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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계속 쓰고 있는 웹소설
게시물ID : readers_3812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웃는열매
추천 : 1
조회수 : 75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24/07/19 16:22:04
원래 소설을 쓰고 싶어서 이것저것 끄적이는 1인입니다. 이번년도에는 연재소설을 쓰고 있어서 일주일에 한번

즐거운 마음으로 쓰고 있어요. 1907년으로 타임슬립하는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대해서 쓰고 있어요.

역사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보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기준 46화까지 나왔어요.

심심할 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공모전으로 올렸는데, 공모전은 이미 끝났으니 그냥 편한 마음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1화 최연과 최사로 

작은 섬돌에 분홍색 꽃잎이 내려앉았다. 
하늘거리는 벚꽃잎은 그대로 빨간 당혜 코에 닿았다가 사그라지듯 흩어졌다.

“어? 애기씨 기침하셨능교?”

정이는 윗전에게 올릴 세숫물을 하얀 면수건에 싸서 가지고 가고 있었다. 

 “봄볕이 따사롭네.”

말간 얼굴에 빨간 댕기를 드리운 소녀가 툇마루에 걸터앉아 버선만 신은 자신의 발을 까딱하며 놀고 있다.   

“따시기는 개뿔이. 아직 동도 다 안텄꾸마. 퍼뜩 들어가이소. 
고뿔 들어가 지 힘들게 하지 말고예.”

그러고 보니 곧 3월인데 아침, 저녁은 아직 쌀쌀하다. 애기씨라 불리는 이 소녀는 자신의 한 뼘이나 더 큰 정이의 손에 밀려 방 안으로 들어간다. 

소녀는 자신의 앞에 세숫물을 놓은 정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너 안 나가니? 아버지가 너 나가라 하지 않았어?”

며칠 전 집에 있는 모든 아랫것들을 불러서 하신 말씀을 소녀는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밖에서 사는 외거노비까지 불러들여 일 년 이상 먹고 입을만한 돈을 두둑이 주고는 이제 신분제는 폐지되었으니 나가 알아서 살라 하신 말씀이었다. 

“지가 어델 갑니꺼? 지는 애기씨 옆에서 딱 붙어가 요로코롬 안떨어질려고예.”

“으···..징그러. 다 큰 처녀가 시집은 안 가고!”

“예! 징그럽꾸로 애기씨 옆에 딱 붙어 있을껍니더.”

정이가 손가락을 구부리며 간지럼 태우는 시늉을 하자 소녀가 닿지도 않았는데 깔깔웃는다. 

소녀의 이름은 최연. 이제 막 열여덟 되는 최 진사댁 고명딸이자, 셋째딸이었다. 그러나 겉으로만 그럴 뿐,속은 30대 중반,  대한민국의 역사학자 최사로였다. 

‘하필이면······’

만약 자신이 타임머신을 타고 대한민국의 과거 중 하나를 여행할 수 있다면 어디로 가고 싶은가? 삼국 시대? 고려 시대? 아니면 조선 시대?

그럼 다시 질문을 바꿔서. 피하고 싶은 과거 여행은 어디일까? 전쟁은 당연히 피하면 좋겠고. 피바람이 부는 사화들도 피하고 싶겠지.그런데 가장 피하고 싶은 시기는 당연히 일제강점기가 아닐까?

최사로는 1907년 2월. 최준후의 고명딸 최연의 방에서 깨어났다. 2024년 봄, 땅속의 빛나는 무언갈 본 직후였다. 

삼국시대 때가 분명해 보이는 세밀한 세공의 금귀걸이 한 짝. 지금 최사로의 목에 길게 걸려있는 장신구였다. 

최사로는 정이가 나간 후, 최연의 방에 우두커니 앉아 그때 그 일에 대해 생각했다. 

최사로는 경신 대학교 근대유물 교수이자, 문화재위원회의 일원이었다. 

역사상 최연소 교수이자, 문화재를 관리하고 보호하는 자문위원이기도 했다. 

