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푸틴의 연설 전문 (2022.2.21)
게시물ID : sisa_122196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分福茶釜
추천 : 1
조회수 : 90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3/06/18 11:45:02

우리가 접하는 우크라이나 관련 뉴스 대부분은 미국과 나토의 입장을 대변하는 기사입니다

러시아도 나름대로의 입장과 논리가 있을텐데, 그들은 과연 어떤 자세와 관점을 갖고 있는지 푸틴의 연설을 통해 알아봤으면 해서 퍼 왔습니다

 

존경하는 러시아 국민 여러분! 소중한 친구 여러분!

오늘 말씀드릴 주제는 우크라이나 사태와 그것이 우리 러시아에 왜 중요한 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것은 우크라이나에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도 전하는 말입니다.

길고 자세히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매우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돈바스 상황은 또다시 중대하고 위급한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현재 상황을 평가하고, 이와 관련한 우리의 결정과 가능한 향후 조치들에 대해 알리기 위해 오늘 여러분께 직접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우크라이나는 단순한 이웃 국가가 아닙니다. 우크라이나는 우리의 역사, 문화, 정신적 공간의 뗄레야 뗄 수 없는 한 부분입니다. 우크라이나는 가까운 친구이고, 그 중에는 동료와 친구 뿐 아니라 친척이나 혈연관계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로부터 남서쪽의 역사 속 고대 러시아 땅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러시아인이자 정교회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땅의 일부가 러시아에 재통합되었던 17세기 이전에도 그랬고, 그 이후에도 그랬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에 대해 알고 있고, 이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이해하고, 러시아의 행동의 동기와 목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지난 역사에 대해 짧게나마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의 우크라이나는 전적으로 러시아에 의해,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볼셰비키의 공산주의 러시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 과정은 사실상 1917년 혁명 직후부터 시작되었는데, 레닌과 그의 동지들은 이 일을 러시아에 몹시 무례한 방식으로 했습니다. 러시아 고유의 역사적 영토를 러시아로부터 분리, 강탈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 곳에 살고 있었던 수백만의 사람들의 의견은, 당연히, 아무도 묻지 않았습니다.

이후 대조국전쟁 전후로 스탈린은 과거 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 영토였던 일부 땅을 소련에 편입시킨 뒤 우크라이나에 이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종의 보상으로 스탈린은 옛 독일 영토의 일부를 폴란드에 분할했고, 1954년 흐루쇼프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러시아에서 크림반도를 떼어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에 선물했습니다. 바로 그렇게 우크라이나 소비에트의 영토가 형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바로 소련 탄생의 초기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먼 과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할 것 같습니다.

1917년 10월혁명과 뒤 이은 내전 이후 볼셰비키는 새로운 국가 건설에 착수했고, 그들 간에는 첨예한 이견이 발생했습니다. 1922년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및 민족인민위원을 겸임했던 스탈린은 자치제의 원칙 하에서 국가를 건설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즉 미래의 행정지역 단위로서의 공화국들이 단일 국가에 속하되 각 공화국에 폭넓은 권한을 부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레닌은 이 계획을 혹평했고, 당시 그가 «독립주의자»들이라고 불렀던 민족주의자들에게 양보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레닌의 바로 이러한 연합 국가 체제 아이디어와 분리에 가까운 민족 자결주의의 표어가 소련의 기초를 형성했습니다. 이것은 먼저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수립 선언문에, 그 이후, 레닌의 사후, 1924년 소련 헌법에도 명시되었습니다.

여기서 곧바로 많은 질문이 생깁니다. 그 중 첫 번째 주된 질문은 옛 제국의 변두리에서 끝도 없이 커지는 민족주의자들의 모든 욕망을 관대하게 채워주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새로 만들어진, 더군다나 대부분이 임의로 형성된 행정 단위인 연방 공화국들에 그들과 전혀 관계없는 거대한 영토를 넘겨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역사적으로 러시아인인 주민들까지도 함께 말입니다.

더욱이 이 행정 단위에 민족 국가의 지위와 형태를 부여했습니다. 여기서 또 질문이 생깁니다. 가장 열렬한 민족주의자들조차 한 번도 꿈꾸지 못했던 그런 후한 선물을 주고, 공화국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단일 국가에서 탈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언뜻 보면 이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혁명 이후 볼셰비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권력을 놓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입니다. 이를 위해 볼셰비키는 뭐든 했습니다. 독일 제국과 그 동맹국들이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고 있고, 1차 세계대전의 결말도 사실상 예고되었던 상황에서 굴욕적인 브레스트 평화 조약을 맺었고, 국내 민족주의자들의 모든 요구와 희망을 들어주었습니다.

러시아와 러시아 민족들의 역사적 운명이라는 관점에서 레닌의 국가 건설 원칙들은 단순한 과오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나쁜 것이었습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한 뒤 이것은 매우 명백해졌습니다.

