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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훈족과 아틸라 이야기 - 첫번째
게시물ID : history_1574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10
조회수 : 185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5/13 15:08:32

기원후 374년 요르다네스가 훈족은 발라미르 혹은 발람베르(Balamir 혹은 Balamber)라고 부르는 수령의 지휘 하에 볼가 강 하류를 지나 돈 강을 건너 테렉과 쿠반의 알란인들을 격파하고 복속시키고, 드네프르 강 서쪽에 있는 오스트로고트(Ostrogoths)를 공격하여 늙은 왕 에르마나릭(Ermanarich)과 그의 아들 비씨마르(Vithimar)를 패배시켜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에르마나릭과 그의 아들 비씨마르의 자결로 374년 동고트는 붕괴되었고, 훈은 후리문트(Hurimund)를 왕으로 임명하여 동고트를 통치하게 하였습니다. 오스트로고트의 붕괴에 두려움을 품은 비시고트는 이들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 다뉴브를 건너 로마 제국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로마 제국을 파멸로 몰아넣을 ‘게르만 족 대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알란인과 오스트로고트의 복속, 그리고 비시고트의 탈출은 훈족을 카르파티아와 우랄 사이에 있는 모든 초원의 주인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한번 시작된 이들의 전진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378년 훈족은 복속당한 알란인, 고트인, 게르만계의 타이팔족으로 구성된 예비 부대를 앞세우고 378년 봄에 투나 강을 건너 로마군의 저항 없이 트라키아(Tracia)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영토에 첫발을 내딛은 훈의 예비 부대는 정찰 전위 부대에 불가했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훈의 또 다른 지대는 헝가리 초원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405년부터 406년까지 카르파티아 통로 내지는 왈라치아 평원에 이르기까지 헝가리 초원을 점령하고 그곳에 있던 고트족의 일파인 게피대(Gepidae)를 복속시켰습니다.



이러한 훈의 공격에 위협을 느낀 동유럽의 여러 부족들은 로마 영토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스트리아에 거주하고 있던 마르코만(Marcoman)족과 쿠아드(Kuad)족, 이란계 사르마트(Sarmat)족, 트란실바니아에 있던 서고트족들은 각각 다른 경로로 381년 로마 영내로 침입해 들어갔습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게르만계 종족들과 이란계 바쉬타르나(Bashtarna)족이 헝가리 서부에서 알프스 산맥을 따라 이탈리아를 위협하였습니다.



훈족의 본격적인 로마 침공은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Ⅰ)가 사망하고 로마가 동서로 분열되는 395년경이었습니다. 두 전선에 걸쳐 공격을 개시한 훈은 발칸 반도에서 트라키아 쪽으로, 또 다른 주력은 카프카스에서 아나톨리아 고원 쪽으로 동로마를 압박해 들어갔습니다. 특히, 아나톨리아 원정은 돈 강 유역에 본부를 둔 훈족의 동부 부대가 주력이었으며, 바시크(Basik)와 쿠르시크(Kursik)라는 두 사령관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이 원정은 그 부대의 규모와 주변국의 정세 재편에 미치는 영향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뿐만 아니라 사산조 페르시아까지 극도의 긴장과 우려를 안겨 주었습니다.



훈의 정예 부대는 에르주름(Erzurum)에서 출발하여 카라수(Karasu)와 유프라테스 계곡을 지나 멜리테네와 칼리키아지 진격했습니다. 그곳에서 전략적 요충지인 에데사와 안타키아 성채를 한동안 점령한 후 시리아로 남하하여 티로스를 공략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395년 가을, 다시 북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중앙 아나톨리아에 도착하여 카이세리와 앙카라 평원의 카파도키아-갈라티아를 유린하고, 그곳에서 아제르바이잔-바쿠 길을 따라 북으로 그들의 본거지로 귀환했습니다. 이후 398년에도 훈은 재차 아나톨리아 원정을 감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Arcadius)는 아무런 대항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한편 400년경 서쪽 진영에서 훈의 원정과 공략은 사령관 울드즈(Uildizm Uldin)가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발라미르의 자손인 울드즈는 400년 전 그의 선조인 묵특 선우가 보여주었던 탁월한 교활함을 그대로 이어받은 자였으며 후일 아틸라의 통치 시대까지 지속되는 훈의 대외 정책의 기초를 마련한 자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대외 정책의 기본은 동로마 즉 비잔틴 제국을 위협하면서 서로마와는 친선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동서 로마 관계를 차단시켜 훈에 위협적인 정치 세력의 등장을 막고, 보다 강력한 동로마를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것을 제 1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서로마를 협공하는 주변 종족들이 훈과 적대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훈은 서로마와 연합하여 그들을 공략하고자 했습니다.



동유럽에 산재해 있던 다양한 종족들을 압박하던 울드즈가 투나 강변에 출현하자 제 2의 민족 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반달족과 서고트가 이탈리아 변경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서로마 장군 스틸리코(F. Stilicho)는 402년 4월에 알라리크(Alaric)가 이끄는 서고트군을 힘겹게 패퇴시킴으로써 로마를 방어했지만 이는 일순간에 불과했습니다. 서고트 뿐만 아니라 다른 종족의 계속되는 공격에 서로마 제국은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동고트의 라다가이우스(Radagisus)는 훈에 의해 쫓겨난 반달, 수에브, 쿠아드, 부르군드 등 여러 종족들과 연합하여 로마에 대한 대대적인 공략을 시작했습니다. 이탈리아 전역에 유린당하고, 스틸리코 장군마저 파비아(Pavia) 전투에서 패배했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울드즈가 이끄는 훈의 군대가 이 사태에 개입하였습니다.



