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십오 층을 오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빨간 글씨의 고장이란 명찰을 달고 꼿꼿하게 낮잠을 때리고 있었다. 평소 체력엔 자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이상일뿐 지팡이에 의지하는 노인처럼 계단 손잡이에 늘어지고 있었다. 유행이었던 찢어진 걸레짝 같은 청바지와 혓바닥을 내민 롤링스톤즈 로고가 가슴에 새겨진 흰 티가 몸에 질척거렸다. 아마 매력적인 소녀를 집에 바래다준 뒤 돌아오는 길은 아니었고 파스타집 알바나 피시방에서 오는 중이었을 것이다. 갈아입을 옷도 별로 없었지만 어딜 가든 되지도 않는 간지를 뽐냈던 것이다.
한 번은 친구들 약속에 평소 가지 않던 중심가의 피시방에 갔는데 “제 것만 계산할게요, 34번인가?” 하자 카운터를 보는 여직원이 말했다. “성포동 김간지 씨 맞으세요?”이름을 부르는 여직원도, 뒤에 계산을 기다리던 다른 무리의 청년들도 위아래로 나를 훑으며 전투력을 측정했다. 나는 언제 그런 이름으로 등록한 건지 기억이 없었고 밖에 나왔을 땐 친구들의 웃음거리가 됐지만 재밌는 시절이었다. 달은 항상 턱 밑에 구름 카라를 세웠고 우린 술 마시면 늑대인간이 되었다가 매번 사냥에 실패하고 그냥 개가 되었다. 헐벗은 몸매를 뽐내는 명함들이 제멋대로 뿌려진 번화가 대로에서 키득깔깔거리며 친구 신발을 벗겨 깔창을 멀리 던져버리곤 했다.
칠 층, 팔 층, 숱도 부족한데 정성껏 기른 콧수염에도 땀이 맺힐 때쯤 구 층에 다다랐다.
“여긴 지나갈 수 없다!”
두 팔을 벌려 여름을 숨기고 있었다. 검고 긴 머리가 이제 막 자란 검은 곤충의 등처럼 반질반질했다. 팔월의 햇살이 팔목으로 얼굴을 감싸 안고 있었다. 부신 얼굴 위에 크레파스로 칠한 종이왕관이 보였다. 순간이 꿀처럼 나른해서 나도 모르게 아 하고 손을 내밀었다.
“꺄!”
공주는 반기는 고양이처럼 달아나버렸다. 사라진 복도로 따라가 보니 현관문이 열린 왕국이 하나 보였다. 이색적인 무늬의 커튼이 살랑거리고 안에선 투명한 웃음소리가 구르고 튀어 창문에 부딪치고 있었다. 거기까지였다. 뒤돌아 걸음을 옮기려는데 하늘에 파란 크레파스가 칠해져가고 있었다는 건 뻥이고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을 거 같아 얼른 자리를 떠났다.
십오 층 집에 도착했을 땐 내내 안 좋았던 기분이 뭔가 운동을 한 것 같아 이상하게 개운했다. 으어 했다가 헉 소리를 내며 찬물로 샤워했고 그 뒤엔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철없는 짓이었겠지. 공주가 아직도 기억나는 걸 보니 인상적이었던 것 같긴 한데 지금은 분명 왕비는 아니고 대학생 정도 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