물론 과거의 사건을 바꿀 수는 없지만, 우리는 적어도 어떤 정치적 색채도 조건도 없이 그것에 대해 제대로 그리고 정직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제가 덧붙일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지금 이 정치적 고려들이 특정 순간에는 아무리 효과적이고 유리한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그 어떠한 경우에도 국가 형성의 기본 원칙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저는 누구를 혹은 그가 한 일을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내전 전후 국내 상황은 몹시 복잡하고 위급했습니다. 저는 단지 그런 일들이 있었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그렇게 볼셰비키의 정책 결과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가 생겨났고, 지금도 이 나라를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의 우크라이나»라고 부를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레닌은 우크라이나의 작가이자 건축가입니다. 이것은 돈바스를 우크라이나에 말 그대로 끼워 넣은 레닌의 무리한 지시들을 포함한 오랜 문서들이 정확히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감사해야 할 후손들이» 우크라이나에서 레닌 동상들을 철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탈공산화라고 부릅니다.

탈공산화를 원하십니까? 글쎄요, 그건 우리에게도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멈출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에게 진정한 탈공산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분께 보여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문제의 역사로 돌아가서 다시 말씀드리자면, 1922년 옛 러시아 제국의 자리에 소련이 수립되었습니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광활하고 복잡한 영토를 보전하는 것도, 제안처럼 무정형인, 사실상 연합의 형태로 영토를 운영하는 것도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곧바로 보여주었습니다. 그것들은 현실적으로도, 역사적 전통에서도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붉은 테러와 스탈린 독재 체제로의 급속한 이행,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지배와 공산당의 권력 독점, 국영화와 계획 경제 시스템 – 이 모든 것들이 선언되었으나 작동하지 않는 국가 체제 원칙을 공허한 선언이자 빈껍데기로 바꾸었습니다. 현실에서 연맹 공화국들은 결국 어떠한 주권도 얻지 못했고, 그런 것은 사실상 없었습니다. 실제로는 완전히 중앙집권화된, 절대적으로 일원화된 성격의 국가가 만들어졌습니다.

스탈린은 레닌과 다른, 자기 자신의 국가 체제 구상을 완전히 구현했습니다. 하지만 그에 따른 개헌이나 법률 개정을 하지 않았고, 레닌이 주창한 소련 건설의 원칙을 형식상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럴 필요성도 없었을 겁니다. 전체주의 체제에서는 모든 것이 결국엔 작동했고, 겉보기에는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심지어 초민주적으로 보였습니다.

우리나라 건설의 기초가 된 기본적인 법적 토대에서 불쾌하고 비현실적인, 혁명이 몰고 왔으나 모든 정상적인 국가에는 몹시 파괴적인 공상들이 제때 삭제되지 않았다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이전에 자주 그랬던 것처럼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공산당 지도부는 그들이 견고한 운영 시스템을 만들었고, 자신의 정책이 민족 문제도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확신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위조, 개념의 대체, 여론 조작, 기만의 대가는 컸습니다. 민족주의적 야망의 균은 사라지지 않았고, 민족주의 전염병으로부터 국가를 지키는 면역력을 갉아먹는 지뢰는 처음부터 심어진 채 터질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지뢰는 소련에서 탈퇴할 수 있는 권리였습니다.

1980년대 중반 사회경제적 문제가 커지고 계획 경제의 명백한 위기가 드러나는 상황에서 민족 문제는 갈수록 첨예해졌는데, 그 핵심은 소련 민족들의 기대와 숙원이 아닌, 지역 엘리트들의 커지는 야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소련 공산당 지도부는 상황을 심층 분석하고 경제와 정치 시스템, 국가 체제의 점진적이고 신중한 변환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대신 레닌의 민족 자결주의의 복귀라는 노골적인 빈말만 늘어놓았습니다.

게다가 공산당 내부의 권력다툼 과정에서 각 측은 지지층을 늘리기 위해 민족주의적 감정을 무작정 자극하고, 부추기고, 자신의 잠재적 지지자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약속하며 그들을 이용했습니다. 시장경제 혹은 계획경제 위에 세워진 빛나는 미래와 민주주의 대한 피상적이고 포퓰리즘적인 말들 가운데, 그러나 국민들은 실질적으로 빈곤해지고 모든 것이 결핍된 상황에서 주권당국의 그 누구도 국가가 처할 필연적이고 비극적인 결말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소련 여명기에 자기 당 대열에서 성장한 민족주의 엘리트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길을 갔고, 이 과정에서 소련 공산당에게는, 다행히도, 국가 테러, 스탈린식 독재와 같이 권력과 국가 자체를 유지할 수단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망각했습니다. 당의 관리 기능마저도 그들의 눈앞에서 아침 안개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도 말입니다.

그리고 1989년 9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이른바 당의 현대적인 민족 정책, 소련공산당 강령이라고 불리는 비운의 문서가 채택되었습니다. 이 문서는 다음과 같은 조항을 담고 있습니다. 인용해보겠습니다. «연방 공화국은 그들의 사회주의 주권국가의 지위에 부합하는 모든 권리를 갖는다.»

이런 조항도 있습니다. «연맹 공화국의 최고 대표 기관들은 공화국 영토 내에서 연방정부의 결정과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중단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각 연방 공화국은 공화국의 모든 주민에 적용되는 고유한 시민권을 갖는다.»

이러한 입안과 결정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분명하지 않습니까?

