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유브 조의 약하디 약한 술탄 안 나시르는 훌레구가 신임하는 장군인 키트 부카에게 이용당하고 훌레구에게 보내졌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바니야스(Baniyas)를 통치하는 아유브 조의 작은 집안이 훌레구의 편으로 모였습니다.
시리아 단성론파, 그리스 정교회, 토착 기독교도들에게 몽골군의 다마스쿠스 입성은 마치 6세기 동안의 억압에 대한 천벌로만 여겨졌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받들고 찬송가를 부르며 하는 시가행진을 조직하였으며, 무슬림들은 그 앞에서 공손히 서도록 강요되었습니다. 그들은 감히 ‘종을 울리며, 포도주가 우마이야(Umayya) 모스크에서조차 넘치게’ 하였습니다. 티레의 성당 기사의 기록에 따르면 아르메니아의 국왕 헤톰과 그의 사위인 안티오크의 왕자 보에문트가 몽골인들의 다마스쿠스 정복을 돕고 나서, 모스크를 파괴하거나 무슬림들이 예배시에 전용했던 옛 비잔티움 교회를 기독교가 되찾아 사용하도록 키트 부카로부터 허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무슬림들이 키트 부카에 대해 불평하였으나 그는 자신의 신앙적 성향을 자유롭게 따랐고(키트 부카는 네스토리우스파의 기독교를 믿었다고 하더군요), 기독교 각파의 교회와 고위 성직자들을 방문하였으며, 그들의 불평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몽골이 기독교에만 편중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때로부터 2~3년 뒤 ‘훌레구 울루스’가 그리스도교 세계에 대해 우호정책으로 전환하는 것은 정치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칸 뭉케의 말처럼 몽골군은 땅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까지 진군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이슬람이 좀 더 존속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습니다 1259년 8월 11일 대칸 뭉케가 죽었습니다. 뭉케의 두 아우이자 훌레구의 형제인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 사이에서는 대칸의 자리를 두고 계승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전선에 있던 훌레구는 1260년 2월에서야 뭉케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훌레구는 귀환을 선언하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2만 명(혹자는 1만 2천명)으로 감축시킨 점령군의 지휘를 키트 부카에게 맡기고 아제르바이잔 방면으로 떠났습니다. 르네 그루쎄는 훌레구가 제위에 대한 야망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훌레구는 본토인 몽골 고원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가 이미 충분히 부유한 상태였고 자신을 후보로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쿠빌라이를 동정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훌레구가 이미 제위에 대한 야망을 품고 돌아갔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스기야마 마사야키의 의견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훌레구가 야망을 품었든 품지 않았든 훌레구가 아제르바이잔 방면에 위치한 수도 타브리즈에 도착했을 때 쿠빌라이의 즉위를 알리는 사자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훌레구에게는 쿠빌라이의 즉위를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기독교를 편애하듯이 이슬람을 편애하는 킵착 한국의 칸이자 자신의 사초인 베르케가 바그다드 학살을 이유로 자신을 비난하면서 코카서스 국경에서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찌되었든 훌레구의 선회는 20년 전 우구데이의 죽음으로 선회한 바투의 유럽 원정군처럼 아랍세계를 결정적으로 구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훌레구의 명으로 2만의 군사를 이끌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게 된 키트 부카는 기독교도들을 호의로 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위에서 적은 것처럼 그 자신이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 교도일 뿐만 아니라 프랑크와 몽골의 동맹이 양측에 유리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티오크와 트리폴리의 왕자 보헤문트 6세도 키트 부카와 같은 생각을 지니고 있었지만 아크레의 호족들은 여전히 몽골인들을 무슬림보다 더 못한 야만인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호족들 가운데 하나인 시돈(Sidon)의 백작 율리안(Julien)은 몽골 순찰대를 공격하여 키트 부카의 조카를 죽였습니다. 격노한 키트 부카는 시돈을 약탈해 버렸습니다. 이는 프랑크와 몽골 간의 동맹이 끝남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프랑크와 몽골의 분열은 상당히 궁지에 몰려있던 무슬림들에게는 호기로 작용했습니다. 비록 아유브 조가 정복당했지만 아직 이집트에는 강대한 맘룩 조가 남아 있었습니다. 당시 카이로에서 맘룩 조를 통치하던 술탄 쿠투즈(Qutuz, 1259~1269)는 형세가 자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기사 이미 훌레구의 본대는 아제르바이잔으로 떠나버렸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는 키트 부카가 지휘하는 겨우 2만에 불과한 몽골군이 프랑크인들의 도움 없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260년 7월 26일, 아미르 바이바르스(Baibars)가 지휘하는 전위부대가 팔레스타인을 향해 진군했습니다. 이들은 가자를 점령하고 있던 소규모 몽골 분견대를 쳐부수고 계속 진격을 하였습니다. 이미 몽골과의 동맹이 파기된 프랑크인들은 맘룩 조의 군대가 자기네 도시의 바로 성벽 및에서 음식물을 보충하는 것도 용인해버렸습니다. 프랑크 세력이 강한 팔레스타인의 해안지역을 통해 행군하고 그들의 군대에 물자보급을 허락 받은 것은 맘룩 조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이점으로 작용했습니다. 보급선이 위협받지 않자 그 다음은 수적인 우세가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에 맞서 키트 부카도 그의 기병대와 소수의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파견대를 거느리고 맘룩군에 대항하러 나왔습니다.
