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레구가 아무다리아강을 건너기 4년 전, 대칸 뭉케는 훌레구가 이끄는 본대의 출발에 앞서 1252년 7월 나이만족 출신인 키트부카에게 1만 2천 명의 선봉군을 먼저 출발시켰습니다. 1만 2천명의 선봉군을 이끈 키트부카가 이끄는 선봉군은 다음해 3월 아무다리아 강을 건너, 쿠히스탄 방면의 이스마일 세력을 석권한 뒤에 알부르즈 산중에 있던 적의 여러 성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키트부카군의 거센 공세에도 불구하고 알부르즈의 이스마일교단의 강력한 저항으로 이렇다할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 눈에는 막강하기 이를 데 없는 몽골의 군대도 이스마일교단의 견고한 진영은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키트부카가 행한 이 모든 활동은 앞으로 시작될 몽골의 대작전의 일부 그것도 전초전에 불과했습니다. 키트부카의 임무는 이스마일교단의 군사적 힘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려는 일종의 소규모 사전조사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제7대 교주인 알라 웃 딘 무함마드 3세(Ala ad-Din Muhammad Ⅲ)가 그 측근에게 살해당한 것이었습니다. 이 때가 1255년 12월, 케쉬에 체류하고 있던 훌레구가 자신의 공격 방침을 말하고 이란 방면의 모든 우두머리들에게 입조하라고 명한 시기였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8대 교주가 된 아들 루큰 웃 딘 프루샤(Rukn ad-Din Kurshah)는 반몽골적인 태도를 견지한 아버지와는 달리 신종(臣從)과 평화에 의해 종교왕국을 지키려는 자세를 표명하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신종과 평화를 내건 프루샤의 지휘 하에 이스마일리교단의 태도는 반전해서 프루샤는 몽골 측과 교섭을 통해 아무 탈 없이 지내기를 원했습니다.
이스마일리교단의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을 때 아무다리아강을 건넌 훌레구는 본영은 후방에 물려두고 휘하의 여러 부대를 이란 동부로부터 알부르즈의 남북에 걸쳐 넓게 전개시켜 프루샤와의 교섭과 임기응변을 계속 되풀이하며 서서히 적의 중추인 알라무트 지방으로 진공하기 시작했습니다. 훌레구는 대칸 뭉케가 내린 명을 거역하고 이스마일리교단을 존속시켜줄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훌레구의 생각을 알 리가 없었던 프루샤는 조공국으로 신종하겠다는 증명을 요구받고 일부 산성의 파괴와 인질제공 등의 비교적 가벼운 양도안을 냄으로써 훌레구의 태도를 살폈습니다. 하지만 훌레구는 그런 양도안을 받을 때마다 새로운 양도안을 요구했으며, 동시에 이스마일리교단의 전선에 대한 연이은 위협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어느새 이스마일리교단의 통신망과 교통망은 몽골군대에 의해 완전히 봉쇄되었고 단단했던 그들의 결속도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교섭과 공격을 되풀이하면서 1256년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훌레구는 이제 슬슬 이스마일리교단에 대한 문제를 마무리 짓기 위해 전군에 공격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이 지경에까지 몰렸는데도 불구하고 프루샤는 협상조건만을 내놓은 채 겨울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단 겨울이 되어 알부르즈에 눈이 쌓인다면 추위에 익숙한 몽골군이라고 해도 공격은 힘든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임박하고 있었습니다.
프루샤가 개전과 강화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을 때, 훌레구가 이끄는 몽골군이 프루샤가 머물고 있는 마이문디즈(Meymundiz) 아래 집결하여 이스마일리교단과의 마지막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전투를 치루었습니다. 이윽고 1256년 11월 19일, 프루샤는 마이문디즈의 성문을 열었습니다. 이미 몽골군에 의해 교통, 통신망이 봉쇄된 상황에서 마이문디즈를 제외한 이스마일리교단의 성들이 힘을 합쳐서 몽골군에게 저항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게다가 이스마일리교단의 중추부는 사실상 그 힘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항복한 프루샤는 정중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프루샤 자신의 요청으로 이스마일리교단의 본성이자 난공불락의 독수리 요새였던 알라무트(Alamut)도 무혈로 성문이 열렸으며 나머지 성들도 그의 설득으로 차례로 투항했습니다. 훌레구는 프루샤를 적절히 이용함으로써 난공불락이라고 여겨지던 이스마일리교단의 산성들을 거의 다 그것도 단 한번의 칼부림 없이 얻어냈습니다. 이렇게 166년에 걸쳐서 아랍 세계와 십자군 세력들마저 공포에 떨게 한 이 암살자 교단은 훌레구의 본대가 본격적인 공격을 감행한지 겨우 1년도 안 되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스마일리교단이 사라졌을 때 다른 무슬림들은 그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겨우 1년도 안 된 시점에서 이스마일리교단을 무너뜨린 몽골에 대한 공포심은 전보다 더 증가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투항한 프루샤는 훌레구로부터 우대받고 자신의 희망대로 대칸의 궁정이 있는 몽골리아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1257년 한창 남송정벌 출발 직전의 뭉케는 그의 알현을 거부했고, 아무런 소득 없이 귀환길에 오른 프루샤는 몽골 호위부대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이란 땅에 남아있던 그의 일족들도 뭉케의 명령으로 모두 살해되었습니다. 이용가치가 떨어진 말은 버린다라는 냉엄한 현실 속에서 프루샤는 단지 장기판의 말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참조문헌: 르네 그루쎄 著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스기야마 마사야키 著 ‘몽골 세계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