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초기에 일어난 정한론 에 따라이 전쟁도 "정한"라고 불리게되었지만, 한국 병합 이후에는 조선인 이 일본 국민이 되었음으로 '조선 정벌'의 표현은 부적합하다는 판단 아래 , 1 차 출병을 "분로쿠의 역" 2차 출병을 "게이쵸의 역" 으로 "분로쿠 게이쵸의역 '이라는 호칭이 정착되었다.
= 일본애들은 임진왜란을 분로쿠/게이쵸의 역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식민지 시절에 생긴 말이었군요. 그 이전엔 정한이라고 불렀답니다
다음 관계국의 군사력을 적는다. 또한 당시 각국의 인구는 1600 년 당시 일본은 2200 만명, 이씨 조선은 500 만명, 명나라는 1 억 5000 만명이었다고 추측되고있다 ( 역사상의 추정 지역 인구 참조)
= McEvedy & Jones (1978) 라는 양반이 쓴 책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지만 국내 통계청의 조사에 의하면, 조선시대 중앙정부에서 파악하고 있는 인구는 4,162,051 명. 그런데 당시 조선정부는 호구조사를 할 때 군역을 지는 양민 숫자만 조사하고, 군역을 지거나, 세금을 내지 않는 노비, 천민 층은 호구조사에 포함하지 않았음. 그리고, 세금을 피해 도망간 농민층 및 유랑민 등을 정부조사 치에 추가하면 조선의 실제인구는 정부조사치보다 월등히 많았기 때문에 조사에서 누락된 인구를 포함한 임진왜란 전의 조선의 총인구는 약 1100만 여명 정도로 추정. (그래도 우리나라보다 머릿수가 두 배정도 많았군요.)
전쟁 초기 일본군은 500 미터 이상의 최대 사거리를 가지고, 활과 화살보다 관통력있는 총을 집중 사용해서 우위에 섰다. 본래 일본의 화승총의 용법은 서양의 전열 보병 의 탄막 사격과는 달리 저격 형이며, 사격 개시 거리도 1 정 (약 109 미터) 정도 였다고되지만, 조선에서 더 멀리 거리에서 포격전을하는 경향이 있으며, 원거리 사격에 의한 정밀도 저하를 보완하기 위해 일제히 집중 사격도 이루어졌다.
=조총도 최대사거리가 500m라는거지 정확히는 150언저리 유효사정거리를 벗어나면 명중률과 살상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총이라곤 잡아본적이 없으니 500m에서 사람을 쏘는게 어떤건지 감도 못잡을테지요 쯧쯔.. 유효사정거리 내에서 어느 정도 목표를 향한 사격은 가능했을테지만 조총으로 저격이라니 망상입니다.
조선의 보병은 칼 [66] , 창, 활 등의 무기를 장비하고 있었다. 주력 무기는 활 이었지만 일본의 반궁에 해당하는 대나무 또는 고래 수염으로 만든 짧은 활 [67] 에서 최대 사거리는 120 미터 정도이며 [68] [69] 일본의 나비 140 미터 남짓 [70] 보다 짧았다. 게다가 병사 활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화승총보다 길고 어려운 훈련이 필요했다.
= 일본인들 특유의 날조스킬 발동. 국궁의 최대사정거리가 120미터라고? 노노 국궁의 유효사거리가 145m남짓이며 역사스페셜에서 했던 실험을 참고하자면 최대사정거리로 400m는 거뜬히 날아갑니다. 관통력과 살상력에서는 조총에 밀렸을지 몰라도 사거리는 그렇게 큰차이가 없었지요.
선조 실록"에 따르면,이 때 조선의 민중은 조선 정부를 미워하여 일본군에 협력하는자가 속출했다 [96] . 루이스 프로 이스 도 조선의 백성은 "두려움도 불안도 느끼지 않고 기꺼이 친절하게 군인들에게 음식을 전달하고 손짓으로 뭔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묻는 꼴로 일본인 쪽이 당황했다 "고 기록하고있다 [97] .
= 우리측 실록이며, 실제로 천대받던 노비들이 일본에 협력한 사례가 있습니다. 하지만 의병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고,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했다 라는 언지의 주장만 계속 나옵니다. 마치 자기들이 해방군이라도 된것 마냥 써놓았네요
일단은 잉여하지 않은 몸인지라 요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