지금은 국가적 혹은 헌법적 권리의 문제를 파고들고, 시민권이라는 개념 가체를 정의하는 자리도 아니고, 그럴 때도 아닙니다. 하지만 여전히 궁금증은 생깁니다. 안 그래도 어려웠던 상황에서 왜 그런 식으로 나라를 더 흔들 필요가 있었을까? 사실은 사실로 남아 있습니다.

소련 붕괴 2년 전부터 소련의 운명은 사실상 예견되었습니다. 급진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 그 중 누구보다도 우크라이나에 있는 급진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을 쟁취한 공로를 스스로에게 돌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본 것처럼,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단일한 국가를 붕괴로 이끈 것은 서로 다른 시기에 국가 건설, 경제 및 민족 정책에 참여했던 볼셰비키 리더들, 소련 공산당 지도부의 역사적, 전략적 과오였습니다. 소련이라는 이름의 역사 속 러시아의 붕괴는 그들의 책임이었습니다.


이 모든 부정, 기만, 러시아가 당한 노골적인 강도행위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소련 붕괴 이후 발생한 새로운 지정학적 현실을 인식하고 새로운 독립 국가들을 인정했습니다. 인정한 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도 당시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CIS 파트너 국가들을 도왔고, 그 중에는 독립을 선포한 직후부터 수없이 많은 물질적 지원을 요청했던 우크라이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우크라이나의 존엄과 주권을 존중하며 그러한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우리의 에너지 가격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연성차관, 경제 및 무역 혜택의 규모를 단순 계산한 전문가 추정에 따르면, 1991년부터 2013년까지의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의 예산상 총 이익은 2500억 달러 가량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1991년 말 외국과 국제기금에 대한 소련의 부채는 약 1000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구소련의 모든 공화국들이 경제 잠재력에 비례하여 이 부채를 함께 상환할 것으로 예상됐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가 소비에트 부채 상환을 떠맡게 되었고 그것을 전부 청산했습니다. 최종적으로 부채를 청산한 것이 2017년입니다.

그 대신 새로운 독립 국가들은 구소련의 해외 자산 중 자신의 몫을 포기해야 했고, 이에 관한 협정이 1994년 12월 우크라이나와 체결되었습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이 협정을 비준하지 않았고 이후 다이아몬드 펀드, 금 매장량, 구소련의 해외 재산 및 기타 자산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협정 이행을 거부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항상 개방적이고, 정직하게,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이익을 존중하며 우크라이나와 협력했고, 양국 관계는 여러 분야에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2011년 양국 교역액은 500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주목할 점은 아직 팬데믹 이전이었던 2019년 우크라이나와 모든 EU국가들의 교역액을 전부 합쳐도 여기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모든 권리와 이점을 가지면서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파트너십이라기 보다는 부양에 가까웠고, 우크라이나 당국은 때때로 몹시 예의 없이 이를 요구했습니다. 에너지 수송과 관련한 끝없는 협박과 저속한 가스 도난만 봐도 그렇습니다.

덧붙이자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의 대화를 서방과의 거래를 위한 구실로 이용했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라며 러시아와의 관계를 가지고 서방을 협박했습니다.

여기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크라이나는 첫 단계부터 우리를 묶어주는 모든 것을 부정함으로써 국가를 세우기 시작했고,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 모든 세대들의 인식과 역사적 기억을 왜곡하려고 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사회가 극단적인 민족주의의 확산에 부딪치고, 그것이 급격하게 폭력적인 루소포비아와 네오나치즘의 형태를 띠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과 네오나치들이 북캅카스에서 테러 집단에 합류하고 러시아에 대한 영토 주장의 소리가 더 커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여기서 부터입니다.

비영리재단과 정보기관의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우크라이나에 자신의 고객을 늘리고 그 대표들을 권력층으로 진출시켜온 외부 세력들도 자신의 역할을 했습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는 진정한 국가성이라는 안정적인 전통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1991년부터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도, 우크라이나 현실에서도 동떨어진 남의 모델을 기계적으로 베껴왔습니다. 국가 정치 기관들은 순식간에 만들어진 일가와 우크라이나 민족의 이익과는 전혀 다른 그들만의 탐욕스러운 이익에 맞게 계속해서 재단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올리가르히의 이른바 친서방 문명화 선택이란 민족의 번영을 위한 더 나은 여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지정학적 경쟁자들에게 비굴하게 봉사하면서 올리가르히들이 우크라이나인들에게서 훔쳐서 서양의 은행 계좌에 숨겨둔 수십억 달러를 지키는 것입니다.

일부 산업금융 그룹들, 그들의 지원을 받는 정당과 정치인들은 처음부터 민족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에게 의존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말로는 러시아와의 좋은 관계, 문화와 언어의 다양성에 찬성한다고 하면서 그런 의도를 진심으로 지지하는 국민들의 투표로 당선이 됐고 그 중에는 동남쪽 지역 주민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선된 후 그들은 자신의 유권자들을 배신하고, 자신이 내세운 공약을 거부하고, 급진주의자들이 말하는 대로 실제 정책을 펼치면서, 때로는 어제의 동료였던, 2개 국어 병용과 러시아와의 협력을 지지했던 사회적 조직들을 탄압했습니다. 그들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준법시민이고, 온건한 시각을 갖고 있고, 정부를 신뢰하는 것에 익숙해졌으며, 급진주의자들과 달리 공격성을 드러내거나 불법적인 수단을 이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이용했습니다.

