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BGM] 나는 나에게 다 들켜버렸다
게시물ID : lovestory_938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5
조회수 : 136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12/05 21:43:46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문정희, 거위




나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는 배우인 것 같다

분장만 능하고 연기는 그대로인 채

수렁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


오늘 텔레비전에 나온 나를 보고

왝 왝 거위처럼 울 뻔했다


내 몸 곳곳에 억압처럼 꿰맨 자국

뱀 같은 욕망과 흉터가

무의식의 주름 사이로

싸구려 화장품처럼 떠밀리고 있었다


구멍 난 신발 속으로 스며들어오는

차갑고 더러운 물을 숨기며

시멘트 숲 속을 배회하고 있었다


나는 나에게 다 들켜버렸다

빈틈과 굴절 사이

순간순간 태어나는 고요하고 돌연한 보석은

사라진 지 오래

기교만 무성한 깃털로

상처만 과장하고 있었다


오직 황금알을 낳기 위해

녹슨 철사처럼 가는 다리로 뒤뚱거리는

나는 과식한 거위였다

 

 

 

 


 

2.jpg

 

홍일표, 악기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빈 그릇에 담긴 것은 다 식은 아침이거나

곰팡이 핀 제삿밥이었다

콜로세움의 노인도 피렌체의 돌계단 아래 핀 히아신스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다시 보지 못한다는 것은

유적의 차가운 발등에 남은 손자국만큼 허허로운 일이나

한 번의 키스는 신화로 남아 몇 개의 문장으로 태어났다

불꽃의 서사는 오래가지 않아서

가파른 언덕을 삼킨 저녁의 등이 불룩하게 솟아올랐다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지상의 꽃들은 숨 쉬지 않았다

눈길을 주고받는 사이 골목은 저물고

나는 입 밖의 모든 입을 봉인하였다

여섯시는 자라지 않고 서쪽은 발굴되지 않았다

삽 끝에 부딪는 햇살들이 비명처럼 날카로워졌다

흙과 돌 틈에서 뼈 같은 울음이 비어져 나왔다

오래전 죽은 악기였다

음악을 놓친 울림통 안에서 검은 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다만 노래를 가지러 왔다

 

 

 

 

 

 

3.jpg

 

이서화, 웃음 스티커




다양한 표정에서

웃음 하나를 떼어 낸다

갇혀 있던 웃음의 자리가 드러난다

매끈한 표현

세상에 웃음보다 쉽게 떨어지는 것도 없다

다이어리 겉장에 혹은 악수에

살짝 떼 내어 붙인 웃음 스티커들

문구점이나 선물 가게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웃음들

그러나 그 떼어 낸 빈자리마다

다시 씁쓸한 표정이 있다는 것

너무 쉽게 떨어지는 웃음이 있다는 것


표현하기 어려운 낱말의 이모티콘

사용설명서 없이 떼고 붙이는 동안

생략된 말들이 언제 저렇게 끈적거리는

뒷면을 갖고 있었던 것인지

어떻게 매끈한 감정에 붙어 있었던 것인지


봉지를 뜯는 순간

다 써야 하는 모둠 스티커들

하트 몇 개는 여전히 붙일 곳이 없다

순간의 감정을 뗀 빈 곳은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곳이다

 

 

 

 

 

 

4.jpg

 

서윤후, 원뿔의 행진




모가 나고 성가신 너를 다루느라

나는 동그라미가 되었다


우리가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손톱과 무릎과 가벼운 담요로도 충분할까

이따위의 질문들로 채워진 모퉁이에서

가방은 커졌고 담을 것은 더 많아졌다


여기까지는 희망이었다 치자

행복을 말하는 게 우스워진 대화 속에서

너는 뾰족하고 나는 원만하고

대치된 두 잔의 커피 사이에서 엎어지는 세계

아무도 젖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해서


우리는 처음 본 빵집 앞에서도

자주 멈추고는 서성거렸다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이 바라본 우리는

꼭 눈치껏 바닥을 쪼는 비둘기 같아서

죽은 새들의 부리만을 모아 원뿔을 채웠다


절망의 조형물로 우아해지고


나는 그런 너를 지탱하느라

희망에 밑줄을 그을 수 있었다

그것을 나는 읽어주고 너는 내뱉고만 있어서


때때로 서있을 수 없는 우리가

그림자로 나란해지는 저녁

어둠을 찢으려는 꼭짓점으로부터

나와 너의 전개도가 눈금도 없이

촘촘해진다


지긋지긋 지그재그

 

 

 

 

 

 

5.jpg

 

박소란, 울지 않는 입술




입술을 주웠다

반짝이는 입술이었다

언젠가

참 슬픈 노래로군요, 말했을 때 그 노래가 흘리고 간 것은 아닐까

넌지시 두고 간 것은 아닐까


서랍 깊숙한 곳 아무도 모르게 숨겨둔 입술

취해 돌아온 날이면

젖은 손으로 입술을 꺼내어 한참 동안 어루만졌다

컴컴한 귀를 두고 입술 앞에 무릎 굻기도 했다


노래하지 않는 입술, 나를 위해

울지 않는 입술

입술에 내 시든 입술을 잠시 포개어보고도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그 붉고 서늘한 것을

돌려주어야지 슬픔의 노래에게로 가져다주어야지


내 것이 아닌 입술

여느 때와 같이

침묵의 안간힘으로, 나는

견딜 수 있다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