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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두려운 것은 여행보다 먼 곳에 있다
게시물ID : lovestory_9386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3
조회수 : 140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12/18 13:24:58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박서영, 미행




버스 정류소에 앉아 목련꽃 떨어지는 거 본다

정확한 노선을 따라가는 세월 보려고


정류소를 향해 가는 당신의 뒤를 미행한 적 있다

당신은 다리 위에 멈춰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자신의 검은 입안을 보여 주었다

무슨 말이든 해 보라고 가던 걸음 딱 멈추고

뜨거운 입천장을 보여 주는 슬픔


어쩌다 목련꽃 피는 밤에 우린 마주쳤을까

피려고 여기까지 온 목련은 지고

버스는 덜렁덜렁 떨어진 목련 꽃송이 태우고 간다

나는 하나 둘 셋 세월을 세다가 그만둔다

넷 다섯 여섯 방향을 세다가 그만둔다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색된 목련 꽃송이들이

툴툴거리며 버스를 타고 어딘가 가고 있다

일곱 여덟 나는 떠나는 이들의 뒤통수를 세다가 그만둔다

자꾸 흔들리고 자꾸 일렁거리는 것들은

자신들이 지독히 슬픈 세계라는 걸 알고 있을까


내 손을 뿌리치며 가는 당신을 따라간 적 있다

당신은 도망가다가 갑자기 길 위의 늙은 구두 수선공 앞에서

밑창 떨어진 구두를 벗어 수선을 맡겼다

가던 걸음 딱 멈추고 뜨거운 맨살을 보여 주던 구두

나는 당신 곁에 서서 행방이 묘연해진 기억들을 떠올렸다

사라지고 싶은 표정으로 아직 사라지지 않은

사랑이 수선되고 있다


여기저기 꿰매고 기워져서 행복도 불행도 아닌

이상한 이야기들이 헝겊 인형처럼 되살아나고 있다

입김으로 체온을 불어넣고 얼룩과 무늬를 그려 넣고

음과 양의 감정까지


통증을 알아버린 인형이 목련나무 아래 버려져 있다

당신을 생각하면 힘들고 슬퍼요, 나무 뒤에 숨은

복화술사의 목소리가 휘파람 같다


정확한 버스 노선을 따라가는 당신 뒤에서

이해할 수 없는 꽃송이들, 눈송이들, 흰 주먹들이 떨어진다

어떻게 녹아내려야 하고 멈춰야 하고

사라져야 하는가


어떻게 이별하고 잊어야 하고 퇴장해야 하는지

계속 물었는데 아무도 대답이 없다

 

 

 

 

 

 

2.jpg

 

임솔아, 뒷면




발소리가 조여온다

발소리가 팽팽하게 조여온다


가로수의 조용함이 뾰족해진다

가로수의 음영이 날카로워진다


모퉁이에서 뒤돌아선다


누구야, 왜 따라와

밤길이 걱정이 되었어.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내가 모르는 내 비밀이 발끝에 엉겨 붙는다

내가 모르는 내 비밀이 덥석 자라난다

내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잠시 공원에 앉아 미끄럼틀을 바라본다

미끄럼틀의 밝은 면은 비어 있다

미끄럼틀의 어두운 면은 숨어 있다


아무도 없는데 센서등이 켜지고 꺼진다

고양이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3.jpg

 

이명수, 카뮈에게




카뮈는 나에게 여행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두려움이라고 했다

하나, 카뮈는 멀리 여행한 적이 없다

차를 타는 것에 병적인 불안, 공포가 그를 차로 실어 날랐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이스탄불 블루모스크 광탑(光塔)을 올려다보며

신심이 깊으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을 때

뒤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때로는 위험한 곳이 안전하다

폭탄이 떨어진 자리가 더 안전하지 않은가

카뮈여, 닥쳐올 위험에 대한 두려움보다

두려움 뒤에 무엇이 올까를 걱정하자

카뮈여, 안전한 것은 얼마나 먼가

그러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를 지나게 해 준 길에 대해 감사하자

별들이 내 앞길을 비춘다

어둠의 밀도가 깊어질수록 별은 더 빛난다

삶의 의미보다 삶을 더 사랑하듯

나는 여행의 위치보다 여행을 더 사랑한다

어느 계절을 두려움 없이 사랑하듯

카뮈여

두려운 것은 여행보다 먼 곳에 있다

 

 

 

 

 

 

4.jpg

 

박소란, 나의 거인




너는 조금씩 작아지고 있다

어제는 앉은뱅이만큼 오늘은 책상 서랍만큼

서랍 속에 숨어 숨죽이고 있다

나는 종일 책상 앞에 있다

너를 잃고 싶지 않아서

작은 것들을 궁리하고 있다

보일 듯 말 듯 한 글자

글자와 글자 사이 희미하게 찍힌 점 같은 것

언젠가 너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책 속에 살게 될까

너를 찾기 위해서 나는 그 미지를 모조리 찢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래, 나는 전전긍긍하고 있다

작아지고 작아져서 무엇으로도 머물지 않을 너를

내가 사랑할 수 있을까

내가 기억할 수 있을까

그럴수록 나는 조금씩 커지고 있다

거인이 되고 있다

더는 네 앞에 설 수 없는 흉측한 몰골이 되어

너를

너를 닮은 것을 붙들고 자꾸만 달아나려는 그것들을

책상 곳곳에 묶고 가두며

나는 종일 책상 앞에 있다

책상은 조금씩 낡고 있다

그럴수록 나는 조금씩 커지고 있다

나의 거인은 빈 책상을 지금 맹렬히 사랑하고 있다

 

 

 

 

 

 

5.jpg

 

한인준, 어떤 귀가




나도 모르게 나는 너에게 '어떤' 말을 하고 만다

'어떤' 말을 하고 나면 '어떤' 말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닌데

우리는 입을 벌린다

입을 다문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무엇이 말하는 걸까

내 얼굴에는 언제나 '어떤' 입이 놓여 있다

입 속에는 '어떤' 집이 놓여 있다

현관문을 돌린다

이곳으로 아무도 도착하지 않는다

식탁에 앉아 조용히 밥을 먹는다

밥을 먹다가 또 무엇을 말했던 걸까

내 곁에 둘러앉은 '어떤' 침묵들

'어떤' 말로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말로도 말하지 않는 우리가 대화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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