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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사람들과 이별하는 것보다 더 큰 휴식은 없다
게시물ID : lovestory_9390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4
조회수 : 144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12/30 15:06:07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신진용, 바다에 가지 않고도




해변의 모래에 그림을 그렸다

커다란 발을 가진 코끼리의 그림이었다

너와 나는 코끼리에 올라탄 채 그 걸음에 우리를 내맡기곤 했다

함께 타기에는 비좁은 등이었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코끼리는 자꾸만 불어났다

파도가 모래를 지우는 탓이었다

무리를 지은 코끼리들이 빠르게 내달렸다

우리를 실은 코끼리가 해변을 벗어나기 직전에 나는 뛰어내렸다

코끼리의 행렬이 길게 늘어지며 너는 사라졌다


네가 돌아온 것은

셀 수도 없는 코끼리 무리가 해변을 떠난 다음이었다


코끼리만큼이나 커다란 발로 너는 걸어왔다

그때까지도 나는 모래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더는 발자국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너를 업고 나는 걸었다

질질 끌리는 네 발이 모래 위에 기다란 두 개의 선을 그었다

선은 코끼리의 발을 자르고 몸통을 잘랐지만 그들을 지워내지는 못했다

그래도 우리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코끼리가 남아 있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해변의 끝에서 커다래진 발을 조금씩 녹였다

도무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그 발을 꼭 껴안은 채 두 사람은 잠이 들었다

꿈 속 코끼리들은 열을 지어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 마리의 코끼리도 바다를 넘치게 하지 못했다


꿈이 끝나갈 즈음 바다는 먼 것이 되었다


나는 화단의 모래를 조심스레 담아 와 액자 속에 들이부었다

집 안에 걸린 액자는 그것 하나뿐이었다

 

 

 

 

 

 

2.jpg

 

송승언, 분쇄기




어제가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 바깥에 없는 날이었다고 해도

그것이 오늘의 불안을 지워 주지는 않아

나는 바깥이 잘 보이지 않는 김 서린 창문을 문지른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 거기 있는지 확인하려고

주전자가 가열되는 중이라

실내는 흐려지고 있다

피어오르는 증기를 보면 영혼 하나가 떠올라

잊을 수 없는 구절처럼

너는 무얼 좀 읽다가

세상에는 보기 싫은 것들뿐이라며

읽던 것을 내던지고

나는 흩어진 것들을 읽어 본다

정말이지 이런 것들을 잘도 읽고 있군

아무 소리 들리지 않는 겨울밤의 고요는 견딜 만한 것이었다가도

경첩 삐걱이는 소리 하낭 무서운 적막으로 변한다

너는 두 눈 가린 채 열린 문 쪽을 가리키고

나는 곧 거기서 뭔가를 보게 된다

네가 아직 보지 못한 무엇을

야, 저, 저것 좀 봐

혼이 빠진 얼굴로 말한다

 

 

 

 

 

 

3.jpg

 

박무웅, 말뚝의 유전자




말뚝에 묶인 소는 온순하다

그깟, 힘 한번 쓰면

말뚝쯤은 단번에 쑥 뽑히겠지만

소는 그런 힘쓰지 않는다

소는 말뚝에 묶였을 때

비로소 쉴 수 있다는 것 알고 있다


소에게는 여럿의 주인이 있다

여물을 주고, 등을 쓸어주고

엉덩이에 말라붙은 똥 딱지를 떼어주는 주인

그런 주인 말고도

코뚜레와 밧줄의 끝을 쥐는 손이라면

어린아이와 늙은이를 가리지 않지만

그중 가장 마음씨 좋은 주인은

말뚝이다

밭들이 뒤엎어지고

씨앗들의 파종기가 끝나면

소는 나른한 눈꺼풀을 즐기는 것이다


사실 소는 저의 머리에

이미 두 개의 말뚝을

꽝꽝 박아놓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소는 그런 힘

함부로 쓰지 않는다

 

 

 

 

 

 

4.jpg

 

최문자, 퇴장




사람들과 이별하는 것보다 더 큰 휴식은 없다

씨 같은 것 남기지 않고

작별하고 싶었다

이별 하나를 가라앉히기 위하여 그해 나는 가장 위험했다

중환자실에서 죽음을 참으려고 몇 번이나 버튼을 눌렀다

이런!

죽음에도

사랑에게도

버튼이 있었네

이곳에서 저곳

어딜 가도 꼭 눌러달라는 배고픈 버튼이 있었네

버스 안에도

풀잎 위에도

안을 누를 수 없어

자꾸 밖을 눌렀다

휴대폰을 분실할 때마다

날아가는 문자와 사람들

이별을 이별이 아니라고 애쓰는 동안

쏟아지는 물 안에 조금 남아 있는 마음

남아있는 풀

흰 염소가 풀밭에서 그 풀을 뜯는다

수없이 버튼을 눌렀지만

여태 오지 않고 있다

흰 양말로 갈아 신고 오겠다던 사람

버튼들은 누워서 지냈다

 

 

 

 

 

 

5.jpg

 

천양희, 시라는 덫




쓸쓸한 영혼이나 편들까 하고

슬슬 쓰기 시작한 그날부터

왜 쓰는지를 안다는 말 생각할 때마다

세상은

아무나 잘 쓸 수 없는 원고지 같아

쓰고 지우고 다시 쓴다

쓴다는 건

사는 것의 지독한 반복학습이지

치열하게 산 자는

잘 쓰인 한 페이지를 갖고 있지

말도 마라

누가 벌 받으러

덫으로 들어갔겠나 그곳에서 나왔겠나

지금 네 가망은

죽었다 깨어나도 넌 시밖에 몰라

그 한마디 듣는 것

이제야 알겠지

나의 고독이 왜

아무 거리낌 없이 너의 고독을 알아보는지

왜 몸이 영혼의 맨 처음 학생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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