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회는 삼국시대 위(魏)의 대신 종요의 아들로 일찍이 어린나이로 조정에 출사할 만큼 탁월한 재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리고 등애와 더불어 촉(蜀)을 정벌한 일로도 유명하고요. 그러나 성격은 좀 개차반이었는지 그가 남긴 일화들을 보면 다소 뒤끝있는 성격임을 알 수있는데 그 중 하나가 혜강과 얽힌 일이었습니다.
혜강은 위진시대 활약한 사상가이자 정치가로, 흔히 죽림칠현이라 부르는 청담파 무리 멤버 중 하나로 당대의 저명한 문인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중국의 노장사상 파트를 배울때 한번쯤은 죽림칠현에 대해서 들어보셨을텐데요, 노장사상이 풍기는 이미지가 탈속적이어서 그런지 이 죽림칠현이란 무리도 세상과는 일체 연을 끊고 산속에서 은거하며 청산별곡이나 읊던 양반들로 이미지가 비추어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죽림칠현 일곱 명 중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이는 아니꼬운 인간을 보면 눈깔 뒤집기로 유명하여 백안시 고사를 남긴 완적이란 인물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관직살이를 한 경력이 있습니다. 즉 제아무리 탈속적인 것을 추구하는 청담파들도 정치와는 아예 담쌓고 살았더라는 것은 아닙니다.
혜강 역시 마찬가지로 위나라에 출사하여 고위관직을 역임했고 거기다 조조의 손녀와 혼인하여 위나라 황실의 부마가 되는 영예까지 누렸었는데요, 혜강이 당대의 저명한 문인으로 존경받던데에는 단순 그의 화려한 주변환경 때문만이 아니라 혜강 본인의 성품과 됨됨이로 명망을 얻고 있었다고 보는게 맞을겁니다.
혜강이 속한 죽림칠현 멤버 중 하나이자 훗날 진(晉)의 고위대신이 되어 사람을 보는 안목이 탁월했다는 산도라는 사람은 일찍이 혜강을 두고 '홀로 우뚝 솟은 소나무 같다' 고 평했을 만큼 혜강은 강직하고 고고한 성품의 소유자였고 또한 그가 관직살이 중에 명사의 신분 임에도 귀천을 가리지 않고 백성들과 어울려 놀면서 대장간에서 몸소 일을 했다는 일화들로도 미루어 보건대 상당히 자유분방하고 호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혜강인지라 곧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우러름 사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종회도 당시 혜강을 존경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 종회가 한번은 책 한권을 썼는데 혜강이 자신이 쓴 책에 주석을 달아주었으면 하던 종회는 혜강을 찾아가 이를 부탁하려 했습니다. 당대의 문인이 자신의 책에 글을 남겨준다면 그만한 영광이 없겠거니 했던 것이겠지요. 그러나 막상 찾아가니 차마 혜강에게 보여줄 자신이 없던 종회는 수줍게도 몰래 혜강의 집 대문 밑으로 책을 들이밀어넣고 왔는데요,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혜강으로부터는 별다른 기별이 없었고 종회는 크게 실망합니다.
그러나 짝사랑에게 매몰차게 바람맞은 종회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혜강에게 구애(?)를 합니다. 위에서 서술했듯 하루는 혜강이 대장간에서 몸소 망치를 들고 쇠를 두들기며 일을 하고 있는데 종회가 찾아옵니다. 과거의 수줍은 흑역사를 청산하려는 듯 이번에는 거창하게 거느리는 무리도 대다수 이끌고 왔었는데 이는 혜강은 물론 뭇대중에게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니 당대의 명사인 당신과 교분을 맺고 싶다 뭐 이런 식이었죠.
하지만 혜강은 종회가 대장간 문턱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눈길 한번 안주고 연신 일만 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밑에서 후술하겠습니다만 혜강은 예전부터 종회를 싫어했습니다. 종회가 굳이 거느리는 무리를 이끌고 찾아온 의도도 눈치챘을 뿐더러 평소 종회에 대해 안좋게 생각하던 혜강이었기에 아예 무시해버렸던 것인데, 종회도 개무시를 당해 망신만 당하자 되돌아가려는 찰나에 혜강이 그런 종회에게 한마디 던졌다고 합니다.
"무엇을 듣고와서 무엇을 보고 가느냐?" 라는 혜강의 질문에 종회는 "들을 것을 듣고 와서 볼 것을 보고 갑니다." 라 답했는데요, 이는 종회도 혜강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무슨 이유로 그리 행동했는지를 알아차렸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럼 혜강이 왜 종회를 그리 싫어했느냐 하니, 한마디로 말하자면 결국은 정치적인 대립 탓이었습니다. 아실분들은 아시겠지만 종회는 쿠데타로 위나라의 정권을 틀어잡은 사마씨(司馬氏) 일족 측의 심복이었습니다. 이 당시 사마씨의 집권자는 사마소로, 쿠데타 이후 위나라 조정을 사마씨 측 인사로 채워넣고 신료들을 자기 측으로 회유하는데에 한창이었습니다.