반면 급진주의자들은 뻔뻔해졌고, 그들의 요구는 해가 갈수록 커졌습니다. 그들에게는 민족주의와 부패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민족의 진정한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이익과 우크라이나의 실질적 주권을 민족주의적 토양의 투기와 외적인 민족학적 특성으로 교묘히 바꿔치기한 나약한 권력기관에 자신들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이 갈수록 쉽게 여겨졌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안정적인 국가성은 결국 발전하지 못했고, 정치적 절차와 투표는 그저 여러 올리가르히 일가들 간의 권력과 재산 재분배를 가리기 위한 가림막 역할을 할 뿐입니다.

러시아를 포함한 많은 국가들에 있어 의심의 여지없이 도전이자 문제점인 부정부패가 우크라이나에서는 특별한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크라이나의 국가성과 모든 시스템, 삼권분립 전체에 침투하여 그것을 좀먹었습니다. 급진주의자들은 사람들의 정당한 불만을 이용했고, 시위를 이용하여 2014년에는 마이단을 쿠데타로 끌고 갔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외국 정부의 직접적인 조력을 받았습니다. 자료에 따르면, 키예프 독립광장의 이른바 저항세력이 미 대사관으로부터 받은 물질적 지원이 하루 100만 달러였습니다. 그밖에도 매우 큰 액수의 돈이 버젓이 반대파 리더들의 계좌로 직접 이체되었습니다. 그 액수가 수천만 달러에 이릅니다. 그런데 키예프와 다른 도시들의 거리와 광장에서 벌어진 충돌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유가족과 부상자들이 실제로 받은 금액은 총 얼마입니까? 이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권력을 장악한 급진주의자들은 반헌법적 행위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추적하고, 그야말로 테러를 자행했습니다. 정치인, 언론인, 사회적 인사들을 조롱했고, 그들을 공개적으로 모욕했습니다. 학살과 폭력, 세간을 시끄럽게 하지만 아무 처벌도 없는 살인의 물결이 우크라이나 도시들을 덮쳤습니다. 평화적 반대시위 참석자들이 도륙당하고 노동조합의 집에서 산채로 타 죽었던 오데사의 끔찍한 비극을 떠올리면 절로 몸서리가 쳐집니다. 이런 만행을 저지른 범죄자들은 처벌받지 않았고, 아무도 그들을 찾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 한 명 한 명을 알고 있고 그들을 처벌하고, 찾아서 재판에 넘기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마이단은 우크라이나를 민주주의와 진보에 더 가깝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쿠테타를 일으킨 후 민족주의자들과 그들을 지원했던 정치 세력들은 상황을 완전히 교착상태로 끌고 갔고, 우크라이나를 내전이라는 나락에 빠뜨렸습니다. 그 사건이 있고 8년 후 우크라이나는 분열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심각한 사회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여러 국제기구에 따르면, 2019년 생산가능인구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전체 인구의 15%에 달하는 약 600만 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떠나야 했습니다. 대부분 일용직 비숙련 일자리를 찾아갔습니다. 2020년부터 팬데믹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를 떠난 의사와 기타 의료진의 수가 6만 명을 넘는다는 사실도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2014년부터 수도요금이 거의 30% 올랐고, 전기요금은 수 배, 가정용 가스 요금은 수십 배 인상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공서비스 요금을 지불할 돈이 없고, 말 그대로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대답은 명확합니다. 소비에트 시기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받았던 지참금을 탕진하고 떼어먹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와의 긴밀한 협력 등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하고 국고에 세금을 채워주던 수만 개, 수십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습니다. 기계제작, 공구제작, 전자공업, 조선, 항공기 제작과 같은 분야들은 일거리가 없거나,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한때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소련 전체가 자랑하던 분야들인데 말입니다.

예카테리나 2세 시기에 최초의 조선소가 세워졌던 니콜라예프에서 2021년 체르노모르스키 조선소가 사라졌습니다. 유명 기업 «안토노프»는 2016년 이후 단 하나의 계열 항공기도 출시하지 않았고, 우주로켓장비 전문 생산 공장인 «유쥬마슈» 공장은 크레멘추그스키 제강소와 마찬가지로 파산 직전에 놓였습니다. 이런 가슴 아픈 사례는 이 밖에도 많습니다.

소련이 만들었던 가스수송 시스템은 가동 리스크도 크고 환경 비용도 많이 들 정도로 너무 노후화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긍금증이 생깁니다. 빈곤, 절망, 산업 및 기술적 역량의 상실 – 이것이 수년 간 무지개 빛 미래를 약속하며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우롱하고 속였던 그 친서방 문명화 선택이라는 것입니까?


실제로는 그 결과로서 우크라이나 경제의 붕괴하여 국민들에 대한 노골적 강탈을 초래하고 있고, 우크라이나는 외부의 통제 하에 놓였습니다. 외부로부터의 통제는 서방 국가들의 수도에서 전달되는 지시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내에 퍼져 있는 해외 컨설턴트, 비영리단체 등 기타 기관들의 네트워크를 통해서도 현지에서 직접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들은 모든 중요한 인사결정, 중앙기구부터 지자체에 이르는 모든 국가기관, «나프토가즈», «우크레네르고», 우크라이나 철도, «우크로보론프롬», «우크르포치타», 우크라이나 항만청을 비롯한 주요 공기업과 공공기관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우크라이나에 독립적인 사법부는 없습니다. 서방의 요구에 따라 우크라이나 정부는 국제기구 대표들에게 고등법관회의와 판사자격위원회와 같은 최고 사법 기구의 인사 선발 우선권을 줬습니다.

