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수를 회의한다.
나는 예수를 역사적 실존 인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설사 예수가 실존 인물이라 하더라도 성경에 기록된 그런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생애 동안 예수가 인도에서 불교를 배워 온 후 중동에서 그 지역에 맞게 논리 체계를 적절히 펼쳐나간 종교 개혁가였다고 주장하는데, 글쎄다. 과연 그럴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헌데, 아닐 수도 있다고 본다. 이 점에 관해서 나는 지금으로서는 오직 모른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백번 양보하고 또 양보해서 예수가 실제로 그 당대에 실존했다고 해도 개혁 운동을 펼쳐나가는 과정에서 당대 진리관을 신봉하던 이들에 의해 몰매를 맞고 어이 없게도 목숨을 잃었을 거라고 본다. 많은 사람이 참여할 것도 없이 소수가 내지르는 몇 번의 칼질이나 몽둥이질, 돌팔매질 만으로도 예수는 꼼짝없이 그 목숨을 고스란히 바쳐야만 했을게다. 머리가 두부처럼 터져나가고 뼈가 산산 조각나며 입 밖으로는 피를 줄줄 흘리는 그렇게 비참하고 끔찍한 죽음이었을 게다. 열정에 불타던 한 순진한 청년이 그렇게나 덧 없이 아스라져 갔을 것이다. 대중 앞에 나서서 정의를 부르짖던 한 청년은 그렇게 시뻘건 피를 흘리며 흙으로 돌아갔을 게다. 그렇게 차디 찬 주검이 되어 버렸을 게다. 그렇게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훅하니 사라져 버렸을 게다. 그리고 그 가족들은 예수의 온전한 시신 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였으리라. 고요한 정적 속에서 예수 가족들은 잇새를 비집고 터져나오려는 그 울음소리 조차 숨죽여야만 하였을 게다. 시대에 배반당한 개혁가의 말로와 그 남겨진 자들의 슬픔이란 다만, 이와 같다. 역사에서 그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견고한 기성 권력에 대항하는 일개 개인의 운명은 뻔하디 뻔한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면 그 결과는 달리 계산할 것도 없이 뻔하디 뻔하다. 당연히 계란이 일방적으로 박살이 나고 마는 것이다.
총독 빌라도? 이 대목에서는 정말 기도 차지 않는다. 로마에서 예루살렘으로 파견된 총독 빌라도가 일개 식민지인 예수를 위해 자신의 바쁜 시간을 내주었으리라고는 나는 감히 상상 조차 할 수 없다. 이 이야기는 너무나 드라마틱하고 작위적인 동시 동화적이기에 그 신뢰성에 대해 조금의 의문이나 걱정 없이 나는 단호하게 그 자체가 후대에 꾸며진 것이라 결론 내릴 수 있다.
또, 나는 성경 속 사도 바울이 겪은 <가상 현실>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본다. 성경에 기록 된 사도 바울에 관한 <가상 현실>은 조작 및 연출된 것이라 본다. 실제 <가상 현실>은 그렇게 발현하지 않을 뿐더러 <가상 현실>이 실제로 사도 바울에게 발현했다면 사도 바울은 당시 목숨이 위험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적어도 수년 에서 수십년 간은 그 후유증 등에 시달리며 끊임 없이 그 존재가 정말 신인지 회의하고 또 회의했어야만 한다. 이는 마호메트가 겪은 <가상 현실>이나 석가의 <가상 현실>, 존 내시의 <가상 현실>과도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도저히 믿을래야 믿을 수 없는 허황된 이야기일 수 밖에는 없다.
