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삼한일통(三韓一統)의 삼한(三韓)은 마韓, 진韓, 변韓, 즉 삼국시대 후기의 백제, 가야, 신라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백제에 의해 코너에 일방적으로 몰려 똥줄탄 신라는 전통적인 적대국가였던 일본과 고구려에까지 원병파견을 요청하고 다닙니다. 하지만 모두
거절당하고 결국 당에 당의 연호와 의복을 채택하면서까지 원병파견을 요청하였는데 결과적으로 대당외교는 성공하고 신라는 구사일생으로
백제로부터의 위협을 떨쳐냅니다.
거기다가 또 운이 하나 겹치는데, 당은 한반도 전체를 통치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때맞춰 토번 제국(티베트)이 당나라의 후방을 기습공격하여 당의
수도인 장안이 위태롭게 되자, 당군이 한반도 전역지배안을 폐기하고 고구려 영토를 획득한것으로 만족하고 티베트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철군합
니다. 어찌됬건 이러한 행운들로 인하여 신라는 대동강 이남지역을 온전히 지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외교적 승리로 인하여 영토는 불어났지만, 7세기에는 당이 티베트 사태가 정리된 이후 다시 신라를 침공할 가능성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신라는
노심초사하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 하에서 신라의 대동강 이남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가 바로 삼한일통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명목적인 대의명분일 뿐이었고, 실제로는 신라가 삼한일통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는가에 대해서는 깊은 회의가 드는 바인데,
우선 신라는 원조 '서울 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서울과 지방의 자연적인 경제적, 문화적 격차 뿐만이 아니라 아예 법제적으로 차별을 하고
있었는데, 王京人 제도가 바로 그것. 수도인 금성에 거주하는 자들만이 진짜 '신라인'으로서의 대우를 받았고, 지방인들은 기본적으로 잡종취급을 받
았는데 일례로 일본서기에 의하면 6세기 중엽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의 앙숙인 백제 성왕의 목을 벤 장수가 수도에 개선하였는데, 금성의 신라인들은
일제히 그를 야유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바로 그가 지방 출신이었기 때문.
이러한 영토국가이면서도 도시국가적인 성향이 농후한 신라가 '외국'에 불과한 백제나 고구려의 유민들을 '삼한일통'의 정신에 입각하여 포용했을
확률은 만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죠.
덧붙여 삼한일통을 내세웠지만 예맥계인 고구려계 유민은 최대 진골의 골품을 가질 수 있었으나(실질적으로는 6두품) 삼한계인 백제계 유민은 최대
5두품의 골품만을 가질수 있게 법제화했던 것만 보더라도 신라의 '삼한일통'은 대당(對唐) 프로파간다 슬로건에 불과한 것을 알 수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