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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국, 먼지의 밀도
그의 가방에는 구름이 가득 차 있다
그가 평생 벌어 온 것은 먼지였을 뿐
한낱 먼지들을 모으기 위해서 그의
운동화는 그렇게 낡아 왔다
그의 운동화 끝에 앉은 표범은
발톱과 근육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기억이란 쓸모없는 것, 어떤 기억도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먼지들도
나름대로 밀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는 가끔 가방에 귀를 기울인다
텅 빈 중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세월은 여백에도 흐름을 부여하는 법
밀리고 밀려와 닿은 곳에서야
귀는 예민하게 구름 쪽으로 뻗는다
공개적으로 그는 구름을 호명해 본다
그러자 물방울무늬 가득 밤이 와서
그에게 뿌리내린다. 가야 할 곳이 있다는 듯
벤치 위에 조용히 가방을 베고 몸을 눕힌다
먼지로 가득 찬 가방이 서서히 부풀어 오른다
이은림, 월하정인(月下情人)
그때 하필, 달이 사라지고 있었지
사라지는 줄도 몰랐는데
달 따위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환한 사람이로구나, 했는데
어둠이 무엇인지 일러주려는 듯
그가 눈을 감았어
그보다 더 어두울 수는 없었지
그렇게 긴 찰나는 처음이었어
어쩌면, 바람이 불었어
달이 눈을 떴지
그가 먼저 눈을 떴던가
달이라 말하니 달이겠지
달이구나 말하니 달빛 흐르겠지
달빛에 대한 의심은 불순해
희미해지는 뒤태를 의심하는 것만큼
사라지기 위해 존재하는 둥글고 환한 것
그날은 보름이었는데
내가 만진 것은 과연 누구였나
어디 한번 대답해봐, 손가락들아
둥글어지기 위해 사라지던 차가운 달
명심해
온전한 것들은 위험하기 짝이 없지
이인구, 잠자리
제 생각보다 멀리 난 듯
앉으려다
더 가야 할까
이곳이 맞기는 하는 걸까
넉넉한 수평도 아닌 수직
실은 백척간두와 같은 나무 대궁 끝을 앞에 두고
잠자리 망설인다
저 초조하고 신중한 선회
앉았어도 날개를 접을 수 없는
만 개가 넘는 홑눈의 긴장
잘 보려, 멀리 보려는 운명의 답답한 피로여
잠자리를 잡았다 놓아 준다
놓인 잠자리는 멀리 단번에 난다
생각 하지 않고 망설이지 않고
알 도리 없는 운명에 한번
제대로 잡혔다 풀려난 연후에야
제 모습을 찾아가는 것일까
이제야 빈집 뒷마당에 홀로 선 나는
어떤 운명에 잡혔다 놓인 것일까
문태준, 어느 겨울 오전에
나목이 한 그루 이따금씩 나와 마주하고 있다
그이는 잘 생략된 문장처럼 있다
그이의 둘레에는 겨울이 차갑게 있고
그이의 저 뒤쪽으로는 밋밋한 능선이 있다
나는 온갖 일을 하느라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며
한번은 나목을 본다
또 한번은 먼 능선까지를 본다
그나마 이때가 내겐 조용한 때이다
나는 이 조용한 칸에 시를 쓰고 싶다
그러나 오전의 시간은
언덕을 넘어 평지 쪽으로 퍼져 금세 사라진다
심재휘, 언문으로 쓰여진 밤
옛사랑이 보내준 제주 귤차를 우린다
이내 밀려오는 향기와 달리
그가 있는 옛날은 남쪽처럼 멀고도 희미하여서
무언가 얼비치려다 곧 맑아지는 찻물의 표정
차 안에 여러 맛이 섞여있는지 몇 가지가
어렴풋한 저녁이다
가지를 쥔 저녁 새가 조금씩 옆걸음하여
밤도 아니고 저녁도 아닌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저녁은 또 조금 어두워지고 어두워져서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입 안에 물컹하며 남아도는 것은
그저 맹물 맛인데
입도 아니고 코도 아닌 곳을 스치는 야릇한 향기
이런 심심한 연애가 세상에 만연하여서 아프고
아팠다는 말만으로는 쉽게 해석할 수 없는 저녁들
따뜻한 맹물 위를 겉돌기만 하는 향기처럼
서로 영원히 섞일 수 없는 것들은 왜 만나
어스름 쪽을 돌아보는 오늘 내 눈빛은
언문으로 쓰여진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