***

“최사로 교수님께서는 청사 1동 906호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알립니다. 최사로 교수님께서는 청사 1동 906호로 속히 오시길 바랍니다.”

사로는 초조한 걸음으로 청사를 향해 움직였다. 땀으로 범벅된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모아 귀 뒤로 쓸어 넘기면서 그녀는 긴장한 입술을 사정없이 깨물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런 거 아니죠?”

문을 열자마자 그녀 앞에 보인 건, 묘하게 히죽이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문화재청의 위원들이었다.
 
“청장님, 아버지가 그런 거 아니죠?”
 
사로는 그들을 애써 무시한 채 아버지의 막역한 친구이자 문화재청 청장인 조용준 청장에게 재차 물었으나 청장은 돌부처처럼 눈을 감고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앉아라.”

“아버지는 어떻게 되시는 거예요?”

“앉아!”

서릿발보다 더 차가운 싸늘한 음성에 주위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최용훈 관장님은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제11조에 따라 문화 보호구역을 청탁을 받고 해지하셨음으로 위원회에서 해촉되실 겁니다.”

“아울러 박물관장직도 내놓으셔야 할 겁니다.”

문화재청의 위원 놈들이 먹잇감을 앞에 놓은 승냥이들처럼 히죽 인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어제만 해도 아버지와 즐겁게 식사했는데.

사로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어 나오는 피의 비릿한 맛을 느끼면서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요?”

조용준청장은 비통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입술은 꾹 닫은 채 고개를 흔들었다. 

“연락이 안 돼.”

그때 창문에서 검은 물체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곧이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꺄아!”

사로는 그 순간 벌떡 일어나 창밖으로 길게 몸을 내밀었다. 검은색 그림자의 환영이 바닥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곧, 뒤에서 승냥이떼같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삼키려 드는 그림자에 그녀는 기절했다. 의식이 멀어지면서 그녀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방금 떨어진 것이 아버지가 아니길.

장례는 조촐했다. 

뇌물을 받은 공무원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국립중앙박물관의 관장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 

대통령과 몇몇 국회의원들의 이름이 박힌 화환들이 줄지어있었지만 희한하게 그 누구도 오지 않는 적막감만이 그곳에 내려앉았다. 

어머니는 5살 때 돌아가시고, 최용훈 관장의 외동딸이었던 그녀는 몇몇 친하지 않은 친척들 틈에서 웅크린 채 자기 몸을 혼자 감싸 안았다. 

‘아버지가 뇌물을 받았다고? 그럴 리 없어.’

아버지는 자신이 아는 가장 청렴하고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너무 대쪽 같아서 정치 싸움하는 곳에는 어울리지도 못했다. 

능력이 있었지만, 서울대 총장도 떨어지고, 장관도 다른 사람이 되고, 결국 정치와 거리가 먼 국립중앙박물관의 관장이 된 사람이다. 

‘아버지가 문화재 보호구역을 해지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 대체 왜?’

사로는 그 구역에 가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터져 나오는 눈물 사이로 아버지와의 추억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아버지는 대체 왜 스스로 그렇게 가셔야 했을까?  

 슬픔이 다시 삐져나오려고 해 그녀는 다시금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그녀는 억지로 막았다. 

자신의 슬픔보다는 아버지 죽음의 비밀을 아는 게 더 급선무였다. 

'일단 이 곳에 가봐야 한다.'

보고서를 보면 그 땅은 2009년 신라 시대의 귀면 무늬 문고리가 나온 다음,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곳이었다. 

누가 봐도 문화재가 더 나올 것 같은 신라 시대의 집터가 있는 그런 땅 말이다. 

발굴 작업이 다 안 끝났는지, 바리케이드로 사람의 출입을 막아놓은 상태였다. 넓은 임야로 된 그 앞에는 키 큰 아파트들이 줄지어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로는 도착하자마자 무언가 잘못되어있음을 알았다. 보통 문화재보호구역은 지표조사를 위한 팻말과 바리케이드가 있길 마련인데, 팻말이 누군가 고의로 그런 것처럼 한구석에 패대기쳐져 있었다. 

