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온의 아들인 환현(桓玄)은 아버지 시절부터 이어져 온 막강한 서부군단의 힘을 바탕으로 동진을 일시적으로 멸망시키고 초(楚) 왕조를 세웠지만 환현의 초왕조는 손은의 난 등을 진압하면서 명성을 높이고 있던 유유와(훗날 남조 유송의 건국자) 환현의 서부군단에 불만을 품은 북부군단의 힘으로 3개월만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루아침에 동진의 최고 권력자로 등극한 유유는 남연(南燕)을 멸망시키고 손은의 잔당들이 일으킨 수상노동자의 반란들도 진압하여 군사적으로도 그 명성을 공고히 합니다.
이윽고 북부군단의 힘으로 사실상 동진의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유유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과 함께 환현 토벌을 위해 거병하고 형주도독으로써 서부군단을 담당하고 있던 유의를 제거하고 그 뒤를 이어 형주도독의 자리에 오른 동진황실의 일족인 사마휴지도 제거합니다(사마휴지는 유유의 공격으로 후진국 요흥의 밑으로 망명합니다.). 이로써 국내에서 자신에 반대할만한 세력을 제거해 버린 유유는 사실상 동진의 절대 권력자로 군림합니다.
막강한 권력을 지닌 유유는 그 권력을 이용하여 획기적인 정책을 실행에 옮깁니다.
그 정책은 「토단(土斷)」이라는 것으로 이 정책은 영가의 난 이전부터 강남에 살고 있던 토착민들과 그리고 영가의 난 이후 강남에 이주하게 된 이주민들을 구별하지 않고 세역을 과하자는 정책이었습니다. 사실 이 정책은 유유가 권력을 잡기 이전부터 논의가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서진 말에 발발한 팔왕의 난, 영가의 난 등 대란으로 인해 황하지역에서 강남지역으로 남하한 이주민들은 모두 자신이 예전에 살던 고향에 본적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단순히 명목상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러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북방 이주민들은 그들이 중원을 회복하여 각자 본적지로 돌아갈 때까지 세금 납부와 요역 복무 등을 완전히 면제 받았습니다.
※ 북방 이주민들이 거주한 지역은 교군(僑郡)*교현(僑縣)이라 불렸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 역시 토지를 소유하고 산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명 백적(白籍)이라는 특별한 호적에 등록되어 세역이 부과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백적에 등록된 북방 이주민들의 수는 파악조차 되지 못했고 그들은 국가재정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국가재정에 큰 피해를 준다는 것을 유유 이전의 동진의 정치가들은 잘 알고 있었지만 동진이라는 왕조 자체가 망명정권이었고 이 정권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정치가들 또한 망명귀족들이었습니다. 망명 귀족들의 정치적 기반은 북방 이주민들이었고 만약 북방 이주민들에게 주어진 위와 같은 특권을 없앴다면 동진 정권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시간이 다 해결해주었습니다. 수십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조정의 귀족부터 백성들까지도 완전히 강남에 뿌리를 내려 그들은 강남의 토착민들과 이제 다를게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처음의 동진 정부의 모토였던 중원 회복이라는 것도 이미 희미해져 있었습니다.
충분히 토단을 실행해도 좋은 상황이었지만 망명귀족들은 미적거리며 실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토단을 실시한다는 것 즉 북방 이주민들의 호적과 토지를 파악하여 국가 세입의 원천으로 삼겠다는 것은 엄청난 토지와 백성들을 장원의 이름으로 가지고 있는 귀족들에게는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었습니다.
※ 교군과 교현에 거주하는 군민들이나 현민들은 국가의 고정적인 부역 부담은 없었지만 세력가들에 흠수되어 그들에게 사역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유유 이전에 이러한 토단은 여러 번 시행되었습니다. 함화(咸和) 연간 (성제成帝. 326-334)에도 토단이 시행됬었고, 서부군단장으로써 동진의 권력을 장악한 환온도 토단을 시행했었습니다. 환온이 시행한 이러한 토단을 일명「경술(庚戌)의 토단 : 애제(哀帝) 흥녕(興寧) 2년 (364)」이라고 불렸는데 이것은 곧 흐지부지 되고 말았습니다. 환온은 사실상 최고 권력자였지만 그는 아직 조정의 귀족들에 대해 충분한 위엄이 서있지 않았습니다. 환온 역시 선배격인 사안(謝安) 등을 만나면 상당한 경의를 표하고 조심해서 이야기를 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흔들리는 토단은 시행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토단 실행에 필요성이었습니다.
유유는 이러한 환온이 실시했던 토단 등과 자신이 지닌 엄청난 권력을 이용하여 토단을 실시했습니다. 의희(義熙) 9년(413) 유유가 시행한 토단법으로 북방 이주민들이 등록되었던 백적인 폐지되고 북방 이주민들 역시 기존의 강남 토착민들과 마찬가지로 황적(黃籍)에 등록되어 현재 거주하는 지역의 호적에 등록되어 정부가 부과하는 세금을 납부하고 요역에 복무해야 했습니다. 이 정책으로 인해 정부의 재정은 비약적으로 증가할 수 있었고 인민에 대한 국가의 지배권 또한 강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 토단은 대상은 귀족이나 호족에 의부하고 있던 무적민(無籍民: 호적이 등록되지 못한 백성)들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어려웠고 주요 대상은 북방 이주민들이 대상이 되었습니다. 토단은 장호(藏戶: 숨겨진 호구)들을 적발하여 기존의 이원화되있던 호적을 황적으로 일원화하여 재정 증가나 국가 권력 강화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유유의 토단법 실시 이후에도 토단정책은 그 후에도 자주 발표됩니다. 이를 통해서 정작 토단법의 그 시행이 철저하지 못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 출처: 중국중세사(미야자키 이치사다), 위진남북조사(이공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