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BGM] 우리는 번지면서 점점 뚜렷해진다
게시물ID : lovestory_9392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5
조회수 : 146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3/01/08 19:27:11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여태천, 쓸데없는




전문가 앞에서 우리는 늘 주눅이 들지


상황이 좋지 않은 게 당연하다는 듯

차트를 쳐다보며 그는 말한다

발이 아려 맨발로 아스팔트 위를 걷고 있는 심정을 알까


전문가는 어렵게 말하지

비가 올 예정이라고

하지만 바람의 속도와 방향을

그리고 습도에 대해선 몰라도

그가 절대 모르는 보법으로

제비는 저렇게 날고 있지


아침의 이슬과 꺼지지 않는 촛불

어렵지만 느낌을 전해줄 수 있는

뭐랄까

실험적인 단어가 필요해

쌀쌀하지만 상쾌한


서류더미를 뒤적이며

전문가는 언제나 근엄하지


‘이제 천천히 세계와 이별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제발 그 잘난 입 좀 닫아줄래요’


멀어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멀리 돌아간다는 것

오늘의 내가 내일의 우리가 되는

 

 

 

 

 

 

2.jpg

 

이근화, 빈 화분에 물주기




어디에서 날아온 씨앗일까

누가 파 온 흙일까

마시던 물을 일없이 빈 화분에 쏟아부었더니

며칠 지나 잎이 나온다

욕 같다

너 내게 물 먹였지

그러는 것 같다

미안하다 잘못했다

그러면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볕이 잘 드는 곳으로 옮겨 주었다

몰라봐서 미안하다

그런데 끝까지 모르겠다

너 누구니, 아니 댁은 누구십니까

잎이 넓적하고 푸르다

꽃 같은 것도 피울 거니

그럼 정말 내게 욕을 하는 거야

안녕하십니까, 묻지 마 내게

당황스럽잖아 나더러 어쩌라고

계속 물을 주어야 한다

불안하면 지는 거다

그런데 더 주어야 하나 덜 주어야 하나

그늘을 좋아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는 거다

너는 어디서 왔니

족보를 따지는 거다

상상하는 거다

너 아무것도 아니지

나의 몽상이구나

나란 망상이구나

죽고 없는 거구나

잘 살기란 온전하기란

불가능한 거구나

빈 화분에 물을 주며

나는 하루하루 시들어 간다

최선을 다해 말라 간다

 

 

 

 

 

 

3.jpg

 

김정임, 여행자




매창이 정인을 잃고 찾았다는 개암사

공중엔 산기슭을 벗어난 새들의 발자국이 현악기처럼 걸려 있다


가슴에 품은 수만 개 나뭇잎을 꺼내는 걸까

개암사를 향한 오솔길로 바람소리 수런거리고


여자의 어깨 위에서 진물 같은 달빛이 흐른다

더 이상 피울 꽃이 없는 이름


몰래몰래 늙어 간 봄처럼 기다리던 것들이 스스로 주저앉는지

세월이 갇힌 비문의 얼굴이 점점 흐려지고


영원한 것은 영원히 없어 뒤돌아본 시간은

텅 빈 악보처럼 소리의 흰 물결만 일렁일 뿐


한 때의 꽃잎들은 내가 죽은 뒤에 태어난 시(詩)였을까

이화우 흩뿌릴제 땅속에 묻어버린 이 노래는

나는 왜 여기 있을까


죽은 사람의 노래는 연주할 수 없어

입 속에 감추어진 혀같이 붉디붉은 슬픔


등을 굽힌 여자의 활이 울음을 삼키는 동안

새들은 가고 투명한 허공을 빗금 그으며 지나간다

 

 

 

 

 

 

4.jpg

 

신철규, 데칼코마니




네 감은 눈 위에 꽃잎이 내려앉으면

네 눈 속에 꽃이 피어난다


네 감은 눈 위에 햇살이 내리면

네 눈 속에 단풍나무 푸른 잎사귀들이 살랑거린다


먼 항해에서 돌아온 배의 노처럼

네 긴 속눈썹은 가지런히 쉬고 있다

가끔씩 배가 출렁이는지

넌 가끔 두 주먹을 꼭 쥐기도 한다


네 감은 눈 속에 눈이 내리면

나는 새하얀 자작나무숲을 한없이 헤매고 있을 거야

지친 발걸음이 네 눈동자 위에 찍힌다


네가 눈을 뜨면 내 눈은 까맣게 감기고 말 거야


나는 너를 채우고 너는 내게서 빠져나간다

우리는 번지면서 점점 뚜렷해진다

 

 

 

 

 

 

5.jpg

 

박형준, 득도




불이 켜지는 가로등과

저녁나절의 햇살이 뒤섞여 있다

밤과 저녁이 구별 안 되는

황홀의 시간

빛이 있으라 하면

거기, 하루살이가 있다

가로등의 빛을 둥글게 휘감아

날개를 떨며

태양이 도는 소리를 내느라 여념 없다

나는 것만 생각하느라

우화하자마자

입이 퇴화해버린 단식가

하루살이떼는 배가 고프면

일몰 속에서 일출의 신비를 안다는 듯

가로등을 휘감으며

이글거리는 알을 낳는다

갈대의 흰 털처럼 날린다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