또한 지표 조사원이 아닌 누군가가 땅을 게걸스럽게 파헤쳐놓았다. 들쑥날쑥한 땅의 구멍들은 무엇을 찾기 위함인지 흡사 두더지들 땅굴처럼 보였다

“여기 조사담당자가 누구지?”

참으로 이상한 보고서이다. 보고서에는 땅의 소유자와 조사담당자가 적혀있기 마련인데 이 보고서에는 담당자 미정이라고 되어있다. 

“대체 이 땅은······”

소유자는 <밝힐 수 없음>, 전화번호는 나와 있지 않았다. 사실 문화재보호구역의 땅의 주인은 원래 억울한 법이다. 

그렇다면 이 보호구역 해지는 땅의 주인에게 더할 나위 없는 매력적인 기회일 텐데, 왜 <밝힐 수 없음>으로 되어있을까? 보상을 톡톡히 받을 텐데?

‘이 사람을 찾아야 해.’

사로는 망가져 버린 출입 금지 팻말을 넘어들어가 막무가내로 파헤쳐 놓은 땅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조심히 땅을 고른 게 아니라서 여러 가지 돌들이 옛 집터였을 곳의 땅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때 사로는 땅속에서 햇빛에 비친 투명 돌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것을 본 것 같았다.

“저게 뭐지?”

가까이 다가가서 크게 파헤쳐진 돌 틈을 들여다보자 갑자기 그 빛은 사로를 휩싸고, 땅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지금 여기 1907년에 최연으로 있게 된 것이다.

처음엔 1907년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사로는 매우 놀랐다. 다행히 자신이 들어간 몸인 최연은 꽤 부잣집 딸이었다. 

‘일단 잘 걱정, 입을 걱정은 덜었네.’

이 시기의 평민의 삶은 처참했다. 1894년 이전부터 농민들은 먹지 못했고, 하다못해 팔 걷어붙이고 나선 민란으로 조선은 크게 흔들렸으며, 이 민란을 진압하고자 어리석은 고종은 청국에 도움을 처하였다. 

청군이 조선에 오자 일본도 톈진 조약을 근거로 군대를 파견하였으므로 조선 정부의 무능함에 백성들은 더는 고혈을 짜도 짜도 나오지 않은 걸레 짝처럼 되어 비참한 삶을 살았다

그런 시기에 양반댁 규수 삶은 평민보다는 그래도 이할 정도 나았으리라. 

그런데도 이 집은 경주 아니, 조선에서 제일가는 부자였으니 사로는 생각을 정리하는 며칠간 잘 먹고 잘 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마음이 정리된 최근에서야 든 생각이고, 사실 사로는 최연으로 아침에 깨어난 날, 자신을 깨우러 왔던 정이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누······누구세요?”

“애기씨예. 지 놀리지 마이소. 이카면 으르신한테 말할 수밖에 읎어예.”

“뭘 말하는데요?”

“아따 마 몰라서 묻는교? 애기씨가 차윤아가씨랑 꽃놀이하러 간다고 케놓고 딴데로 내빼던 거. 내 참말로 말해도 되겠씹니꺼?”

뭔지 몰라도 정이가 말하면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임을 직감한 사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흔들자마자 원래 최연으로 있었던 기억들이 자연스럽게 사로에게 전해졌다. 

앞에 있는 여인은 정이, 최연의 몸종이며, 유모의 딸이다. 이곳은 경주 교동이며 아버지 함자는 최준후, 어머니 함자는 류석윤,  오빠는 둘이 있으며, 친한 동무는 설차윤이다.

여자도 글을 배워야 한다고 늘 말해왔던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사서오경은 열다섯에 떼었고, 지금은 혼처를 구하기 전에 집에서 아녀자가 지켜야 할 덕목들을 어머니께 배우는 중이었다. 

