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예화 테크
고금동서를 통틀어 한 개인이 노예로 전락하는 경로는 크게 세가지가 존재한다. 첫째, 전쟁포로가 되는 경로. 둘째, 법법행위를 하여 노예화되는 경로, 셋째는 채무 등 경제적인 이유에서의 노예화 경로이다.
조선의 경우에도 세가지 경우가 모두 존재했다. 우선 고려말에서 조선전기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는 왜구와 여진족의 약탈에 시달려왔다. 이에 당연히 한반도의 왕권정부는 이들을 상대로 토벌노력을 기울여왔고, 소정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 과정에서 포획된 왜구와 여진족의 일단이 노예화된다. 하지만 왜구와 여진족 노예들은 사납기로 악명이 높았고 실제 왜구출신 노예가 주인집을 불사르고 안주인을 강간하는 사건도 벌어진 적이 있다. 따라서 조선사회에서 이러한 전쟁포로 노예들은 선호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이들의 숫자는 미미해서 조선의 노예사회의 인구통계학적 요인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즉 왜구와 여진족 출신 노예가 있었다는 것은 임진왜란 당시 명군 내의 포르투갈과 아프리카 출신 용병의 존재나 고려시대 벽란도에 아라비아 상인도 있었다 정도의 가십거리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범법노예의 수는 전쟁포로 노예 수에 비하면 많기야 하였지만, 역시 이또한 그리 중요한 인구통계학적 요인은 되지 못하였고, 권문가에 의하여 강제로 끌려가 노예화된 케이스도 더러 있었지만 이 또한 그리 중요한 요인은 아니다.
결국 조선의 노예인구비중 폭증은 경제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노예인구의 증가(채무노예와 기타 경제적 이유에서 비롯된 노예(가장에 의해 노비로 팔린 가족구성원 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 경제적인 요인
현대 한국사회의 신용불량자도 그러하지만 마찬가지로 과거의 채무자들 또한 '빈털터리화 -> 자산 대출 -> 고금리 빌드에 시달려 노예화테크를 타는 경우의 수가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빌드의 핵심인 금리의 과거 수준은 어느정도였을까?
우선 고려시대의 경우, 광학보라는 승려장학재단이 존재하였다. 이 광학보는 민간인들에게 곡식을 대주고 그로 인하여 되받는 이자수익으로 운영되었는데 (17세기 말기 이전까지 한반도에는 화폐경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자율은 연율로 빌려준 곡식의 1/3. 즉 33% 수준이었다.
당연히 이는 생산성의 증가가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봤을때 고금리였고 고려시대에도 당연히 고금리 문제로 인한 몰락농민들이 속출한다.
하지만 조선의 경우 고려보다 금리가 더 살인적인 수준이었는데, 조선정부에서는 봄(춘궁기 기간)에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추수기간)에 원 대출규모의 50%를 이자로 수령했다.
(주의 : 연 이자율이 50%가 아니라 6개월 이자율이 50%)
즉 고려에 비해 이렇다할 1인당 생산성의 증가가 없는 상태의 조선의 무지막지한 이자율이 농민의 경제적인 몰락화를 가속화시켰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 사회적인 요인
흔히 한국사에는 봉건제 기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나, 실질적으로 태종시대까지는 봉건제와 거의 다를바없이 국가가 운영되었다.
고려시대 왕권정부가 실질적인 영향력을 미쳤던 지역은 '경기도'라고 불리는 개경과 그 주변의 마지널한 지역정도였으며, 그 외에는 국토의 선들을 잇는 주요한 '점'들에 관료를 파견하여 이러한 관료들이 지방호족보다는 중앙정부를 위해 일하기를 기대하는 정도의 수준에 그쳤고 실질적으로 국토의 대부분의 지역은 각 호족의 독자적인 왕국(독자적인 경제권, 법률)에 진배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애초에 고려라는 왕조 자체가 호족연합으로 성립된 사실을 감안하면 그리 새롭지도 없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호족들은 농민들과 비단 경제적인 관계뿐만 아닌 경제외적인 관계까지 동시에 맺고 이들을 통제하여왔으며, 위에 언급한 몰락농민들 또한 호족의 영지에의 예속이라는 '쥐구멍'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굳이 노예화 테크를 타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태종을 위시한 조선전기의 군주들의 중앙집권정책으로 인하여 이러한 지방분권적인 요소가 사라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주세력이 농민을 경제외적인 관계로 통제하기가 어려워졌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지주세력화된 과거의 호족들의 봉건적 지배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등장한 대안이 노예경제라고 할 수 있다.