그 중 혜강은 물론 죽림칠현 역시 당시 많은 이들의 존경과 우러름을 받고 있었기에 민심의 회유를 위해서라도 죽림칠현은 필히 사마씨 정권의 협력자로 만들어야 했고 이 과정에서 혜강을 비롯한 죽림칠현에 대한 회유작업이 시행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종회가 개인적으로 혜강을 사모(?)해서 그런 것이기도 합니다만 말이죠. 하지만 혜강을 비롯한 몇몇 이들은 이를 거부했고 더구나 강직하기로 소문난 혜강의 성격 상으로 봐도 쿠데타로 나라의 정권을 탈취한 사마씨들을 곱게 봤을리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사마씨가 정권을 잡은 이후로 혜강은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를 했었던 것인데..
그러던 중 혜강은 일명 '여안사건' 이란 일에 연루되어 무고한 죄를 뒤집어 쓰게 되는데, 여기서 여안사건까지 들먹이자면 너무 길어질까 싶어 생략하겠습니다. 그냥 무고한 친구를 두둔하며 남긴 말이 사마씨를 다 족치고 싶다 식으로 해석되어 빚어진 오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아무튼, 뜻하지 않은 사태로 인하여 졸지에 반역죄인으로 몰려 옥에 갇히게 된 혜강을 두고 사마소는 혜강을 죽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에 빠집니다. 그동안 수차례에 걸친 제스처와 구애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거절해온 혜강의 행적이 아니꼬워서라도 죽이고는 싶었겠지만 그렇다고 그를 죽이자니 평소 혜강이 만인의 우러름을 받는 거물인사라는 점에서 뒤따를 후환이 두렵기도 했던 것인데요. 고민하는 사마소에게 두번이나 바람맞은 종회가 부추기기 시작합니다.
두번이나 바람맞은 사건으로 이젠 혜강에 대해 앙심을 품게 된 종회는 한때 혜강을 사모하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고 "혜강은 와룡과 같은 존재이니 그를 살려두었다가는 뒷날의 후환이 될 것입니다." 라며 혜강을 죽일 것을 부추기고 있었던 것이죠. 종회의 부추김에 사마소도 이 애물단지같은 존재인 혜강을 죽이기로 마음 먹고 처형을 지시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결국은 혜강의 강직한 성품이 화를 불렀다라고 볼 수있는 점인데요. 위에서 언급한 산도도 혜강을 두고 '올곧기가 마치 소나무와 같다.' 라고 말은 했습니다만 덧붙여서 말하기를 '다만 재능은 있으나 멀리보는 식견은 없으니 결국은 화를 부를까 두렵다.' 라고 평한 바 있습니다. 즉 현실과의 적절한 타협도 필요하다라고 역설한 것인데, 아닌게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죽림칠현 멤버인 완적도 사마소의 거듭된 출사협박에 못이겨 잠시나마 조정으로 나아갔고 다른 멤버들도 위정자들의 그러한 협박과 요구를 받고 응했습니다. 특히 산도는 혜강에게 여러차례에 걸쳐서 조정에 재출사 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혜강이 거듭 출사요구를 거절하자 이미 사마씨 정권에 몸담고 있으며 자신들에 따르지 않는 자는 모조리 숙청해버리는 사마씨 정권의 잔혹함을 잘 알고 있기에 이로 인해 뒤따를 후환이 훤히 보이는 산도가 다 애가 말라 설득하고 권유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서 혜강은 종회를 바람맞힌 것에 이어 사마씨 정권의 눈 밖에 나게 되는 두번째 실수를 저지릅니다. 바로 산도와 절교를 선언했던 일입니다.
혜강 입장에서는 계속해서 관직에 나아가라고 권하는 산도가 무슨 사마씨 정권의 개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함께 놀던 친구가 이제는 사마씨의 신하가 되어 자신에게도 출사를 권하고 있으니 너도 결국은 권력의 개가 되었구나 싶어 이거 안되겠다 싶었던 것이지요. 이는 결국 사마씨 정권과는 선을 긋는 단교선언이나 다름없었는 발언이었고 여기서 사마소는 혜강에 대해 앙심을 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다 종회와 얽힌 일들이 더해져 결국은 산도의 말대로 화를 불러왔던 것이죠.
아무튼 이러한 연유로 혜강에 대한 처우로 결국 처형이 결정되었고 처형당일 날 형장에는 태학생 3천여명이 몰려 사면을 청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혜강은 자신의 사면을 위해 모인 많은 이들 앞에서 취미로 연주하던 거문고를 가져와서 평소 즐겨 연주하는 '광릉산(廣陵散)' 이란 곡을 연주하고 처형당했다고 합니다. 여담이지만 혜강의 아들인 혜소는 훗날 사마씨가 세운 진(晉)에 출사합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나라라서 이를 갈았을 법도 합니다만 타협했는 모양입니다.
종회의 뒤끝도 뒤끝이지만 결정적으로 본인의 성격 탓에 운명을 달리한 혜강의 이야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