그런데 하필, 지금이 1907년이라는 것이다. 1905년도에 을사늑약을 한 일본은 빠르게 조선을 죄어오고 있었다. 

시대가 시대인만큼 혼처 자리나 알아보며, 편하게 놀고먹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결국, 아버지의 죽음의 의문점은 잠시 미뤄놓은 채, 사로는 일단 자신이 떨어진 이 세상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아버지 최준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조선의 제일가는 부자이자, 독립운동가. 현대 사람 중에 최부잣집을 한 번도 안 들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장 유명한 말도 있지 않은가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기품 있는 집안. 그 집안의 고명딸이라니!

사로는 역사학자이기도 했지만, 자신도 경주 최씨로서(비록 분파지만) 자신이 최씨라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나와 직계는 아니지만, 이곳은 명실상부 양반 중의 양반이지.’

최씨 집안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아버지 최준후때 가세가 크게 기울게 된다. 

그러므로 이 으리으리한 저택도 머지않아 주인이 곧 바뀔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사로는 조금 침울해졌다. 

‘미래를 미리 아는 것도 슬프구나. 하지만 흘러가게 놔둬야겠지. 내가 잘못 날갯짓하면 현대의 대한민국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사로는 일단 몸을 최대한 사리며,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지켜보기로 했다. 

***
2화 신선이랑

“애기씨예! 휘 도련님과 이랑 도련님 오셨씸더.”

 최 진사댁 장남 휘는 스물세 살로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이름나 열한 살이 되기 전에 사서오경을 다 읽었으나,<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않는다>라는 가풍에 따라 일찌감치 진사에 오르고는 더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은 채 아버지를 도와 집안의 가업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를 닮아 성품이 온화하여 몇십만 석 이상이 되는 논밭 소작농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이였으나, 사로가 보기에 아직은 앳된 얼굴의 잘생긴 청년일 뿐이었다. 

‘오라버니라고 하지만······완전 애기잖아. 으으으······ 저 어린애에게 오라버니라고 말하기 항마력 돋는다.’

휘는 사로가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이미 어른의 상징인 상투를 틀고 아버지보다 큰 키와 넓은 어깨에 걸맞은 긴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어··· 오셨다고? 내 나갈게.”

사로는 차마 오라비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주어를 생략한 채 주섬주섬 비단 치마를 끌어 올려 방안에서 나갈 채비를 했다. 

“웬일입니꺼? 애기씨? 마중을 다 나간다 카시고. 이랑 도련님 싫어하는 거 아입니꺼? 도련님만 보면 고양이 본 쥐마냥 내빼 삐면서.”

“내······내가 언제?”

“아따 마. 단발도령 싫다고 휘도련님도 멀리함서.오리발이시네.”

방 밖으로 나와보니 정이가 입을 가리고 쿡쿡 웃고 있었다. 

최진사 집에는 과객들이 항상 머물렀다. 이랑은 휘가 몇 년간 사귄 친우로 상투 대신 짧게 머리를 자르고 깔끔한 슈트를 입은 남자였다. 

‘역시, 남자는 머릿발 인가?’

사로는 이랑을 처음 보고 매우 놀라면서 자연스럽게 얼굴이 붉어졌는데, 그건 이랑이 굉장한 미남자였기 때문이다. 

큰 키에 다부진 어깨에 달린 조그마한 얼굴은 누가 봐도 조각이었다. 

그러나 사로가 오기 전 연이는 이 짧은 머리의 청년이 맘에 안 들었던 모양이었다. 

조선 정부가 단발령을 시행한 건 1895년 오래전이었으나 고집 세고, 보수적인 최연의 눈에는 짧은 머리의 남자가 성난 외뚝이처럼 보일 뿐이었다. 

“연아. 나와 있었구나! 요즘 통 얼굴을 못봤구나. 혹시 방안에 틀어박혀 허송세월만 보내는 거 아니겠지?”

오라비 휘가 밝게 웃으며 연의 어깨를 감쌌다. 자상한 오라비 휘는 귀여운 여동생이 좋아서 한 행동이었겠지만, 현실에서 외동딸이었던 사로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사로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자연스럽게 어깨를 돌려 빠져나와 버렸다.

