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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노예제에 관하여. - 1 -
게시물ID : history_1547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Euphony
추천 : 6/5
조회수 : 7533회
댓글수 : 12개
등록시간 : 2014/04/22 21:56:42

* 들어가기에 앞서 1 : 조선의 노예제의 지배적인 평가방식의 문제점

흔히 조선의 노예제가 타 지역의 노예제에 비해 매우 관대한 노예제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은 이에 동의할 수 없는게, 조선의 노예제의 관대함을 역설하면서 주로 비교되는 대상인 타 지역의 노예란 바로 서구의 플랜테이션 식민지 노예이기 때문 -_-;

즉, 내부 노예제와 식민지 노예제를 비교하고 있는것이다. 이 두가지는 비슷해보일지 몰라도 엄밀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 차이점이란,
첫째. 민법의 적용대상 유무 : 내부 노예제의 노예들은 국가의 민법권에 속해있는 집단이나, 식민지 노예제의 노예들은 그렇지 않고, 대개 본국과는 별개의 법인 식민지 자치법 혹은 회사법(서인도회사나 동인도회사 영토의 경우)의 지배를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흑인노예라도 식민본국에 거주하고 있는 노예와 플랜테이션 식민지로 운송된 노예의 대우수준과 생활 양식의 극명한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착취수익한계 : 식민지 노예들의 절대다수는 아프리카 출신이며, 그들은 대개 타 대륙으로 수송된다. 이 과정에서 선상의 열악한 환경, 그리고 멀디먼 이국땅의 풍토병 등에 노출된다. 실제 식민지노예들의 평균수명은 3년 남짓이다. 반면에 내부 노예들은 식민지 노예들에 비해 훨씬 긴 천수를 누린다.(평균수명과 거의 엇비슷) 그렇기 때문에 같은 노예라는 '자본재'를 구입하는데 들인 지출이라도 만회하기 위해 요구되는 노동량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셋째. 민족적인 이유 : 흔히 근대 이전에는 민족(Nation)이라는게 별 대수롭지 않았던 것으로 치부하기 쉬우나 그렇기 않다. 이는 민족주의(Nationalism)가 근대적인 개념인데서 비롯되는 착각이다. 민족은 근대 이전에도 존재했는데, 이것은 자본주의(Capitalism)는 근대적인 개념이나, 자본(Capital)은 고대시대부터 존재해 온것과 같은 관계에 있다. 노예제 사회의 대명사인 로마 또한 민족의식은 존재했으며, 서구 뿐만이 아니라 동양에서도 민족의 개념은 존재하여왔다. 다만 참고하여야 할 점은 내부 노예제 또한 그 성격에 따라 크게 두가지로 나눌수 있다는 것인데, 그 중 첫째는 노예를 외부에서 조달하는 방식이고, 둘째는 노예를 내부에서 조달하는 방식이다. 로마는 전자였고, 조선은 후자였다.

이와 같은 한계로 볼때, 조선의 노예제를 근세 서구의 노예제와 비교하는 것은 일종의 오류이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조선의 노예제를 타국의 그것과 비교한다면, 고대 로마나 동시대의 유라시아의 그것과 비교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 들어가기에 앞서 2 : 조선 사대부의 노예 비즈니스(조선 전기~17세기)

우선 조선의 노예제 썰을 풀기 전에 반드시 짚어봐야할 점이 이 노예제의 경제적인 가치이다. 사실 한 국가나 사회의 모든 제도는 궁극적으로 국가나 사회의 거시적인 경제적 이익, 혹은 최소한 사회 내의 특정 집단의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짜여진다.

고려시대 노예계층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 안팎으로 유지되었는데 이유는 고려시대 당시에는 천민간의 결혼만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말기부터 양천결혼의 확산으로 인해 기존 민법의 취약점이 노출되었고 사회 내부의 계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가치가 확산되면서 천자수모법(자식이 어머니의 계급을 따르게 한 법)이 통과된다. 이 법은 조선시대 왕권강화를 추구한 태종에 의하여 종부법(아버지의 계급을 따르게 하는 법)으로 대체되나 불과 20년만에 세종대에 다시 종모법으로 회귀한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세조 대에 경국대전에 일천즉천법(아버지나 어머니 중 하나가 노예면 자식또한 노예)을 명문화하기에 이른다.

