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년간 아랍 세계의 강력한 축이었던 이스마일리교단이 사라졌습니다. 이스마일리교단이 사라짐으로써 몽골군의 진격은 한층 더 가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1257년 11월 훌레구가 이끄는 몽골군의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프조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티그리스 강 서쪽 기슭에서 바이주의 군대가 바그다드를 뒤에서 빼앗기 위해 모술 루트를 따라 접근하였고, 훌레구가 아랍 땅에 발을 들여놓기 2년 전부터 선봉군을 이끌고 선전한 장군이자 훌레구 위하 제일 유능한 사령관인 나이만족의 키트부카는 루리스탄 루트를 따라 바그다드의 수도로 좌익을 이끌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훌레구는 하마단에서 키르만샤와 홀완을 거쳐 티그리스로 내려왔습니다. 1258년 1월 18일 몽골군은 재집결하였고 훌레구는 그의 막사를 바그다드 동쪽 교외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북쪽지방에서부터 바그다드를 광범위하게 포위한 것처럼 여러 부대를 배치하기 시작했습니다. 훌레구의 용의주도하고 신속한 명령에 의해 바그다드 일대는 몽골의 여러 겹 포위망 속에서 고립되었습니다.
서기 750년에 건국되어 5대 칼리프인 ‘하룬 알 라쉬드(Harun al-Rashid. 786~809)’ 무렵에는 아랍세계의 최강국으로써 동방의 강대국 당(唐)과 자웅을 가눈 아바스 칼리프조는 훌레구가 이끄는 몽골군이 이스마일리교단을 멸망시키고 바그다드로 향하고 있을 무렵에는 바그다드 일대만을 다스리는 자그마한 국가로 전락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칼리프는 알 무스타으심(al Musta'sim, 1242~1258)이었습니다. 알 무스타으심은 훌레구가 이끄는 몽골군도 이전에 이란 지역의 패자가 되었던 부이, 셀주크. 호레즘을 자신의 전임자들이 다루었듯이 자신도 몽골인들을 책략으로 다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훌레구는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훌레구는 알 무스타으심에게 아바스 가문 36인의 칼리프들의 계승자에게 요구하기를, 바그다드에서 일단 부이조의 총수들에게 주어졌다가 나중에 셀주크의 강력한 술탄(Sultan)들에게 위임된 속세의 권력을 내높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대는 칭기스칸 이래 몽골군이 세상에 가져온 운명을 알았다. 영원한 하늘의 은총에 의해, 어떤 굴욕이 호레즘 샤들의, 셀주크의 다일람 왕들의, 그리고 여러 아타벡들의 왕조를 덮쳤던가! 그러나 바그다드의 문은 이러한 인종들 누구에게도 닫히지 않았고, 그들 모두 그곳에 그들의 지배를 확립하였다. 그러면 그러한 힘과 그러한 권력을 가진 우리가 이 도시에 들어가는 것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는가? 기치에 대항하여 무기를 잡지 않도록 조심하라!”
훌레구의 이런 엄숙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알 무스타으심은 그의 조상들이 페르시아의 마지막 셀주크조로부터 되찾아온 아바스의 세속 영역을 넘겨주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오 이제 겨우 자신의 경력을 시작한, 그리고 열흘의 성공을 축하해 축배를 든, 모든 세상보다 그대가 우월하다고 믿는 젊은이여! 너는 동쪽에서 마그리브까지 알라의 모든 숭배자들은 국왕이든 거지든 내 조정의 노예이며, 내가 그들에게 소집을 명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가?”
하지만 이는 알 무스타으심의 헛된 망상에 불과했습니다. 시리아와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는 아유브조는 몽골의 접근에 두려움을 품고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1월 17일 무렵에 칼리프의 작은 군대가 바그다드를 구원하기 위해 몽골군과 맞서 싸웠지만 산산조각이 나고, 1월 22일, 훌레구와 키트부카가 반대편에서 포위망을 좁혀 오는 동안, 몽골 장군 바이주, 부카 테무르, 그리고 수군작이 티그리스 강 서쪽 교외의 유리한 지점을 차지하기 위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칼리프는 그제서야 몽골인들을 달래기 위해 사신을 보냈지만 그 때는 이미 늦어버렸습니다. 몽골인들의 거센 공격으로 요새의 동쪽은 완전히 함락당했고 포위된 주민들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비대 병사들은 달아나려다가 몽골인들에게 붙들려 중대별로 나누어 마지막 사람까지 죽었습니다. 2월 10일, 칼리프가 몸소 훌레구에게 항복하러 왔고, 훌레구는 그에게 모든 사람이 도시를 떠나고 그들의 무기를 내려놓도록 명령하라고 했습니다. 무장을 해제하고 투항한 주민들은 모두 몽골인들에게 죽었습니다. 그들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시민들은 다시 학살되고 도시에는 불꽃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가 2월 13일이었습니다. 약탈은 17일간 지속되었으며 그 기간 중 주민 9만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37대 5백년에 걸친 아바스 칼리프조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마디나트 알 사람’ 즉 ‘평안의 수도;라고 불리는 바그다드는 이후 활기를 잃어 몽골시대에도 나름대로의 도시로는 지속되었지만, 이미 전과 같은 영광스러운 번영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한편 칼리프 알 무스타으심은 투항한 뒤 탑에 갇혀 굶어죽었다고도 하고, 융단에 둘둘 말린 채 말굽에 밟혀 살해되었다고도 합니다. 이 때가 2월 20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부 살아남은 칼리프 일족은 이집트로 도망가 잠시 뒤에 맘루크조의 영주인 술탄바이바르스에 의해 정통칼리프가 되어 이후 카이로에서 꼭두각시 정권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초라하기 짝이 없는 칼리프는 맘루크의 대의명분과 정통화를 위해서는 도움이 되었지만 근본바탕이 되는 이집트. 시리아를 제외하고 인도의 델리 술탄 정권등 극히 일부에서 밖에 승인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진졍한 칼리프는 오스만 투르크조가 등장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렇게 몽골은 2년간 시아파와 순니파의 핵이었던 이스마일리교단과 바그다드를 차례로 소멸시켰습니다.
*출처: 르네 그루쎄 著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스기야마 마사아키 著 ‘몽골 세계제국’, 지배선 著 ‘유럽문명의 아버지 고선지 평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