“이제 다 컸다고 이 오라비한테 오지도 않는구나. 하하”

“이제 다 큰 처녀이니, 농은 그만하시게.”

이랑이 말하자, 휘는 더 크게 웃으며 이랑과 함께 사랑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버지께 인사하기 위함이었다. 

***

큰 그림자가 월정교에 머물렀다가 달을 가리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길을 걷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달이 어두워졌다가 밝아지자, 달님이 마른 세수하여 시꺼멓던 구름이 벗겨진 거라 여겼다. 

그림자는 구름에 숨었다가 낭산 아래 작은 절, 토봉사를 지나 큰 기와집에 내려앉았다. 

대문이 바람결에 덜컹 활짝 열리고, 한 남자가 그림자 사이에서 홀연히 나타나 집안으로 들어서는데 집안에서는 누구 하나 이상히 여기는 자가 없었다. 

조그마한 토끼 같은 눈을 지닌 여종이 마당을 쓸다 말고 투덜대며 문을 닫았을 뿐이다.

“다녀오셨습니까?”

눈이 부리부리한 집사가 남자가 들어오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가배 좀 다오.”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문 후, 머리에 쓴 중절모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 순간 바닥과 마주할 것 같던 모자가 그대로 비행접시처럼 날아 옷걸이에 걸렸다.

집사가 뜨거운 차를 가져오자 다람쥐 귀를 가진 작은 몸집의 사내종이 나와 작은 부채를 잔에 연신 부쳐대었다.

남자의 조각 같은 얼굴이 검은 커피 물에 살짝 비쳤다가 어그러졌다. 남자가 커피잔을 흔든 탓이다.

“신선님, 친우 집에 다녀오신 후 표정이 밝지 않으십니다.”

집사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남자는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넘기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래 보이느냐?”

 이 남자는 이랑이라고 불리는 경주 낭산의 신선이었다. 낭(狼)산은 능선이 이리와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이름에 걸맞게 낭산 선인의 눈빛은 이리와 같이 번쩍였으며, 누구라도 이 눈을 보면 두려워 몸을 떨었다.

자신의 눈을 보고 떨지 않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경주 최가였다. 

경주 최씨들은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친우로 여겨주었다. 

이랑은 그들의 후손 대대로 장남이 스무 살을 넘기면 아버지의 기억은 지우고 장남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며, 그들 일가를 보살펴 주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집사가 이랑의 표정이 좋지 않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말을 걸었다. 

이랑은 최준후와 최휘의 대화를 곱씹어 보고 있었다. 

사랑채에 들어가자마자, 최준후는 최휘와 이랑을 보고는 대뜸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땅을 팔아야겠다.”

“얼마나 팔려고 하십니까?”

장남 최휘가 묻자 최준후는 담담하게 “ 2만 마지기”라 답하였다. 

2만 마지기는 경주땅의 황남동 정도의 땅에 해당하는 땅이었다.

최휘가 기함하여 “그렇게 많이 팔려 하십니까? 판 돈은 어찌하시려고요?” 하고 물었다. 

“ 최안이 대동청년당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들을 도울 것이다.”

“아우를 돕는다는 말씀이십니까? 대체 무슨 조직입니까?”

“일본을 대항할 비밀 결사 조직이다. 도울 것이냐?”

“제가 도울지 말지 결정하는 위치는 아닌 것 같습니다.”

최휘는 최대한 겸손하게 말했으나, 최준후는 그 말에 심기가 불편한지 앞에 있는 술로 목을 축이며 크흠 하는 소리를 내었다.

“도울지 말지는 네가 스스로 결정해야 할 것이다. 지금 시기 일본의 눈 밖에 난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터. 너의 목숨은 네가 결정해야 하지 아니하냐?”

