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물리학은 "시간은 존재하는 것일까?"
- 엔트로피의 변화가 동일하게 진행되는 것을 우리는 시간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즉, 시간성을 변화성에 비추어 물리량이라는 도마위에 올려놓고 '시간' 이란 것의 존재자체를 규명하려한다.
물론 입증이 힘든 관념적인 것은 허구가 될 수 도 있다.
관념 속 시간이라는 것이 현재에 머물면서 인간을 옭죄는 장치가 되어버린 것일 수 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원자와 전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물질에 그치지 않는다.
단순한 물질을 또 넘어, 입력과 출력이 되면서, 계산도 되는 컴퓨터도 아니다.
알아서 학습하고 결과를 도출해내는 인공지능도 아니다.
관계를 맺는 척이 아닌, 어울림을 알고
화를 내고, 기뻐하고, 사랑을 하고,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 수 있는 존재다.
이성철학의 바탕위에 합리주의적인 사유의 결과 물질의 이해가 넓어지고, 유물론이 확대되고, 파시즘의 정점에도 도달해본 역사에서도
인간은 본연의 감정과 변화되는 구조에서 시간과 함께 존재하는 자아를 느껴왔다.
치열한 경쟁이 요구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업에 성공한 사람들도 실존과 그 과정에서 발견된 철학을 모토로 살아가고 있다.
차가운 시간의 흐름속에
오히려 따스한 인류애를 펼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를두고 숭고함이라고 부를 수 있다.
밀려오는 정해진 시스템과는 상관없이
존재와 감정들, 판단과 깨우침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존재는 인간이다.
인간이 무한히 살게된다면,
SF 소설처럼 무한히 인공지능속에 귀속되어 우주와 함께 영생한다면,
또는 밖에서는 정지한듯 보이는 블랙홀 속에 영원히 살며, 블랙홀 바깥의 변화를 지켜보는 존재가 된다면,
인간은,
에너지의 생산도, 소비도 필요없고,
순간의 가치를 교환하는 경제도 필요없고,
죽음에 대비되는 삶의 기쁨도 또한 없고,
주변의 관계나 타자와 나 사이에서 발견되는 실존도 필요 없게된다.
즉, 현실에서의,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야 하는 존재는 발견되지 않는다.
우주에 귀속된, 또는 우주와 동일시된 불멸자의 시스템이나 물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다시말해, 시간성은 한계성을 알려주며 불멸이 아닌 찰나의 존재 - 인간이라는 존재를 깨우쳐 주는 것이다.
공과, 과를 범하며, 존재를 깨달으며 어떤 우주의 덩어리로 전락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 시간성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변화량은 존재하는데 "시간"이란 관념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인가? 필요한 것인가? 라는 질문은
변화에 대응하기만 하면서 산다는 것은 기계도, 컴퓨터도, 인공지능도 데이터를 모으며 가능한 것 아닌가로 답한다면.
시간성이라는 것은 관계와 물질에 대비되어 참된 자아를 발견하면서부터 발견되는 것 -
기계적으로 냉정하게 다가오고 지나가는 시스템에 대항한,
Vital, 역동성을 가진 생명력이 포함되는 것인, 창조적인 존재로오히려 반격할 수 있다.
즉, 살아 있는 인간은 역동적인 것이다로 답변한다.
조금만이라도 움직일 수 있어도, 역동적이다.
정해진 질서에, 소모만되는 에너지에, 가만히만 있는 것이 아닌, 항거해야 하기에 또한 아픔이 동반된다.
독일어 신파 - sinpa 라는 것은 "의미", "방향" 라는 어원에서 나왔으며,
신파적인 모든 삶은 그래서 생존과 아픔과 방향을 가지는 것이다.
시스템이 작동하면 삶은 죽음을 향하기 때문이다.
생존하려면 죽음으로 향해가는 시간성에 역방향의 힘을 가해야, 즉, 에너지를 소모해야 생존이 가능하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가는대로’가 아닌, 시간에 저항을, 아픔을 느껴야 살아있는 것이다.
사랑은 아프고 찌질하며 기쁘며 살아있는 존재를 만나게 해준다. 그래서 사랑은 시간이 걸리고 존재위에서 존재한다.
(시스템화된 사랑은 허상일 뿐이다.)
우주는 기본적으로 멈춤이 없는 움직임으로 끊임없이 생명의 조건을 가혹하게 없앤다.
엔트로피는 증가하고, 에너지는 흩어지는 방향으로 지금의 우주는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물질과 시스템에는 사랑이 존재할 수 없다.
그들은 아픔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은, 적어도 우리가 살아간다는 시간은,
의미를 지니고 방향을 지닌 곳에는 생명은 어디든지 있을 수 있다.
마침내 결론은 실존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이는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이미 밝혀쟜다.)