즉, 태종시대를 기점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노예인구 증가에 유리한 쪽으로 조선의 민법이 개정되어 온 것인데, 이로 인하여 가장 득을 보는 계층은 누구일까? 당연히 양반계층이다.


* 종부법이 20년만에 폐지된 이유

사실 지구상의 모든 지역에 존재했던 노예가 그러하지만, 노예는 기본적으로 매매대상이며, 말하는 도구이자 재산이다. 당연히 인권은 보장되지 않거나 혹은 최소한만이 보장되는 존재이다.

조선시대 여종은 모든 양반들의 성노리개였다. 비단 주인양반 뿐만 아니라, 주인이 아닌 양반들도 다른 집의 여종들을 마음껏 겁탈할 수 있었다. (다만 여종이 결혼을 하게되면 주인집 양반들만이 이와 성교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종부법이 시행되면 이와같은 행위를 하는데 리스크가 따르게 된다. 그 리스크란 바로 자식이 아버지의 계급과 족적을 따르게 되기 때문에, 만약 양반이 겁탈한 여종이 자식을 낳게되면 이는 양반계급이 되며, 겁탈한 양반의 자식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부법은 양반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불편한 법률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와같은 양반계층의 반대에 부딪혀 이는 20년만에 사라지게 된다.
(같은 맥락으로 고대 로마나 동시대 중국의 경우 이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지 않은 이유를 파악할 수 있는데, 그들 지역의 경우 자식이 아버지의 그것을 따랐기 때문)

그렇다면 여기서 한가지 궁금증이 생길 수 있다. 왜 여종의 주인집 양반은 다른 양반들이 이를 겁탈하는 것을 제지하거나 혹은 이를 제지하는 법률이 만들어지지 않았는가? 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었기 떄문이다.

종모법에 의하여 여종이 낳은 자식은 여종에게 귀속, 즉 궁극적으로 여종의 주인집에 귀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B집 양반이 A집 양반의 여종과 성교를 맺어 그 여종이 아이를 갖게 되면 A집으로서는 노예가 하나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이득이다.
(다만 이러한 풍습때문에 주인양반이 특별히 아끼는 여종의 경우, 외출을 자제시키는 풍습이 일반화되었다.)

결혼한 여종을 겁탈하지 않는 풍습이 정착된것도 다른집 양반이 결혼한 여종을 겁탈하는 행위는 비교적 경제적으로 이득이 될 소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차적으로 성리학 교리에도 그닥 맞지 않는 행위였기도 하였고 말이다.


* 일천즉천제 도입 이후 뉴 비즈니스
이러한 풍습은 일천즉천제 도입 이후 더 확고하게 자리잡는다. 일천즉천제 도입이후 양반들은 남자 종들을 여종과 결혼시키기를 꺼리게 된다. 바로 자신들의 남성 노예를 여성 양민과 결혼시키기 위함이다.

종모제 실시기간 동안은 남성 노예를 여성 양민과 결혼시켜봤자 그들의 자식은 양민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비즈니스가 성립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일천즉천제 도입 이후 사업환경이 변화했다. 바로 남성노예를 여성양민과 결혼시키면 새로운 노예자원과 더불어 추가적인 재산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형태의 결혼은 상대적으로 성사시키기가 힘들었고 그렇기 때문에 18세기 들어 종모법을 재채택할 때까지, 수많은 조선의 남성 노예들은 늙어서까지 결혼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 사회적인 영향
이렇게 노예를 증식시키기 매우 유리한 사회환경이 조성되면서 고려 말 10%였던 노예인구 비중은 17세기 60%를 상회하게 된다. 노예제의 대명사격인 로마제국의 노예비중이 가장 높았을 당시가 40%였음을 감안하면 조선은 가히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노예제 사회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폐단등은 당연히 나타났고, 이와 같은 사회에 염증을 느끼고 저항하는 움직임 또한 등장하였다.

과연 어떠한 움직임들이 일어났을까? 그리고 이에 대한 조선 정부의 대응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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