즉, 조선전기의 노예인구 확대는 이러한 경제적, 사회적 요인들이 맞물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내부노예제의 대명사격인 로마의 초기사회에는 넥숨(Nexum)이라 불리는 채무노동제도가 존재하였다. 이 노동제도에 따르면 채무자는 채무를 변제하기까지 법률에 의거하는 강제노동을 하여야 하였으며, 넥숨 하에 있는 시민들은 사회의 경멸을 받았다. 하지만, 이는 공식적인 노예화는 아니었고, 넥숨 하의 시민들의 경우에도 시민권은 유지하였다. 당연히 채무변제가 끝나면 기존생활로 돌아갈수 있었다. 이러한 넥숨제도 또한 집정권 가이우스에 의하여 기원전 4세기에 폐지된다. 애당초 로마는 극히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하면 로마 시민권자를 노예화시키는 경우가 없었다.
* 조선시대 노예 지위에서 해방되려면?
삽십육계 줄행랑은 비단 전쟁에서 뿐만이 아니라 전쟁외의 상황에서도 통용된다. 조선시대 노예들 중에서도 줄행랑을 통하여 인생역전을 시도하는 자가 존재하였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붙잡혔고 붙잡힌 자들은 양반에 의하여 다시는 도망치지 못하도록 신체의 일부가 훼손당해 불구화되는 경우가 일상다반사였다. (참고로 조선시대 양반계층은 자신의 노예를 죽이든 살리든 패든 곶아로 만들든 법의 제약없이 자신의 멋대로 할 수 있었다.)
또한 숙종에 의하여 상평통보가 발행되기 이전까지는 실질적으로 노예가 도망가봤자 할수 있는 일이 제약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망의 메리트가 별로 없었다. (실제로 숙종시대부터 도망노비가 급증하게 된다.) 또한 위처럼 리스크도 큰 행동이었다.
가장 리스크가 적은 해방책은 하늘과도 같은 주인님의 자비를 받는 일이었다. 이를테면 다양한 양반들의 씨를 받아 자식(=노예)을 많이 출산한 계집종의 경우 양반주인이 특별히 면천을 시켜줬던 사례가 가끔 존재한다. 그 외에도 장사나 농업등에서 탁월한 솜씨를 보여 주인에게 큰 부를 가져다 준 노예들 또한 면천을 받은 사례가 존재한다.
(물론 이러한 행위는 양반들의 자신의 경제적인 이익을 노예들에게 장려하는 인센티브 제공 행위로 보는것이 타당하다)
다만 이러한 해방책은 애시당초 불법이거나 혹은 예측불가능하고 비공식적인, 그리고 수혜적인 성격을 띄었기 때문에 명확한 한계가 존재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방책 이외에 노예가 자기 스스로 노예지위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없었을까? 예외적으로 그런 예가 존재하였다. 바로 국가에 부를 바치고 노예 지위에서 해방된 사례이다.
로마의 노예들은 주인들이 자신을 구매하는데 들인 비용(즉 몸값)보다 약간의 웃돈을 내면 쉽게 해방될 수 있었다.(해방된 노예가 남성일 경우 해방과 동시에 로마의 가부장적인 전통에 따라 자식들의 면천도 뒤따라 들어왔다.) 이처럼 로마에서는 노예가 비교적 쉽게 해방됬기 때문에 오히려 노예해방금지법이 일시적으로 도입된 적이 있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로마의 노예들의 몸값은 어느 수준이었을까?
