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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몽골의 양양 및 번성 공략
게시물ID : history_1536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9/5
조회수 : 3838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4/04/14 13:12:34

쿠빌라이 칸을 비롯한 그의 참모진들은 거의 1년여에 걸쳐 남송 공략에 대한 작전을 계획했습니다. 공격 경로는 장강 유역이었고 첫번째 목표는 장강 중류의 요충지인 양양(襄陽)과 번성(樊城)이었습니다. 이 계획은 남송에서 귀부한 유정(劉整)의 헌책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이윽고 개봉을 병참기지로 하는 보급망이 철저하게 조성되었습니다. 일명 '전선재무청(戰線財務廳)'의 책임자가 된 사람은 무슬림 경제관료인 '알리 벡'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르 유프나라는 이름의 인물도 군수물자 조달을 담당했습니다. 전쟁을 치루는 데 필요한 보급물자에 대한 조달은 이란계 무슬림을 장으로 유대교도나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교도들이 담당했습니다.

 


지원 5년(1268) 9월, 아주(Aju)를 대장으로 하고, 한인부대를 총괄하는 역할로 사천택을 부장으로 하는 삼중구조의 원정부대가 출진했습니다. 그 수는 대략 10만이었고 이 부대는 우선 한수 좌안의 번성을 포위했습니다.

 


물론 남송측에서도 이 양양과 번성을 거점으로 하여 방비를 충분히 한 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장강 중류지역을 관할지로 하는 경호제치사(京湖制置使)인 대군벌 여문덕은 몽골을 격퇴하기 위해 동생인 여문환에게 사병을 골간으로 하여 구성된 최정예부대를 주어 방대한 군량과 장비 등과 함께 입성시켰습니다. 여문덕의 뜻은 지구전, 저항전으로 끌어 몽골군의 진공을 저지해 보고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양국 간의 최대 결전장이된 양양, 번성 전투는 6년에 걸쳐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번성을 포위한 몽골군은 도착하자마자 해자를 파고 그 흙으로 성채를 쌓아올렸습니다. 곳곳에는 파수용을 겸한 돈대(燉臺)가 지어졌습니다. 여문환의 수비병들은 이 모습을 지켜만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수비측이 바라만보고 있는 사이 양양과 번성을 둘러싼 거대한 '환성(環城)'이라는 이름의 토성이 만들어졌습니다.


 

환성은 나날이 강화되었습니다. 양양 남쪽 면에는 이중포위선이 조성되었습니다. 주위 몇 개의 높은 산구릉에는 ㅏ령부나 각 부대의 본부를 세워 그것을 연결한 포위선의 총연장은 100km를 넘었습니다. 더욱이 군사, 교통상의 요소에는 보루와 보조성이 구축되어 합계가 40군데나 되었습니다. 한수 강바닥에도 보대가 지어져 양안의 요새와 요새 사이 강수면에는 저지용 항목이 박혀진 위에 철책이 둘러쳐졌습니다. 이렇게 양양과 번성은 완벽하게 포위되었습니다.


 

몽골군은 처음부터 지구전을 펼칠 생각이었습니다.무장지대가 된 포위망 부근일대나, 더욱이 그 바깥에는 몽골 각 부대의 둔영이 펼쳐지고 그곳에서 병사들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공격자세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공격을 감행한 것은 수비측이었습니다. 번성 수비대장인 장한영(張漢英)이나 양양을 수비한 여문환의 직속부대가 초조함에 못 이개 출격해 오자 환성 위쪽은 몽골측은 벽에 몸을 숨기고 쇠뇌나 화살, 나아가서는 폭파하며 불타도록 만들어진 각종 화포(火砲)나 화기류(火器類)를 난사했습니다. 결코 몸을 드러내어치르는 백병전에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몽골측은 모든 부대가 포위선에 붙어 있었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필요에 따라 일정부대는 병참기지인 개봉이나 나아가 황하를 건너 북쪽의 본거지에 더욱이는 수도권의 쿠빌라이 막하로 되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육지에서만 포위를 준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쿠빌라이는 남송의 가공할만한 수군 전력에도 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구축한 환성의 포위선 상류와 하류에서 몽골수군의 훈련이 반복되었습니다. 그것이 대충 끝나면 육상의 각 부대와 연동한 합동 군사훈련이 몇 번이나 반복하여 실시되었습니다. 양양과 번성의 교외는 몽골 수륙군의 연습장으로 변했습니다.

 


두 번 정도 구원부대를 보냈다가 간단히 패퇴당한 남송 정부는 지원 8년(1271) 6월 범문호(范文虎) 휘하의 10만 수군을 앞세워 한수를 거슬러 북상시켰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이 날을 위해 준비를 해온 몽골군에 의해 남송 수군은 분쇄되었습니다. 쿠빌라이는 이 전쟁에서 개인의 힘이나 우연의 요소를 배제하려 했습니다. 전투에서부터 작전입안, 편성, 보급의 모든 방면에 걸쳐 전쟁을 종합사업화했습니다.


 

이런 몽골군의 공격에도 여문환은 분전하며 2년이나 버텼습니다. 이윽고 쿠빌라이는 신병기의 사용을 결정했습니다. 그것은 훌레구 울루스에서 개량되고 개발된 거대한 투석기였습니다. 페르시아어로 '만자니크' 한문으로는 '회회포(回回砲)'라고 물리는 물건이었습니다. 훌레구 울루스의 우두머리인 아바카가 큰아버지인 쿠빌라이에게 보낸 이 투석기는 알라 웃딘, 이스마일 등 기술자들과 만든 것으로 이 공성병기는 쿠빌라이와 그 막료들의 눈앞에서 엄청난 위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지원 10년(1273) 1월, 번성교외에 회회포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회회포의 공격으로 번성의 무너졌고 그 사이로 몽골군이 쇄도했습니다. 장한영은 끝내 항복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윽고 양양으로 방향을 돌린 회회포는 족히 700~800m가 넘는 하천폭을 넘어 양양성을 공격했습니다. 활이나 쇠뇌, 화포와 달리 막을 방법이 없던 이 회회포 공격에여문환은 단념하고 전군과 전 주민의 구명을 조건으로 다음달 2월에 성문을 열었습니다.


 

* 출처: 몽골세계제국

[출처] (덧붙이는 글) 쿠빌라이 칸의 양양, 번성 공략 (【부흥】네이버 대표 역사 카페) |작성자 바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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