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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위나라의 둔전제
게시물ID : history_1541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4
조회수 : 105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4/18 22:27:02

위나라의 둔전은 건안 원년(196)에 설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위나라의 둔전은 이전 진나라와 한나라 시대의 둔전제를 계보적으로 이으면서 또 조조 정권과 위(魏)나라의 국가 재정 기반이 되어 위나라의 멸망까지 함께 했습니다. 위나라의 국가 재정은 민전보다는 둔전에 더 의존하는 편이었습니다.

 

 

건안 원년(196), 장안을 탈출한 헌제를 허창(許昌)에서 맞이한 조조는 그것을 전후해서 허창 주변에서 백성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설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둔전은 허창과 훗날 위의 수도가 된 낙양을 중심으로 현재의 하남성 중부, 하북성 남부, 섬서성 동부, 산서성 남부에 분포하고 있었습니다. 이 둔전은 전란으로 말미암아 버려진 주인 없는 황무지 또는 적대 세력에게 흡수한 토지, 하천 유역에 피(陂)*거(渠) 등 수리시설을 갖추어서 경지화한 개간지로 충당하였습니다.

 

 

※ 조조는 원소를 격멸하고 업을 새로운 근거지로 삼았을 때, 그 때까지 재지영주로서 조조에게 협력한 천승현(千乘縣)의 이전(李典)이 종족빈객 1만 3천 명 이상과 함께 이곳으로 이주했다고 합니다.

 

 

이 둔전은 대사농에 소속된 둔전관인 전농중랑장(典農中郞將), 전농교위(典農校尉: 군 태수에 상당), 전농도위(典農都尉: 현령에 해당)를 각 둔전에 배치하여 관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전농부에 소속되지 않은 탁지상서(度支尙書) 또는 둔전 소재의 군정과 민정을 담당하는 도독*자사가 관장하는 둔전이 있었습니다. 전자를 민둔(民屯), 후자를 군둔(軍屯)이라고 했습니다. 민둔의 소재지는 주로 중원의 비옥한 토지 지대였고, 군둔은 오나라와 촉나라와의 접경지역 그리고 동북과 서북의 전선 기지에 설치되었습니다.

 

 

전농부에 소속된 둔전민은 피정복민*유민*빈민 등을 강제로 이주시켜 둔전 개발*경작에 종사토록 하고 이들은 군현의 호적에 등록하지 않은, 즉 군현의 지배를 받지 않은 점이 일반 농민과는 구별되는 존재였습니다. 이들은 주인 없는 토지에 강제 이주되어 토지를 분배 받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농구*경우(耕牛)*종자(種子)*양식 등을 관에서 지급하였습니다.

 

 

전과(佃科)는 한대의 분전지술(分田之術)에 따라 결정하였습니다. 분전은 토지 없는 자가 타인의 토지를 경작할 때 그 수확을 정률로 분배한다는 뜻으로, 곧 둔전민은 국가의 토지인 둔전을 경작하여 그 수확을 정률로 관과 분배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분전지술의 구체적 정률은 사우(私牛)로 경작할 때는 관과 중분(中分)하고 관우(官牛)로 경작할 때는 관 6분, 둔전민 4분으로 분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한대 호족의 대토지 소유의 경영 방식과 동일했습니다.

 

 

전농부 둔전에서 경작에 직접 종사하는 사람을 둔전객(屯田客)*객(客)*전농부민(典農部民) 등으로 부르고 정복전쟁에서 얻은 포로 또는 그 지배 아래 포함된 농민 가운데 강제적으로 징발된 자, 그 밖에 빈민이 둔전민의 공급원이 되고 있었습니다. 둔전민은 일반 양민에 비해서 신분적으로 차별을 받았습니다.

 

 

군둔은 군국의 재정을 관장하는 탁지상서에 소속된 탁지중랑장*탁지교위*탁지도위 등이 관할하는 것과 도독*자사가 관할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도독은 자사를 겸하여 군사를 지휘하는 지위였기에 자사 관장은 둔전은 당연히 도독의 소속이었습니다. 군둔 경작자는 병*전병(田兵)*사(士)*둔병(屯兵) 등 여러 가지 호칭이 있으며 명칭 그대로 군역과 농사를 동시에 수행하는 즉 '차경차수(且耕且守)'를 그 기본 성격으로 합니다. 이 군둔은 회남*회북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현실적으로 절실한 군사상의 요청에 오나라와의 전선에 설치한 것이었습니다. 군둔전의 전병도 전농부의 둔전민과 같이 분전지술에 따라 관우로 경작하면 그 수확물은 관 6분*사 4분, 사우로 경작하면 관*사 중분하여 분배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수확물의 일부분은 전병의 사계(私計)로 남겨졌습니다. 

 

 

※ 전병의 사계를 통해 전병은 군둔전에 자신들의 가족을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오나라의 경우에도 위서 권26 「만총전」 「손권이 병 수천 가를 강북에 파견하여 남녀가 경작에 종사하였다.」라는 기록처럼 전병들이 군둔전에 가족들과 머물면서 부사자대(父死子代)*형사제대(兄死弟代)의 형식으로 영구적인 병역의무가 부과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전병을 병호(兵戶/ 혹은 병가, 사가 군호 등으로고도 불림)라고도 불렀습니다. 병호는 조조시대에 처음으로 설치하여 초무(招撫), 모민(募民), 항졸(降卒), 사병(私兵) 등을 개편하여 조조 군단의 기간 병력이 되었습니다.  

 

 

이 둔전제는 위말진초(魏末晉初) 함희(咸熙) 원년(264)에 「둔전관을 파하고 정역(政役)을 고르게 하였다.」는 기록에서처럼 폐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둔전관 폐지는 전농부 소관의 민둔전이고 군둔에서는 이후에도 존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전농부 소관의 민둔전의 폐지로 인해 민둔전의 둔전민이 주군민으로 개편되어 주군민과 같은 세역을 균등하게 부담케 하였습니다.

 

 

민둔전 폐지 이후에도 존속한 군둔전은 회남*회북의 오나라와의 접경지대에 남아 태강 원년(280)에 오가 멸망하여 삼국 이래 분열 상태인 중국이 통일되면서 주군의 군비가 철폐되고 또 주군민의 병역도 면제되었고 또 오나라와의 전선기지에 설치된 회하 유역의 군둔전도 새로이 개편되었습니다.

 

 

※ 진의 무제 사마염은 「실로 창과 방패를 거두어야 할 때」라고 하여 주군의 병사를 모두 귀농시켰습니다. 그리고 그와 관련하여 「호조식(戶調式)」이라고 하는 징세 및 토지 제도의 법령을 반포했습니다.

 

 

※ 출처 : 위진남북조사,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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