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년 11월 조(趙 : 후조)를 건국한 석륵은 선비(鮮卑) 세력들이 들끓고 있는 북방 공략 대신 비교적 상대가 수월했던 남방 공략에 중점을 둡니다. 이해에 석륵은 청주(靑州)와 연주(兗州) 장악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동진 공략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것은 훗날 동진의 정예부대 중 하나인 북부군단의 초석을 다진 조적이 이끄는 부대가 하남 지역의 확보를 도모하기 위해 북진하면서 후조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쳤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적이 321년 병사하고 석륵의 후조군은 하남 지역을 확보하는데 이릅니다. 하지만 324년 이후 석륵을 견제하기 위해 하남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전조(前趙)와의 항쟁이 격화되었습니다. 전조와의 전쟁은 누가 유리하다고 부를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오히려 후조에게 불리한 상황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325년에 후조의 영역이었던 병주의 전조에게 항복했고, 동진의 사주(司州) 지역도 전조에게 투항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낙양을 지키는 석생(石生)이 포위당하게 되었습니다. 석륵은 석호(石虎)[1]를 구원군으로 보냈습니다.
비록 폭군이라고 불린 석호였지만 전장에서만큼은 이름 그대로 호랑이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미 상당한 전공을 세운 석호는 전조군을 격파하고 오히려 전조군을 역포위합니다. 하지만 전조의 군주인 유요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유요는 직접 장안에서 군대를 이끌고 진격해서 석호가 이끄는 후조군을 격파합니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후조편이었는지 승리한 전조군 내에서 혼란이 발생하고 석호가 다시 이틈을 이용해 전조군을 공격함으로써 전조는 패퇴하고 맙니다. 이로써 후조는 전조가 장악했던 병주를 다시 되찾고 사주도 장악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전조의 세력은 크게 꺽였고 후조는 단숨에 회수(淮水) 이북 지역을 지배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양측의 대결이 이것으로 마무리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328년에 이르러 석호는 석륵의 명령에 따라 병주에 남아있던 전조의 거점을 공략합니다. 이에 유요는 당장 10만 대군을 이끌고 반격에 나섭니다. 석호는 크게 패배하고 낙양 일대를 유요군이 포위합니다. 그리고 석호가 지키고 있던 낙양을 맹렬하게 공격합니다. 석호와 후조군은 무려 3개월 간 이어진 전조군의 파상공세를 막아냅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석륵은 직접 구원군을 이끌고 유요를 공격합니다. 쌍방 합쳐 20만 넘는 대군이 낙양에서 대회전을 벌이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유요는 석륵의 반격에 대한 대비를 게을리하였고 석륵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낙양까지 근접합니다. 후조군이 낙양 가까이까지 진군하자 유요는 낙양에 대한 포위를 풀고 낙양 서쪽에 포진하였습니다. 그리고 12월 일 드디어 양측은 낙양을 사이에 두고 대격돌합니다. 화북의 지배권을 둔 오호십육국 시대 전반기 최대 전투 중 하나라 불릴만 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석호는 적진으로 돌격하여 유요를 사로잡았고 그와 함께 전조는 멸망에 이릅니다. 사로잡힌 유요는 처형당했습니다.
석륵은 석호에게 계속해서 전조 토벌의 명령을 내렸고 석호는 백부인 석륵의 명령에 따라 전조의 잔당을 토벌하기에 이릅니다. 석호는 장안으로부터 서쪽으로 달아난 태자 유희(劉熙)를 잡았고, 이어서 329년 9월에는 상규(上邽)에 있던 전조의 잔당들을 토벌하고 전조를 멸망시켰습니다.