그밖에도 미 대사관은 국가부패방지청, 국가반부패국, 반부패특별검찰청, 반부패고등법원을 직접적으로 통제합니다. 부패 척결의 효율성 제고라는 허울 좋은 구실 아래에서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뭐 좋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디에 있습니까? 부패는 화려한 빛깔로, 전보다 더 크게 피어났습니다.

이러한 운영방식을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알고 있습니까? 그들의 나라가 정치적, 경제적 보호를 받지도 못할 뿐더러, 꼭두각시 체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습니까? 국가 사유화는 스스로를 «애국자의 힘»이라고 칭하는 권력자들이 민족성을 상실하고 국가의 주권을 박탈당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이끌어가도록 만들었습니다.

러시아 지우기와 강제적인 동화정책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최고 라다는 끊임없이 새로운 차별법들을 내놓고 있고, 소위 선주민들에 대한 법은 이미 시행 중입니다. 스스로를 러시아인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정체성, 언어, 문화를 고수하길 원하는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에서 외부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우크라이나어 교육 및 공용어 지정에 관한 법률들에 따라 러시아어는 학교와 모든 공공장소, 심지어 일반 가게에서도 금지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권력 «정화»에 관한 법을 이용하여 마음에 들지 않는 국가 공무원들을 정리했습니다.

우크라이나 공권력이 표현의 자유와 이견을 강력하게 억압하고, 반대세력을 추적하기 위한 근거가 되는 법안들이 수없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다른 국가, 외국의 개인과 법인에 대한 일방적이고 불법적 제재라는 슬픈 관행은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자신의 서방 관리자들보다 한술 더 떠서 자국민과 자국 기업, 방송채널, 기타 언론과 심지어 의원들에 대한 제재를 고안해냈습니다.

키예프에서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산하 우크라이나 정교회에 대한 제재도 계속 만들고 있습니다. 이건 감정적인 평가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결정들과 문서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분열의 비극을 우크라이나 정부는 파렴치하게 국가 정책의 도구로 바꿔버렸습니다. 우크라이나 현 정부는 신도들의 권리를 훼손하는 법률을 폐기해달라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라다에서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의 우크라이나 정교회 성직자들과 수백만의 평신도들을 겨냥한 새로운 법안들이 발의되었습니다.

크림에 대해서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크림반도의 주민들은 러시아와 함께 하겠다는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을 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주민들의 이 명확하고, 뚜렷한 의지에 반대할 수 있는 것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공격적 행동, 급진적인 이슬람 조직을 포함한 극단주의 조직의 활성화, 주요 기반시설에 대한 테러와 러시아 국민 납치를 위한 사보타주 그룹 투입에 중점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공격적인 행동들이 해외 정보기관의 지원 하에 이루어진다는 직접적 증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2021년 3월 우크라이나는 새로운 군사전략을 채택했습니다. 이 문서는 사실상 러시아와의 대치에 관한 내용이 전부이고, 우리나라와의 갈등에 다른 국가들을 끌어들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 전략은 러시아의 크림반도와 돈바스 지역에 지하 테러집단을 조직할 것을 제안합니다. 거기에는 예상되는 전쟁의 윤곽도 기술되어 있는데, 그 전쟁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에 대해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전략가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읽어드리자면, «우크라이나에 유리한 조건에서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아» 끝내야 한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가 또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여기에 인용해드릴 테니, 주의 깊게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러시아 연방과의 지정학적 대결에서 세계 공동체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라고 쓰여 있습니다. 사실상 이건 우리나라, 러시아에 대한 전투행위를 준비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가 자체 핵무기를 만들 거라는 말이 있었던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허세가 아닙니다. 우크라이나는 실제로 소비에트 핵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항공기, 사거리 100 km 이상의 소련제 전술탄도미사일 «Tochka-U» 포함하여 그러한 무기를 발사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습니다. 더 많이 만드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이것들은 소비에트 시기 때부터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크라이나에게 전술 핵무기를 갖추는 것은, 지금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사실상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는 다른 몇몇 국가들보다 훨씬 쉬울 것이고, 해외의 기술 지원이 있다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 역시 배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크라이나에게 대량살상무기가 생긴다면 전 세계, 유럽, 특히 우리 러시아에게 있어 상황은 완전히 본질적으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실제적 위험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고, 특히 서방의 비호자들이 우리나라에 또 하나의 위협요소를 만들기 위해 우크라이나가 그러한 무기를 얻도록 협조할 수 있다는 점을 거듭 강조합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 정권의 군사적 팽창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보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만 2014년부터 무기 및 장비 공급, 전문가 훈련을 포함하여 이러한 목적을 위해 수십억 달러를 썼습니다. 최근 몇 달 간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보란 듯이 서방의 무기가 우크라이나로 끊임없이 흘러 들어갑니다. 외국의 고문관들이 우크라이나 군과 정보기관의 활동을 지휘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간 나토군이 훈련을 핑계로 우크라이나 영토에 사실상 상시 주둔했습니다. 우크라이나 군의 지휘통제 시스템은 이미 나토군과 통합되었습니다. 이것은 우크라이나 군, 심지어 특정 부대나 분대까지 나토 사령부에서 직접 지휘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미국과 나토는 파렴치하게도 우크라이나 영토를 잠재적 군사행동의 무대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정기적인 합동훈련은 명백한 반러시아적 경향을 띠고 있습니다. 작년에만 2만 3천명 이상의 군인과 수천 대의 장비가 여기에 투입되었습니다.