에너지의 소모가 필요하고, 자기 존재에 대한 저항과 깨달음이 필요하다.
즉 우주의 시간은 냉정하지만, 살아있는 존재에게만 냉정한 시간을 허용해주고, 살아있는 존재는 그 냉정함을 먹고 존재의 아픔을 느끼며 성장하는 것이다.
한강 작가의 작품은 이런 생명의 실존을 증거한다.
덩어리를 파괴하며 엄정한 시스템에 대비된 삶을 이야기한다.
유한한 시간성에 대비된 역동적인 생명을 이야기한다.
굳어버린 권력, 관념화된 사회, 관념화되는 죽은 이념들에 대비된 실존을 이야기하고 있다.
에너지 소비체인 인간은, 자본이 필수조건이다.
자본주의의 첨탑에 있는 미국 실리콘벨리에서 성공한 창업가들은 오히려 창업철학 - "미션" 을 강조한다.
1인회사, 방금 창업한 사람들에게도 당신의 미션과 철학은 무엇인지 묻는다.
유럽의 창업가들은 M&A와 Exit 의 자본에 목적을 두지않고, 건강한 회사에 대한 철학을 수없이 토론한다.
한국에서 많은 사업가들은, 관념화된 멀티플레이션, 기계화된 프랜차이즈를 답습하며 대기업을 추앙하고있다.
심지어 중소기업도, 창업단계의 회사들도 대기업이 삼켜버리는 곳에서 고유한 사업을 이어나갈 수 있을까?
어떤 '방식'에 머무른 기업환경에서 창업가들이 생존할 수는 있을까? 미션이 있을까? 창업 철학이 있을까?
어떤 문제와 어떤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까?
한국에서의 자본주의는 기계화된 시스템인 것뿐일까?
한국에서 생존하는 것은 시스템화 되는 것 말고는 허용이 되지 않는 것인가?
(한국은 어쩌다 모든 분야에서, 학교에서도, 철학을 이야기하지 않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다행히
한강작가의 작품에서도,
국회위원을 잡지않고 잘못된 명령을 따르지 않는 군인에서도
이번 계엄 사태에 항거하는 시위현장에서도 개인 미디어에서도
물질에 항거하고, 권력에 항거하는 살아있는 나라임이
홀로 존재하는 권력의 최상위층과 그를 비호하는 하부 조직을 굳이 비추지 않아도
매일 매일 증명되고 있다.
다행히,
한국은 아직은 철학이 곳곳에 살아 있는 나라였다.
시스템에 항거하는 시민들은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한강씨의 수상소감에서럼 - 예술작품같은 소감이었다.
마치 무심코 누구에게나 떨어지는 비 - 우주에서는 흔한 금속의 물질이, 지구 상온 환경에서 기체의 물질이 액체로 변화되며 해당 환경의 중력에 의해 떨어지는 현상 - 를 맞으며, 피하며, 자신의 실존을 깨달은 순간처럼,
권력앞에, 부당한 폭력과 같은 시스템 앞에서 살아있는 구호를 표현하고 있다.
노랫말과 외침으로 표현되는 이러한 시민들의 언어는,
갈라진 사회를 다시 연결하고, 다시 희망을 불러오며,
세계를 집중시키며 실존으로 드러나며,
전국민이 "생의 의지"를 기반으로한 노벨상의 정신을 함께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엄정한 "시간" 이란 것은, 살아있는 존재를 깨닫게 해주며,
죽음에 대비된 삶의 가치를 부여한다.
존재로 하여금 시스템적인 것에 대항하는 소리를 내게 한다. (아래 조용한 날들 2 시에서 또 음미하여본다.)
실존은 타인과 타자와 시간성 앞에서 존재하게 되며, 언어를 통해 상호 존재를 확인한다.
변화가 없는 것은 분석이 가능하고, 시스템화가 가능하며, 관찰만 필요하며, 관계가 필요없고, 소통이 필요없으며, 독재가 가능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실존하는 것은 분석이 힘들고, 시스템에 항거하며, 그렇기에 언어를 만들고 소통하고, 관계적이면서,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조용한 날들 2, 한강>
비가 들이치기 전에
베란다 창을 닫으러 갔다
(건드리지 말아요)
움직이려고 몸을 껍데기에서 꺼내며 달팽이가 말했다
반투명하고 끈끈한
얼룩을 남기며 조금 나아갔다
조금 나아가려고 물컹한 몸을 껍데기에서
조금 나아가려고 꺼내 예리한
알루미늄 새시 사이를
찌르지 말아요
짓이기지 말아요
1초 만애
으스러뜨리지 말아요
(하지만 상관없어, 네가 찌르든 부숴뜨리든)
그렇게 조금 더
나아갔다
출처 | 한강, 노벨상 소감 / 질 들뢰즈, 베르그송 주의 / 에리히 프롬, 소유냐 삶이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