이윽고 양군은 1260년 9월 3일 바이샨과 나블루스 땅 사이에 위치한 제린(Zerin)의 이안 잘루트('Ain Jalut)에서 격돌했습니다. 이안 잘루트라는 이름의 건조한 구릉부를 흐르는 실개천의 상수원 일대를 아랍어로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그것은 ‘골리앗의 샘’을 의미하며 ‘구약성서’에서 어린 다비드가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렸다는 이야기에서 기인한 이름이었습니다. 맘룩군의 병력은 맘룩측 기록에는 12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몽골군의 숫자도 한 단위 많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제 숫자는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지만, 맘룩군이 몽골군에 비해서 그 수가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전투는 맘룩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키트 부카는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명예를 다 지켰다고 합니다. 훗날 라시드 웃딘은 집사에서 그의 행적을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그는 열성과 용기를 다하여 강력하게 공격하며 좌우로 달렸다. 부하들은 그에게 퇴각할 것을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이 권고에 대하여 -내가 죽어야 할 곳은 이곳이다! 몇몇 병사들은 칸에게 가서 키트 부카가 수치스러운 후퇴를 거부하고 자신의 임무에 목숨을 바쳤다고 전할 것이다! 칸으로 하여금 그의 병사의 아내들이 1년간 임신하지 못하였으며, 그의 종마들은 망아지를 낳지 못하였음을 기억하시게 하라! 칸의 삶이 행복하시기를!-이라고 함으로써 물리쳤다’
그리고 또 라시드 웃딘은 ‘그는 모두에게 버림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1000 명의 적을 상대로 싸움을 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의 말이 쓰러지고 그는 포로가 되었다’라고 적었습니다. 포로가 된 키트부카는 쿠투즈 앞으로 끌려왔고, 쿠투주는 ‘그렇게 많은 왕조들을 쓰러뜨리고 이제 덫에 빠진 너를 보아라!’라며 그를 모욕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키트 부카는 전혀 이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쿠투즈에게 ‘내가 만일 네 손에 죽는다면, 나는 그것이 네가 아닌 신이 한 것임을 인정한다. 순간의 성공에 도취하지 말라! 내 죽음에 대한 소식이 훌레구 칸의 귀에 닿으면 그의 분노는 폭풍우치는 바다처럼 끓어오를 것이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이집트의 문 앞까지 모든 땅은 몽골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말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몽골인들에 대한 그리고 칭기스칸 국가의 당당함과 정통성에 대한 충성심을 마지막까지 분출시키며, 통상 전임자를 살해함으로써 권자에 오르는 것을 당연스럽게 여기던 맘룩 술탄들을 모욕하였습니다. 그는 ‘나는 태어난 이래 칸의 노예였다. 나는 너같이 자기 주인의 살인자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머리가 베었습니다.
술탄 쿠투즈는 다마스크수로 승리의 입성을 하였습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좋아하던 기독교도들은 큰 대가를 치루었으며 맘룩조는 팔레스타인, 시리아 지역까지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훌레구는 다시 시리아 원정을 시도했습니다. 1260년 11월 말 몽골 분견대가 시리아로 쳐들어와 알렙포를 두 번째로 약탈하였습니다. 하지만 홈스 부근에서 맘룩조 군대에게 격파되고(12월 10일), 유프라테스 동쪽으로 쫓겨나갔습니다.
*출처: 르네 그루쎄 著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스기야마 마사아키 著 ‘몽골 세계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