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꾼 최초의 장거리 전화>
여러분 전화를 사용할 수 없는 우리 일상을
상상해본 적 있으신가요?
전화는 우리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입니다.
의사소통을 하려는 상대방이
나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나와 다른 나라에 있어도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전화입니다.
이러한 전화의 의사소통 편의성 덕분에
대한민국의 역사가 뒤바뀐 것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1895년 8월 20일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에게 처참해 시해 당하게 되는
을미사변이 발생합니다
을미사변이 발생한 후 치하포 나루터 주막에서
밥을 먹고 있던 한 청년이 있습니다.
당시에 치하포 나루터라는 곳은 일본인이 자주 출입하기 때문에
일본인은 일본 행색 그대로 출입하는 것이 관행이였습니다.
하지만 조신인인듯 위장을 하고 밥을 먹는 일본인을 목격하게 됩니다.
당시 청년은 을미사변 발생 조선의 국모를 시해한 일본 낭인에
대한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청년은 일본인이 조선인의 행색을 한 것을 수상히 여기기 시작하고
눈여겨 보기 시작합니다. 그때 일본인의 옷 아래로
검집이 보이자 을미사변의 주범이 조선인으로 위장하여
화를 피하려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청년은 조선인으로서 국가의 치욕을 씻어야 한다 생각하여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을 죽이기로 마음 먹습니다.
청년은 일본인과 검투를 벌여 일본인을 살해하게 됩니다.
죽은 일본인은 청년의 예상대로 을미사변의 가담자
쓰치다 라는 일본 장군이였습니다.
그 후 인천감옥에 투옥된 청년은 사형집행을 기다리게 됩니다.
하지만 사형집행 직전 감옥 안에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합니다.
당장 사형집행을 중지하라는 고종황제의 명령이였습니다.
청년의 소식을 들은 고종황제가 다급히 전화로
사형집행을 멈춘 것입니다.
그때가 서울과 인천의 전화가 개통된지 3일이 지난 후 였습니다.
이 전화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장거리 전화입니다.
그렇다면 왜 최초의 장거리 전화가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꾸었을까요?
고종황제가 전화로 살린 청년은 김창수
김창수란 인물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설립에 참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된
백범 김구 선생 입니다. 그렇습니다.
조선의 고종황제가 우리나라 최초로 사용한 장거리 전화가
위대한 독립운동가인 백범 김구 선생을 살림으로써
대한민국의 역사를 뒤바꾼 것입니다.
만일 장거리 전화가 개통이 안 되었다면,, 백범 김구 선생님은 우리의 역사서에 존재하지 않았을 지 모릅니다.
이 일화는 공식적으로 전해지지 않았다가, '백범일지'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라네요.
또한, 역사를 공부하면서 고종 황제가 아관파천 말고는 눈에 띄는 업적이 없고 국력 신장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서 답답했는데 이런 하나의 큰 업적을 남겼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