2022년 다국적 군사훈련의 참여를 위해 우크라이나 영토에 외국 군대의 입국을 허용하는 법안이 이미 통과되었습니다. 나토군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올해 그러한 합동 훈련이 최소 10회 이상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활동은 우크라이나 영토 내 나토 군사조직의 급격한 확대를 은폐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명백합니다. 게다가 미국의 도움으로 현대화된 보리스폴, 이바노-프란코프스크, 추구예프, 오데사 등의 비행장 네트워크는 최단시간에 군대를 이동시킵니다. 우크라이나 상공은 미국의 전략기와 정찰기, 러시아 영토 정찰을 위한 무인기의 비행이 허용됩니다.

덧붙이자면, 미국이 설치한 오차코프 해군작전센터는 흑해 함대 및 흑해 연안 전역에 위치한 우리나라 인프라에 대한 초정밀 무기 사용을 비롯하여 나토 군함들의 활동을 지원합니다.

한때 미국이 이와 비슷한 시설을 크림반도에도 설치하려고 하였으나, 크림반도와 세바스토폴의 주민들이 이 계획을 무산시켰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늘날 오차코프에서 그러한 센터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18세기에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장군의 군사들이 이 도시를 위해 싸웠던 것을 상기시켜드리고 싶습니다. 그들의 용맹함 덕분에 이 도시는 러시아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당시, 18세기에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의 결과로 러시아에 편입된 프리체르노모리예 땅은 노보러시아라는 명칭을 얻었습니다. 오늘날 그들은 이러한 역사적 이정표들을 망각하게 하려고 하고, 러시아 제국 군인들의 이름도 지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군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현대 우크라이나는 많은 대도시 뿐 아니라 흑해로 향하는 통로조차 얻지 못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얼마 전 폴타바에서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장군의 동상을 철거했습니다. 뭐라고 말씀하실 겁니까? 자기의 과거를 거부하는 것입니까? 소위 말하는 러시아 제국의 식민지 유산을 거부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일관성을 좀 가지십시오.

다음입니다. 우크라이나 헌법 제17조는 자국 영토 내 외국 군사 기지 건설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것은 쉽게 피해갈 수 있는 관습에 불과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나토 국가들의 군사훈련 미션이 전개되었습니다. 이것은 사실 이미 외국 군사 기지나 다름없습니다. 군사 기지를 «미션»이라고 불렀을 뿐입니다.

우크라이나는 오랫동안 나토 가입에 대한 전략적 노선을 선언했습니다. 물론 모든 국가는 자신의 안보 보장 시스템을 선택하고 군사 동맹을 맺을 권리가 있습니다. 한 가지의 «그러나»만 아니었다면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여러 국제문서에서는 다른 국가의 안보를 희생하여 자신의 안보를 강화하지 않을 의무를 포함하는 평등하고 불가분한 안보원칙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스탄불에서 체결된 1999년 OSCE 유럽안보헌장과 2010년 OSCE 아스타나 선언을 여기서 인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안보 보장 방법의 선택이 다른 국가에 위협을 초래하지 않아야 하는데,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러시아 안보에 직접적 위협이 됩니다.

2008년 4월 나토 부카레스트 정상회담에서 미국은 우크라이나와 조지아가 나토 회원국이 될 거라는 결정을 밀어붙였습니다. 미국의 여러 유럽 동맹국들은 당시에 이미 그러한 전망이 가져올 리스크를 잘 알고 있었지만, 강력한 파트너의 의지에 굴복해야 했습니다. 미국인들은 명백한 반러시아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그들을 이용했습니다.


나토의 여러 회원국들은 지금도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에 몹시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몇몇 유럽 국가들은 우리에게 «뭘 걱정하는가? 당장 내일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라는 듯한 신호를 보냅니다. 우리의 미국 파트너들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일이 아니라면 내일 모레이겠지요. 역사적인 관점에서 무엇이 달라집니까? 사실상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가 나토의 요건을 충족하고 부패를 척결할 경우, 우크라이나 동부의 교전이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미 정부의 입장과 발언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나토가 평화적이고 매우 방어적인 동맹이라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러시아에는 아무런 위협도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다시 자기 말을 믿으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말의 실제 대가가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1990년 독일 통일 문제를 논의할 때, 미국은 소련에게 나토의 관할지와 군사 주둔지는 동쪽으로 1인치도 확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독일의 통일이 나토군의 동진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말을 제가 인용한 것입니다.