<계시>는 <깨달음>과 마찬가지로 <가상 현실>의 한 부분에 속한다. 따라서 <계시>는 <가상 현실>의 원리와 법칙 등에 적용을 받을 수 밖에는 없다. 석가의 6년 간의 극단적 고행, 마호메트의 간질병 내지 정신분열증, 존 내시의 정신 분열증 등은 <가상 현실>이 발동하는 원리와 법칙에 합당하다. 허나, 사도 바울의 경우 그 <계시>는 이 원칙에 분명히 위배된다. 또, <계시> 체험 후 사도 바울은 자신이 기존에 알던 모든 것이 혼돈에 빠지는 극단의 경험을 했어야만 한다. 자신이 기존에 진리, 상식, 법칙, 원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그 모든 것들이 그 근본 부터 뿌리채 흔들릴 때 그 누가 온전한 정신을 갖출 수 있겠는가? 세상에 그 뉘 있어 자기 정체성, 세계관, 자존감 등이 철저히 부숴지는 순간에 그저 담담할 수 있으랴. 진리를 구하고 또 구하다가 어느 순간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 한 발자국 내딛었을 때, 그 누가 극단의 공포, 두려움, 불안, 거부할 수 없는 호기심 등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헌데, 그 과정이 정말 묘하게도 빠져있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이 <신>인지 아닌지에 대해 고뇌하고 또 고뇌했어야만 한다. 헌데, 묘하게도 사도 바울은 그러하지 않았다. 마치 <계시> 그 자체가 목적인 것 처럼 사도 바울은 물 만난 물고기 마냥 행하고 있다. 이는 실로 대단히 대단히 대단히 이상하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까닭에, 사도 바울의 <계시> 체험은 철저히 사도 바울이라는 실질적 기독교 창시자에 의해 잘 꾸며지고 편집된 이야기라 생각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이미 죽은 예수라는 인물은 말이 없다. 당대의 유명인도 아니요 당대 역사에서 기록되지도 않은 무명인에 불과한 예수에 관한 이야기는 얼마든지 후대에 조작 및 날조할 수 있다. 예수 관련 역사 기록이 전무하니 그 얼마나 좋은가? 얼마든지 사도 바울의 마음 대로 이야기를 날조하거나 더하고 덜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그 자신이 <신의 계시>를 체험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그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수단으로 <계시>를 활용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선택이요 결론이다. 무명인 예수의 죽음, <신의 계시>,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통해 큰 그림 즉 <이스라엘 민족의 나아갈 방향>, <구원>, <불멸>, <확장된 통합> 등을 이루겠다.는 사도 바울의 각오와 실천, 결단 등이 만났을 때 그 무엇이 역사에 아로새겨졌다. 사도 바울은 이 정도 큰 그림을 그릴 정도로 당대에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사도 바울의 죽음을 통해 무명 청년 예수는 진리 그 자체가 되었고, 큰 그림을 기획한 사도 바울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이는 이순신, 넬슨 등이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과도 같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총감독으로 주도한 것은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 황제 콘스탄 티누스다. 이는 철학적 사유일 뿐 신앙적 사유는 아니다.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예수는 얼마든지 그를 믿고 받아들이는 각 개인에게 삶의 위로와 위안, 치유, 구심점, 삶의 거듭남(부활) 등을 선물할 수 있다고 본다.
참고: 나는 아래의 글에서 이미 선지자(발견자, 깨달은 자, 선구자, 개척자)는 선지자(발견자, 깨달은 자, 선구자, 개척자) 임을 증명할 수 있는가? 선지자(발견자, 깨달은 자, 선구자, 개척자)가 생존하기에 충분한 조건은 그 무엇인가? 등에 관해 증명하는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물론, 이 같은 사실은 아래의 문제가 내포하고 있는 <숨은 문제>이다. 나는 이 <글 전체가 그 자체로 하나의 문제가 되는 문제>를 통해 인류에게 도래할 미래에 대비하고 저마다에 걸맞는 깨달음을 얻게 되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문제를 능히 하나로 꿰뚫어 풀어내는 자가 있다면 그 혹은 그녀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공간을 초월해 철학, 종교, 인간 행동과 심리 등에 관해 충분하고도 충분하게 대성했다고 볼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