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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자, 비탈이라는 시간
나의 모든 비탈은
앵두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서 곤두박질치다
나를 만져 보면
앵두 꽃받침이 앵두를 꽉 잡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산비탈에 앵두나무를 심고
우리들을 모두 앵두라고 불렀다
앵두꽃이 떨어져 죽을 적마다
우리는 자꾸 푸른 앵두가 되었다
신작로에 나가 놀다가도
앵두는 앵두에게로 돌아왔다
어쩌다 생긴 흉터는 모두 앵두꽃으로 가렸다
붉은 흉터들까지
외할머니는 꼭 앵두라고 불렀다
푸른 앵두가 이제 막 익는 거라고 말했다
지난여름 내내
비탈에 있는 동안
폭우에 앵두나무 몇 그루가
몸부림치다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를 만져 보았다
앵두의 절반이 사라졌다
공광규, 너라는 문장
백양나무 가지에 바람도 까치도 오지 않고
이웃 절집 부연(附椽) 끝 풍경도 울지 않는 겨울 오후
경지정리가 잘 된 수백만평 평야를
흰 눈이 표백하여 한장 원고지를 만들었다
저렇게 크고 깨끗한 원고지를 창밖에 두고
세상에서 가장 깊고 아름다울 문장을 생각했다
강가에 나가 갈대 수천 그루를 깎아 펜을 만들어
까만 밤을 강물에 가두어 먹물로 쓰려 했으나
너라는 크고 아름다운 문장을 읽을 만한 사람이
나 말고는 세상에 없을 것 같아서
저 벌판의 깨끗한 눈도 한 계절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결심하였다
발목 푹푹 빠지던 백양리에서 강촌 가던 저녁 눈길에
백양나무 가지를 꺾어 쓰고 싶은 너라는 문장을
서안나, 팔괴터널을 지나며
어두울 무렵 당신을 지나칠 것이다
당신을 생각하면
입 안쪽이 헐곤 했다
위통은 터널처럼 깊다
상처란 더러운 눈과 혀로
짐승처럼 속되게 떠도는 일
이마에 핏줄 세우고
손등에 당신이라 써본다
헛되고 헛되다
소리 내어 읽어본다
맹세란
마음이란
식은 죽처럼 서늘한 목소리
어두워지는 내 귀를 접으면
당신은 어디까지 어둠인가
팔괴 터널을 지나며 생각했다
나는 왜 당신을 닫을 수 없는가
당신을 빠져나가면
다시 당신이다
정재학, 초봄
나무에 죽은 새들이 피어있었다
그때 아름다움이 없던 것은 아니나
'아름다움'이라는 글자가 없었다
새들이 열매를 뱉어내었다
붉은 동그라미들이 떨어졌자
태양 몇 개가 튀어올랐다
채수옥, 텍스트
첫 페이지는 너의 마른 등
이 절벽을 해석하는 방법은 눈물이다
눈물 속에서 만져지는 등은 붉다
바람은 다른 방향에서 불어오고
흔들리는 네 눈빛에 밑줄을 긋는다
꽃이 피고 지는 행간 속에서 도 다른 너의 감정은 완성된다
문 밖에는
한 철 내내 나무를 다 이해하고 피어난 꽃들이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데
밤을 새워 한 문장도 해석할 수 없는 너를
그만 덮기로 한다
뜨거운 내 입속을 헤집어 단숨에 나를 읽어버린,
지느러미 없는 물고기가
어두운 골목 끝을 헤엄쳐 간다
내 혀를 뽑아 절벽을 읽는다
언제나 되풀이 되는
안녕
다시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