로마의 물가는 시대별로 다르긴 하지만,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노예매매세 관련 자료를 참조하면 아우구스투스 황제 치세기간 로마의 평균 노예매매가격은 250 데나리우스 수준이었다. 1세기 말 당시 로마의 밀 1모디우스(단위 : 20kg의 약 1/3 정도)의 가격이 1.75 데나리우스였으므로 250데나리우스는 밀로 환산하면 대략 1톤 남짓이 된다. 다시 말해 노예의 해방가격도 거의 그 수준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성종시대의 사건들이다.
충청도 진천에 사는 '임복'이라는 이름의 노예가 흉년기에 쌀 2천석을 바치며 자신과 자식들의 면천을 요청하여 왔다.
성종은 흉년으로 인하여 고뇌하고 있던 상황에 임복이 쌀을 2천석이나 바치자 크게 기뻐하며 다수의 신하가 만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임복과 임복에게 딸린 네명의 자식들의 면천을 추진한다.
하지만 대사헌 이경동이 태클을 걸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한마디로 공물을 바쳤다고 포상을 하고 면천을 하면 국가의 기강이 무너진다고 부들부들한것. 성종은 말빨로 이러한 태클을 논파하긴 했지만 신하들의 반발이 워낙 거세다보니 임복과 임복의 장남만 면천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알았는지 아니면 직감에서 나온 행동인지는 몰라도 임복이 쌀을 1천석 더 바쳐서 총 3천석을 바치게 된다. 이러한 막대한 납속에 조선의 사대부들도 더이상 태클을 걸기는 어려웠는지 결국 겨우 임복과 네 자식이 모두 면천을 하게 된다.
참고자료 :
2)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ia&pos=10&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C%9E%84%EB%B3%B5
3)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ia&pos=12&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C%9E%84%EB%B3%B5
이렇게 사노 임복이 면천을 하게 되자, 이번엔 전라도 남평의 가동이라는 노예가 쌀 2천석을 납속하는 조건으로 면천을 신청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임복의 면천 건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던 성종은 가동의 면천요구를 각하한다.
참고자료 :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ia&pos=1&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C%82%AC%EB%85%B8+%EA%B0%80%EB%8F%99
쌀 2천석은 144톤에 해당되며, 3천석은 216톤에 해당된다. 다만 이렇게 설명해도 어느정도의 납속인지 감이 잡히지 않을수 있으므로 현대적인 기준으로 비교를 해보자.
조선전기 경제규모(GDP)는 대략 쌀 1천만석 수준인 것으로 추정된다. 즉 쌀 2천석은 조선 GDP의 0.02%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따라서 임복의 사례를 현대 한국에 적용하여(한국이 노예제 사회라는 가정하에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
임복이라는 노예가 청와대에 2400억원을 특별납부하며 자신과 네 자식의 면천을 요청한다. 하지만 청와대는 임복과 장남만의 면천만을 허용하기로 가닥을 잡는다. 하지만 임복이 1200억원을 추가로 납부하여 3600억원을 납부하자 결국 자신과 네 자식의 면천이 허용되었다.
(한국의 현재 경제규모 : 1200조원대)
당연히 현대든 조선시대든 저 정도 규모의 자산을 확보할 여력이 되는 인구는 극소수 뿐이며, 심지어 저 규모의 자산을 납속할 의사를 표명하였음에도 불구, 면천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례도 존재한다.
따라서 조선전기의 노예제도는 다음과 같은 한마디로 정의될 수 있다 :
즉, 조선전기의 노예제는 세계사에서 가히 그 유례를 찾을수 없는 최대규모였음과 동시에 최악의 그것과 가까운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사회의 폐쇄성과 지배계층의 타락 등의 요소가 버무려져 이러한 사회제도가 형성된 것인데, 하지만 이러한 기형적인 조선의 사회또한 결국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의하여 조선후기부터 변하게 된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