이렇게 최대의 라이벌인 전조를 멸망시킨 석륵은 다음해인 330년 2월에 천왕(天王)에 즉위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황제에 즉위하였습니다. 그는 황제에 즉위하면서 다시 관료 기구를 재정비하며 건평(建平: 330년 - 333년)이라는 연호도 제정하였습니다[2]. 그리고 후조가 화북을 제패함에 따라 고구려와 선비 우문부 그리고 전량(前凉)이 사신을 보내서 대외적으로도 후조는 최강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집니다. 하지만 황제로써 그의 통치기간은 겨우 3년에 불과했습니다. 333년 석륵은 병으로 몸져 누웠습니다. 그리고 백부인 석륵과 함께 사실상 화북 제패의 가장 큰 공을 세운 석호는 자신의 강대한 힘을 이용하여 전횡을 부렸습니다. 석륵이 이를 막기에는 자신의 몸은 너무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330년 7월 석륵은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을 끝내고 60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석륵이 죽은 후 석호는 그의 시신을 몰래 파묻어 아무도 무덤을 찾을 수 없게 하였습니다.
그는 사후 고조(高祖) 명황제(明皇帝)에 추존되었습니다.
비록 석륵은 미천한 출신이었지만 한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치열한 전투 속에서도 그가 고문으로써 데리고 다니던 군자영의 학자들로 하여금 「춘추, 사기, 한서」등의 사서를 읽혀 청문할 정도였습니다. 비록 배운 것은 없었지만 노력으로써 이를 극복했으며, 게다가 그는 적재적소의 인재를 잘 배치하여 국가운영에 체계화를 도모했습니다. 그리고 인재발탁을 위하여 수도인 양국에는 태학을 두었고 군(郡)에는 학관(學官) 등을 두어 학교제도도 정비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편에서 말한 것처럼 호족이 한인 사대부를 모욕하는 것을 엄금하고 사인의 권위도 보장하여 한인(漢人)들이 적극적으로 후조 정권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중국의 학자 범문란은 석륵에 대해 「석륵은 싸움에 능했으며, 거기에 장빈 등 실의에 빠진 사인(士人)들의 지모가 더해져 당시 대적할 자가 없는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1] 석호는 석륵의 아버지인 주갈주(周曷硃)의 형제인 복사(匐邪)의 아들인 구멱(寇覓)의 아들로 석륵은 그에게 있어서는 백부에 해당하였습니다. 하지만 구멱이 일찍 죽어 석륵이 이 석호를 양육했다고 합니다. 어렸을 적부터 석호는 흉포해서 석륵도 이를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석륵을 석호를 죽이려고 했지만 석호 어머니의 간청으로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석호가 장성하자 석륵은 석호에게 군사업무를 맡겼습니다. 석호에게 군사업무는 상당히 잘 맞았는지 본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패배한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수많은 승리를 거두며 나중에 이르러서는 석호가 가장 신임하는 조력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석호는 백부인 석륵이 대선우 조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 선우원보(單于元輔)라는 요직에 임명되었습니다.
[2] 석륵은 황제 즉위 이전에 태화(太和 : 328년 - 330년)이라는 연호를 썼었습니다.
※ 석륵과 관련된 에피소드
어느 날, 석륵은 신하들과 함께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신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술자리가 무르익자 석륵은 신하들에게 물었습니다.
「나를 역사상의 인물 가운데 누구와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러자 신하 가운데 아첨하는 자 한 명이 기회는 이때라는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폐하는 한의 고조(高祖), 위의 조조는 말할 것도 없고 누구와도 견줄 만한 자가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황제(黃帝 : 중국 전설상의 군주) 다음 정도로 할까요?」
그러자 석륵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당치 않은 것을 말하지 말라. 나는 나의 분수를 정확히 알고 있다. 내가 만약 한의 고조와 만났다면 순순히 부하가 되어 봉사할 것이다. 그러나 광무제(光武帝)라면 상대가 되어 천하를 다투어볼 것이다. 그런데 어느쪽이 이길지는 해봐야 알 것이다. 조조와 사마의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과부를 후견인으로 둔 고아가 천자가 된 것을 기회로 하여, 마치 여우가 사람을 홀리듯이 천하를 빼앗은 놈들이다. 나는 그러한 짓은 하지 않겠다. 대장부다운 행동은 유유낙락하고 해와 달과 같아 밝은 상태에서 공명정대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 출처 :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위진남북조사(이공범), 오호십육국(삼기양장), 중국중세사(미야자키 이치사다),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