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정부는 건무 16년(기원후 40년)에 기존의 화폐제도를 회복하여 전한 무제 이후의 오수전으 주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왕망시대의 화폐제도 혼란 이후, 후한 초기에는 일정한 화폐제도가 없이 포백이나 곡물 등을 조악한 화폐와 함께 사용하였는데, 이후 다시 국가가 제정한 오수전을 통화수단으로 삼았습니다.
동탁의 난리 이후에는 이런 것들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동탁은 낙양에 진입한 이후에 진대에 주조한 동인(銅人)을 부수고 돈(錢)을 많이 주조하였으나 돈의 가치가 작아서 물가는 대량으로 팽창하였고 쌀 1석이 수십만전에 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을 주조하면 할수록 화폐의 가치는 높아지고 물가가 높아지면서 질수록 돈의 주조 또한 많아져, 마지막에는 돈이 사용되지 않고 물건으로 물건을 바꾸는 물물교환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후한의 남부 지역과 동부 지역에서는 백성들이 대량으로 소전(小錢)을 주조시켜 통화팽창이 보편적으로 이루어져 역시 그레샴의 법칙이 적용되어 돈의 유통이 저해되었습니다.
※ 출처 : 중국의 역사 「진한사」, 위진남북조사(노관), 사기 평준서,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