“득친순친방가위인위자(得親順親方可爲人爲子:자식으로서, 부모의 허락을 얻고 부모의 뜻을 따라야 비로소 사람이고, 아들이다)라 하였습니다. 저는 언제까지고 아버님을 따를 것입니다.”

최준후는 눈을 지그시 감고 아들의 말을 받았다. 아들이 자신과 진심으로 뜻을 같이해준다고 하니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대는 어떠한가?”

최준후는 이랑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아들의 친우로서 만난 것은 몇 해 안 되었지만, 이상하게 믿을만한 자라 여겼다.

그래서 이랑이 있는 자리에서 이런 중대한 담화를 나누었던 것이다. 

“그래서 뭐라 답하셨습니까?”

눈이 큼지막한 집사가 회상 중이던 이랑에게 물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집사에게 전달된 모양이다. 

이랑은 관자놀이를 긴 손가락 두 개로 누르며 부드러운 동작으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내가 거기 있었다는 기억을 지워 버렸네.”

“왜 그리하셨습니까?”

집사가 들고 있는 찻잔 뚜껑을 떨어뜨렸다. 이랑은 그것을 못 본 체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신선으로 태어나 이곳에 있은 지가 이천 년이 넘었네. 그동안 많은 전쟁이 있었지.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가 세워졌을 때도 나는 그 어떤 것도 관여하지 않았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졌을 때도 마찬가지네. 비록 이 세상이 망한다고 해도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는 게 신선들의 규칙일세.”

“그렇습니까? 하지만 최가는 다르지 않습니까? 신라인 최치원에게 후손들을 지켜주겠다 약조하셨던 걸로 아는데요?”

집사는 그 말과 함께 울퉁불퉁한 근육질 팔을 들어 뜨거운 물을 잔에 붓고, 다시 커피가루 두 스푼과 각설탕 두 개를 넣었다.  

그러는 동안 이랑은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 

890년 초가을 새벽, 최치원이라는 자가 전국 각지로 방랑을 가다, 잠시 랑이 누워있는 낭산의 바위 부근에 걸터앉았다. 

최치원은 그 자리에서 하늘 보며 시를 읊었다. 

[물시계의 물방울 
아직 떨어지건만
은하수는 벌써 기울었네
어렴풋이 산천은 점점 변해 가고
갖가지 물상(物象)이 열리려 하네
높고 낮은 희미한 경치가 눈에 보이며
구름 사이 궁전을 알아보겠네]   
-최치원 새벽 中-

이랑은 이 아름다운 글귀를 처음 들었으므로 퍽 감동하여 최치원 앞에 현신했다. 

그리고는 시를 더 들려주면 그의 후손을 복되게 하겠다고 약조했던 것이다. 

최치원은 웃으며 이랑에게 그 자리에서 시를 더 들려주었는데 그 시구에 이랑은 감동하여

“내 자네의 자손을 복되게 할 뿐만 아니라 가장 친한 친우가 되어 옆에 있어주겠네. 자네 자손만큼은 항상 내 보호 안에 있을것이야.”

하고 굳건한 약조를 하였다. 

[상쾌한 새벽이 되니 
내 영혼 푸른 하늘처럼 맑아라
온 세상에 밝은 해 비치자
어둠이 바위 골짜기로 사라지네
천 개의 문과 만 개의 창이 비로소 열리고
넓은 천지가 활짝 펼쳐지누나]
-최치원 새벽 中-

이랑은 아직 그 시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이 최가와의 약조의 대가였다. 

“나는 그의 후손을 복되게 하겠다고 했지, 인간사에 관여하겠다고 하지는 않았네.”

이랑은 잠시 생각하다 잔을 내려놓고, 끙 소리를 내며 앉아있던 소파에서 무겁게 일어났다. 

머리가 복잡했던 탓이다. 

집사는 이랑이 자신이 다시 타 준 커피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일어나자 울상이 되었다. 다람쥐 귀를 닮은 선인은  커피세트를 들고 그를 쫄래쫄래 따라 부엌으로 사라졌다.

출처 https://novel.munpia.com/414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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