많은 말을 하고, 구두로 수많은 단언을 했지만, 그것은 전부 공허한 소리였습니다. 나중에는 중부유럽과 동유럽 국가들의 나토 가입이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이 국가들을 고통스러운 역사적 유산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고, 심지어는 러시아에 우호적인 국가들의 벨트를 형성할 것이라고 우리를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들이 정확히 반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몇몇 동유럽 국가의 정부들은, 루소포비아를 가지고 거래를 하면서, 나토에 러시아 위협에 관한 콤플렉스와 고정관념을 불어넣고, 우선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집단 안보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게다가 이 일은 우리의 개방성과 선의 덕분에 러시아와 서방의 관계가 가장 좋았던 1990년에서 2000년대 초에 일어났습니다.

러시아는 독일과 중부유럽, 동유럽에서 자국 군대를 철수하는 등 모든 의무를 이행했고, 이로써 냉전의 유산을 극복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습니다. 우리는 러시아-나토 위원회와 OSCE를 포함한 다양한 협력 방안을 일관되게 제안해왔습니다.

게다가, 공개적으로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것을 지금 처음으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000년 임기 말이었던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방러했을 당시 저는 그에게 «러시아를 나토에 가입시키는 것에 대해 미국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당시 대화의 내용을 상세히 밝히지는 않겠지만, 제 질문에 대한 반응은 매우 조심스러워 보였는데, 미국이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 실제로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우리에 대한 그들의 여러 실질적 조치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북 캅카스 테러리스트들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나토 확장과 관련한 우리의 안보 우려와 요구를 무시했으며, 미사일방어시스템 조약을 탈퇴했습니다. 이 모두가 무엇을 위한 것이냐고 묻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우리와 친구나 동맹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도, 왜 우리를 적으로 만듭니까?

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문제는 정치 체제도, 다른 무엇도 아니고, 그저 러시아처럼 거대하고 자주적인 나라가 그들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이것은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전통적인 정책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모든 안보 제안에 관한 태도도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날 서방 국가들이 나토 동진 불허에 관한 약속을 어떻게 «지켰는지» 지도를 한 번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저 기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섯 차례에 걸친 나토의 확장의 파도를 계속해서 맞았습니다. 1999년에는 폴란드, 체코, 헝가리가, 2004년에는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가, 2009년에는 알바니아와 크로아티아가, 2017년에는 몬테네그로가, 2020년에는 북마케도니아가 나토 회원국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나토와 나토의 군사 인프라는 러시아 국경까지 직접 닿았습니다. 이것은 유럽 안보 위기의 핵심 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국제관계 시스템 전반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상호 신뢰를 깨뜨렸습니다.

전략적 분야를 비롯하여 상황은 계속해서 더 나빠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글로벌 미사일방어시스템 구축 사업의 일환으로 루마니아와 폴란드에 MD 발사지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여기 배치된 발사대가 공격 시스템인 순항 미사일 «토마호크»의 발사에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밖에 미국은 대공 방어 및 미사일 방어 임무와 동시에 지상 및 해상 목표를 모두 타격할 수 있는 범용 미사일 «Standard-6»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즉 방어적 수단이라는 미국 미사일 방어 시스템에 새로운 공격 기능이 등장하고 확대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정보들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과 그에 따른 나토 군 시설의 배치는 이미 정해진 일이고, 시간문제라고 판단할 모든 근거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시나리오에서 러시아를 향한 군사위협 수준이 급격히 높아질 거라는 점을 우리는 명확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대한 기습 공격 위험성이 몇 배는 증가할 거라는 점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미국의 전략 계획 문서에 (문서에!) 적의 미사일 체계에 대한 소위 선제공격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미국과 나토의 주적이 누구인지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바로 러시아입니다. 나토의 문건에서는 우리나라가 유럽대서양 안보의 주요 위협이라고 거리낌 없이 공식적으로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공격을 위한 첫 번째 교두보가 우크라이나가 될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아마 절대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현재의 우리도 이것을 믿고 싶지 않지만, 그것이 사실입니다. 러시아도, 우크라이나도 이것을 알기를 바랍니다.

우크라이나의 많은 비행장들이 우리 국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초정밀 무기 수송기를 포함하여 이곳에 배치된 나토의 전술기는 볼고그라드-카잔-사마라-아스트라한의 경계에 이르는 우리 영토 깊숙한 곳까지 공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영토에 정찰 레이더를 배치하면 나토는 우랄 지역 상공까지 빈틈없이 감시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 중단거리 미사일 조약을 폐기한 이후 펜타곤은 최대 5500 km 거리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탄도미사일을 포함하여 일련의 지상발사 공격수단을 공개적으로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스템이 우크라이나에 배치될 경우 그들은 러시아 유럽지역 전역과 우랄산맥 너머의 시설까지 타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순항 미사일 «토마호크»가 모스크바까지 날아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35분 미만이고, 하리코프에서 탄도 미사일이 도달하는 시간은 7 ~ 8 분, 초음속 공격 무기가 도달하는 시간은 4 ~ 5 분입니다. 그야말로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분명히, 과거에 나토를 동쪽으로 확장하고, 러시아 국경으로 군사 인프라와 군사 장비를 전진시키고, 우리의 우려와 항의, 경고를 완전히 무시할 때마다 그랬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계획들을 실현할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걸 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는 식으로 또 행동하려고 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이에 동의한 적이 없고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러시아는 언제나 정치외교적 방법으로, 협상 테이블에서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자고 주장해왔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역 안정성과 글로벌 안정성에 대한 우리의 막중한 책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2008년 러시아는 유럽안보조약 체결에 관한 이니셔티브를 제시했습니다. 유럽대서양 지역의 어떤 국가나 국제기구도 다른 국가의 안보를 희생하여 자신의 안보를 강화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그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가 나토의 활동을 제한하게 해서는 안 된다며 우리의 제안을 문전박대했습니다.

