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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1월 동북아 역사재단 뉴스레터 中 '요시다 쇼인과 아베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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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Lemonade
추천 : 1/8
조회수 : 85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5/05 20:04:03


요시다 쇼인과 아베 총리



이원우 역사 재단 역사 연구실 연구 위원


고대는 차치하고라도 임진전쟁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일본을 늘 의식하며 그 대응에 부심해 왔다. 현재, 아베정권은 침략의 과거사를 부정하고 현행 일본국헌법에 위배되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합헌화하려 한다. 이러한 일본의 거침없는 행동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지난 8월 13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일본제국주의 침략사상에 영향을 미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9∼1859.11)의 묘소를 참배, 집단적 자위권 행사 등의 현안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했다고 일부 언론(13일 TV아사히)이 보도했다. 아베 총리의 요시다 쇼인 묘소참배는 직접적인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따른 한국·중국으로부터의 비난을 피함과 동시에,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각자에 대한 존경의 뜻을 표하는 심정과 자세에 변함이 없음을 보이기 위한 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아베 총리의 요시다 쇼인 묘소 참배에는 단지 ‘일본의 우경화’라는 표현으로 담아 낼 수 없는 ‘체제변혁’의 의지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요시다 쇼인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아베 총리의 일련의 행위에서 유사성을 읽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요시다 쇼인은 초슈번사(長州藩士)로 명치유신의 정신적 지도자이다. 초슈번사스기 츠네미치(杉常道)의 차남으로 태어나 숙부 요시다 다이스케(吉田大助)의 양자로 갔다. 훗날 또 다른 숙부인 다마키 분노신(玉木文之進)이 설립한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경영하여 후진을 양성했다.

그는 1853년 페리가 우라가(浦賀)에 내항했을 때에 스승인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과 함께 증기선(일명 흑선<黑船>)을 시찰하고 서양의 선진문물에 자극을 받아 외국유학을 결심하고 밀항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막부의 미일통상조약체결 반대파에 대한 탄압이 행해지던 때에 막부토벌의 표명, 로주(老中) 마나베 아키카츠(間部詮勝)암살 계획 등으로 만 29세의나이에 처형을 당했다.

쇼인의 사상으로는 천황을 유일한 지도자로 여기는 일군만민론(一君萬民論), 그 연장선상에서의 초망굴기론(草莽崛起論) 등이 있다. 쇼인의 문하생으로 쿠사카 겐즈이(久坂玄瑞),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마에바라 잇세이(前原一誠), 시나가와 야지로(品川弥二郎), 야마다 아키요시(山田顕義) 등이 있으며, 모두가막말·명치초기의 정치지도자이다. 이 때문에 29살의 약관의 나이로 처형당한 쇼인이 명치유신의 정신적 지도자로 불리는 측면이 있다. 아베 신조 총리 또한 동향(야마구치<山口>현, 구 초슈번) 출신인 것은 기연이라 할까.

한국과 관련하여 주목받는 요시다 쇼인의 대외사상은 그의 저서 「유수록(幽囚録)」,「외정론(外征論)」에 잘 나타나 있다. 요시다 쇼인의 대외사상의 핵심은, 조선을 병합하고 대만을 할양받고 남태평양으로 진출하자는 데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외팽창적 사고와 담론은 비단 쇼인만의 주장은 아니었다. 18세기에 활동한 적지 않은 학자들이 대외 침략 또는 팽창을 주장했다. 혼다 토시아키(本多利明, 1743-1821),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1769-1850), 아이자와 세이시사이(会沢正志斎, 1782-1863) 등이 그들이며 그들의 학문적 수준은 요시다 쇼인보다 높았다. 아이자와 세이시사이의 『신론(新論)』은 유신 이후의 근대 천황제 국가건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들은 현존 체제인 막번체제를 노골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요시다 쇼인의 사상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당시의 지배체제인 막부를 토멸하고 천황에 의한 통치를 주장한, 현존체제의 파괴 및 변혁사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점이 아베 신조 총리의 일련의 언행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추구 등 최근 일련의 움직임(국가안전보장수립·신방위대강수립·헌법개정·자위대법 개정 움직임 등)의 본질은 GHQ(連合国軍最高司令官総司令部)에 의해 틀이 짜여진 1947년 평화헌법체제의 파괴 및 변혁에 있으며, 또한 일본 우경화 및 군국주의의 요체는 ‘일본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 일본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하여 한국의 언론은 일본의 ‘우경화’라는 표현으로 일괄하고 있으나 좀 더 정치한 분석과 표현이 필요하다고 본다.

일본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2개의 핵심은 무사도와 존황주의이다.각각의 주군(다이묘<大名>)에게 맹목적, 병적 충성을 강요하는 무사도는 전투를, 존황주의는 황위(皇威)를 해외에 빛내는 것임으로필연적으로 대외적 팽창과 무력행사가 수반되는 논리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260여 다이묘에게 분산되어 요구되던 사무라이들의 충성이 한 명의 천황에게 집중됨으로서 강력한 무력을 구성, 행사할수 있게 된 것이다. 존황사상(文의 논리)에 무사도(武의 논리)가 결합함으로서 내부에서의 변혁이 불가능한 철옹성같은 근대 천황제 국가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문화를 거시적으로 볼 때의 특징은 일본이 주기적 으로 집단적 히스테리(일본어로 キレル<키레루>)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 일본으로서는 그러한 위험은 극히 낮다고 할 수있지만, 일본의 정치가나 지식인 등이 일본역사의 미화와 과거에 집착한다면 그러한 현상이 현실화되는 것은 기우만은 아닐 것이다.

아베 신조 총리가 현존질서의 변혁과 대외팽창을 주장한 요시다쇼인의 묘소를 참배한 것은 단순히 동향(同鄕)의 역사적 인물이기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문제는 일본의 움직임을 너무나 안이하고편의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태도에 있다고 본다.

시대가 바뀌고 사람이 바뀌어도 우리가 일본을 보는 시각의 일단은 ‘일본의 우경화’, ‘일본의 군국주의화’이다. 이러한 정형화된 대일시각을 수정하여 앞으로 우리가 취해야 할 대일접근은 세계사의 흐름과 일본, 동아시아 속의 일본, 그리고 한일관계상의 일본이라 는 3차원의 관점에서 정책을 수립, 집행하는 일일 것이다. 피상적,아마츄어적, 과거 만행규탄 일변도의 일본 대응법으로는 일본의 정치인과 일본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

미국은 가까이하기에 너무 멀리 있고, 중국은 가까이하기에 아직은 신뢰할 수 없으며, 일본은 가까이 있어도 너무나 먼 존재이다. 문제는 항상 우리 안에 있으며 그 해결책도 우리에게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첫째, 우리역사 상의 대일관계 연구의 종합화·집대성을 할 필요가 있다. 서구적인 시각이나 일본적 시각이 다분히 개재된 ‘일본학’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에 의한 ‘우리의 일본학’정립이 필요하다.

둘째, 일본문제에 관한 학문연구와 한일정치·외교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현실적으론 이 두 분야가 너무 밀접해 있고 혼잡화되어 있다.

셋째, 비전문가에 의한 감정적 일본 대응을 자제하고 전문가에 의한 장기적, 체계적인 대응을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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