케 하였습니다. 하지만 모용외는 최비의 속셈을 알고 있었고 최도는 사실을 고하였습니다. 모용외는 최도를 돌려보냈습니다. 모용부의 세력이 두려웠던 최비는 기마병 수십기와 함께 근거지마저 버리고 고구려에게 항복했습니다. 최비를 따르던 세력은 모용부에 항복하였습니다. 모용외는 장군 장통(張統)을 시켜 고구려를 공격케 하여 하성(河城)을 빼앗고 하성을 지키고 있던 장수인 여노(如孥)를 사로잡았습니다. 모용외는 같은 해에 모용인(慕容仁)과 모용한(慕容翰)을 시켜 고구려를 공격하였습니다. 하지만 미천왕은 잠시 시간을 벌기로 하고 모용외에게 맹약을 구하기로 합니다. 모용외는 받아들였고 모용인과 모용한은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320년(미천왕 21년)에 미천왕은 군사를 보내어 요동을 공격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요동을 지키고 있던 장수인 모용인에게 패퇴당하고 말았습니다. 줄곧 승리만이 기록되어 있던 미천왕조에 유일한 패전 기록이었습니다. 기세가 오른 모용외는 단부를 제압하고 명실상부하게 요동과 요서방면에서 모용부의 입지를 강화해나갑니다.
이렇게 같은 선비일파와 고구려, 부여 등에 대해서는 굉장히 강경한 입장을 보인 모용외였지만 동진(東晉)에 대해서는 존중하는 입장을 유지했습니다. 그는 317년 6월 동진 사마예에 대하여 황제 즉위를 권하는 상서(上書)에 이름을 써넣어 참여한 인물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이 공으로 대선우(大單于) 창려공(昌黎公)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320년에는 동진에게 안북장군·평주자사(安北將軍平州刺史)라는 칭호를 받습니다. 또 다음해인 321년에는 동진에게 도독유평이주동이제군사·거기장군·평주목·요동공(都督幽平二州東夷諸軍事車騎將軍平州牧遼東公)라는 칭호를 받습니다. 모용외는 석륵의 후조(後趙)에 대해서도 동진과 연대하여 대처하였습니다. 그리고 325년에는 우문부와 연대한 후조의 공격마저도 물리치고 우문부의 본거지 마저 함락시켰습니다.
이렇게 모용부의 세력 기반을 닦은 모용외는 333년 5월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는 전연이 건국된 이후 고조(高祖) 선무제(宣武帝)로 추존되었습니다.
※ 출처 : 오호십육국(삼기양장),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삼국사기, 위키백과
※ 저번편의 추가 내용
모용외가 모용부의 근거지를 극성으로 옮긴 이후, 모용외는 부민들에게 농상(農桑)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서 원래는 반농반목의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있던 모용부는 점차 정주생활로 바뀌어나갑니다. 그리고 모용외는 한족의 법제 특히 서진(西晉)의 제도를 모방하여 모주(謀主), 고굉(股宏) 등의 초보적인 관료제도도 설치하기에 이릅니다.
이들 관료조직에는 흉노 유연의 자립 이후 요서와 요동 방면으로 들어온 하남(河南), 하서(河西), 산동(山東)의 한족 유망민들이 임명되었습니다. 모용외는 이들 유망 한족들 중 서민들은 각각 본관의 향군(鄕郡)에 따라 사민(徙民)하고 농사에 종사시키고 사대부들은 재능에 따라 등용하여 정치고문인 모주로 삼거나 학자의 경우에는 모용부 일문의 자제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도록 하였습니다.
※ 《재기(載記)》에 따르면 한족 출신의 모주(謀主)는 하동(河東) 출신의 배의, 고굉(股宏)은 발해 출신의 봉추(封抽) 그리고 문재(文才)로는 안정(安定) 출신의 황보급과 태산(太山) 출신의 호무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평원 출신의 유찬은 통유(通儒)에 임명되어 세자인 황을 비롯한 일족 자제에게 학업을 교습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족 사대부들에게 학업을 배운 모용황은 병법과 경학(經學)에도 뛰어나고 천문(天文)도 잘 아는 문무양면에 뛰어난 소질이 있는 인물로 성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