심지어 법적 구속력이 있는 안보 보장은 오직 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들만 가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작년 12월 우리는 러시아 연방과 미합중국 간 안보 보장에 관한 조약 초안과 러시아와 나토 회원국의 안보 보장 조치에 관한 협정 초안을 서방 파트너들에게 전달했습니다.

미국과 나토의 답변서에는 공통된 말들이 많았습니다. 합리적인 내용도 있었으나 전부 부차적인 부분에 관한 것이었고, 문제를 지연시키고 논의의 주제에서 엇나가려는 시도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이에 적절하게 대응하면서 협상을 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강조했지만, 단 모든 문제를 러시아의 기본적인, 주요 제안사항과 분리하지 않고 종합적으로, 총체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전제를 깔았습니다. 러시아의 제안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나토가 더 이상 확장하지 않을 것, 둘째는 나토가 러시아 국경 근처에 공격 무기를 배치하지 않을 것, 셋째는 나토의 유럽 내 군사 잠재력과 인프라를 러시아-나토 기본법이 서명된 1997년 상태로 되돌려 놓을 것입니다.

우리의 이 근본적인 제안들은 무시되었습니다. 서방 파트너들은 모든 국가가 자신의 안보 보장 방식을 자유롭게 결정하고 모든 군사연합이나 동맹에 가입할 권리가 있다는 학습된 말만 반복했습니다. 즉 그들은 아무런 입장 변화가 없으며 나토의 그 유명한 «열린 문» 정책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또다시 협박하고, 러시아의 주권이 강화하고 우리의 군사력이 강화되면 결국에는 도입할 그 제재들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상황과 관계없이 추가 제재의 구실은 언제나 찾아낼 것이고 아니면 만들어 낼 것입니다. 목표는 하나, 러시아의 발전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의 주권, 국익, 우리의 가치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어떠한 형식적 명분 없이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할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근본적 문제들에 관한 평등한 대화 제안에 미국과 나토가 사실상 대답하지 않았고, 우리나라가 처한 위협 수준이 크게 높아지고 있는 현 상황에서 러시아는 자국의 안보 보장을 위한 대응 조치를 취할 모든 권리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돈바스 상황에 관해 말씀드리자면, 우크라이나 정부는 민스크 협정을 이행할 의사가 없음을 지속적이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고, 평화적 문제 해결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2014년과 2015년에 그랬던 것처럼 또 돈바스에서 전격전을 벌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 모험이 어떻게 끝났는지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현재 돈바스의 거주지들은 연일 포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대규모 부대가 편성되어 공격 무인기, 중화기, 미사일, 대포, 다연장로켓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민간인 학살, 봉쇄, 아이, 여성, 노인 등에 대한 학대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듯, 여기에는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서방 동료들이 스스로를 그 유일한 대표라고 자처하는 이른바 문명 세계는 이 곳의 주민들이 서방이 지원한 2014년 우크라이나 쿠테타에 동조하지 않았고 국가 차원의 야만적이고 난폭한 민족주의와 네오나치즘 경향에 반대했다는 이유만으로 4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이 모든 참상과 대학살이 마치 없는 일인 양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땅에서 살고, 자기의 언어로 말할 기본적 권리와 자기의 문화와 전통의 수호를 위해 싸웠다는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이 비극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요? 이것을 얼마나 더 견딜 수 있겠습니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영토 보전을 위해 모든 것을 했고, 지난 몇 년 간 돈바스 문제 해결을 위한 2015년 2월 12일 민스크 협정을 정하는 2015년 2월 17일 유엔 안보리 결의 2202호를 이행하기 위해 꾸준히 싸웠습니다.

그러나 모두 헛된 일입니다. 대통령과 라다 의원들은 바뀌지만, 그 본질인 우크라이나 권력을 장악한 정권 자체의 난폭하고 민족주의적 성격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2014년 쿠데타의 산물이고, 당시 폭력, 유혈, 불법의 길에 발을 들인 자들은 돈바스 문제의 군사적 해결을 제외한 다른 해결책은 인정하지 않았고,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오랫동안 미뤄온 도네츠크 공화국과 루한스크 공화국의 독립과 주권의 즉각적 승인 결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 연방 의회가 이 결정을 지지하고 두 공화국과의 우호 및 공조 조약을 비준할 것을 요청합니다. 두 조약은 가까운 시일 내에 준비 및 서명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서 정권을 장악한 자들은 즉시 무력행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앞으로 계속될 유혈사태에 대한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우크라이나 정부가 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발표한 이 결정에 대해 러시아 국민 여러분과 모든 애국자들의 지지를 확신합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러시아 연방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2022년 2월 21일

출처: 주한 러시아연방 대사관 홈페이지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