로마군과 울드즈가 지휘하는 연합군은 406년 가을 플로렌스 남부의 파에술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라다가이우스를 처형하고 로마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로 인하여 훈의 위세는 한층 더 높아졌으며 반달, 알란, 수에브, 사르맡, 켈트족들은 이런 훈의 위협을 피해 라인 강을 넘어 갈리아 방면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치적, 군사적 장애 요소가 완전히 없어지자 훈의 서쪽 경영은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울드즈는 404~405년, 409년 투나 강을 건너 강 남부 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함으로써 동로마에 대한 훈의 위협을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그리스 문헌에 의하면 울드즈는 훈과의 평화 협상을 위해 파견된 트라키아 총독에게 태양이 뜨는 곳에서 태양이 지는 곳까지의 모든 영토를 정복할 것임을 선언하면서 훈의 위세를 과시하기도 했습니다.(약 1천년 뒤의 유라시아의 대부분을 장악한 예케몽골울루스의 4대 칸인 뭉케가 아우인 훌레구에게 하는 말이 생각나네요.)



거대한 훈 제국의 기반을 마련한 울드즈는 410년 사망했습니다. 울드즈의 사후 훈 제국의 통치는 카라톤에게 맡겨졌습니다. 하지만 카라톤에 대한 자료는 미미하여 412년~422년에 이르는 약 10년 간 훈의 동부 지역 경영에 힘을 쏟았다는 것과 동로마 사절 올림피오도로스(Olympiodoros)가 카라톤에게 파견되었다는 정도만이 알려져 있는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422년 훈 왕족에 속한 네 명의 형제 루아(Rua, Ruga), 문주크(Munchuk), 아이바르스(Aybars), 옥타르(Oktar)가 서로 쟁패하여 루아가 훈 왕권을 획득하였습니다.(투르크-몽골의 전통에서는 유산 상속에 가족의 모든 구성원들이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있어서 항상 분열의 요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 같은 경우 메흐메드 2세가 형제 살해를 인정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문주크가 일찍 사망함으로써 다른 두 형제는 각각 지역 엘리그(Elig, 왕)에 봉해졌습니다. 일찍 사망한 문주크의 아들 중 한명이 그 후 수천년간 유럽 사람들의 마음 속에 공포를 각인시킨 아틸라였습니다.



울드즈의 정책을 계승한 루아는 422년 동로마가 훈의 내분과 복속 민족의 내란을 획책하여 발칸 원정을 시도하자 동로마를 패퇴시켜 연간 금 350리브레(1 Libre=약 450g)의 공납을 부과했습니다. 423년에는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408~450)가 네 살의 나이로 등극한 서로마 황제 발레시아누스 3세(Valentinianus Ⅲ)에 대항해 로마 침공을 개시했습니다. 동로마의 육해군이 이탈리아로 진격해 오자 서로마는 급히 훈에게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루아는 6만에 이르는 훈의 정예 기병들을 이끌고 이탈리아 전선에 직접 참가했습니다. 이 때, 로마 원로원은 어린 발렌시아누스 3세를 폐하고 요하네스(Johanes)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였습니다.



당시 35세의 실력자이자 훗날 아틸라와 카탈라우눔에서 싸우게 되는 아에티우스(Aetius)는 서로마에서의 전쟁을 피해 재빨리 루아의 진영에 가담했습니다. 훈의 침공 위협에 동로마 군대는 재빨리 퇴각함으로써 로마의 폐허 대신 과중한 전쟁 배상금을 훈에게 지불하게 되었습니다. 아에티우스는 이후 훈의 비호 아래 황제 계승권을 둘러싼 정쟁에서도 보호를 받았습니다. 훈이 아에티우스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은 432년 아프리카의 반달 왕 게이세리크(Geiserikh)의 전쟁을 벌인 그의 정적 보니파시우스(Bonifacius)의 공격을 피해 훈 제국에 망명한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아에티우스의 이런 행보는 루아의 강력한 통치력과 함께 훈 제국이 서로마의 내정은 물론이거니와 대외 정책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음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훈 제국에 복속된 민족들이 로마에 의지하여 훈 제국에 대항할 일은 없어졌습니다. 다만, 평화의 조건으로 루아에게 매년 금 350 리브레를 납부해야 하는 테오도시우스 2세는 다시 기회를 노리며 훈 치하의 군소 민족들과 비밀리에 연대를 강화해갔습니다. 하지만 이를 간파한 루아는 그 때까지 허용되던 동로마의 훈 치하 외국인을 용병으로 모집하는 행위와 동로마 상인의 훈 영토 내에서의 거래 행위를 일체 금지하였고 나아가 훈 제국 내에서의 그리스 인의 자유 통행과 이동을 허용치 않았으며, 무역은 지정된 국경 마을에서만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 또 루아는 테오도시우스에게 얼마 전 동로마로 망명해 간 훈 왕족 마마(Mama)와 아타캄(Atakam)의 자식들, 그리고 훈 도망자들의 송환을 요구했습니다. 루아의 강경한 요구에 테오도시우스 2세는 즉시 화해를 모색하고자 우호 사절단을 훈 국경에 파견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 434년 봄 루아가 사망하였습니다. 동로마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대주교 프로쿨루스(Proculos)는 강력한 적 우두머리의 사망은 신앙심 깊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간청을 신이 받아들인 결과라고 설교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훈 국경에 도착한 동로마 사절단은 루아 대신 한 장군과 대면하게 되는데 이 장군이 훗날 모든 유럽인들에게 엄청난 공포를 심어준 사내인 아틸라(Attila)였습니다.



*출처 

세계 각국사 시리즈 ‘이희수 著 터키사’

르네 그루쎄 著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니시지마 사다오 著 ‘중국의 역사 - 진한사’

패트릭 하워스 著 ‘훈족의 왕 아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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