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는 판결문 하나를 던져놓고 물었다. 그것은 무죄 판결문이었다.
최사장님 설명에 따르면, 그는 분명히 황계장에게 3,000만원 뇌물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황계장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무죄 이유는 최사장의 진술, 즉 황계장에게 3,000만원을 건넸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허..참. 저는 정말로 황계장에게 3,000만원을 주었는데요..허..참"
그는 정말로 허탈해 했다.
검찰이 최근 최사장을 3,000만원 뇌물공여죄로 기소했다. 그가 나를 찾아온 이유였다.
"변호사님, 어떻합니까? 3,000만원 줬다고 인정하면 됩니까? 아니면 부인할까요? 황계장도 무죄를 받은 판에 저만 자백해서 유죄 판결 받으면 억울하다 아닙니까?"
고민이 되었다. 최사장 말이 진실이라면, 즉 최사장이 정말로 3,000만원을 황계장에게 준 것이라면, 1심 판사는 오판한 것이다.
"글쎄요, 좀 검토해 보겠습니다. 사장님 말씀대로 사장님만 뇌물공여죄로 유죄 판결을 받으면 좀 억울..아니 이상...아니 억울할 것 같구요. 그렇다고 사장님은 정말로 돈을 줬다고 얘기하셨는데, 실은 그게 아니었다고 번복하는 것도 이상..아니..이상해 보일 것 같구요.."
"네 변호사님, 고민해 봐 주시고요..허 참. 살다보니 별일이 다 있네요.. 연락주십시오."
그는 판결문을 나에게 건네주고 사무실 밖을 나갔다.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요?"
나는 사무실에 있는 다른 변호사님들께 자문을 구했다.
다들 흥미롭게 생각하면서도 뾰족한 답은 내놓지 못했다.
일명 부인파 변호사들은 "김변, 요즘 무죄 받기 참 힘든데, 받은 사람이 무죄인데, 준 사람도 무죄 받아야지! 부인해"라고 주장했다. '그래 나도 무죄받고 싶다' 솔직한 속마음이었다.
자백파 변호사들은 "그래도 그렇지, 변호사 윤리라는게 있는데, 의뢰인이 돈을 줬다고 설명하는데, 그와 반대되는 변론을 할 수 있나?"라고 말했다. 고리타분한 이야긴가 싶으면서도 존경스러운 맘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나를 설득시킨 사람은 내가 사무실에서 제일 존경하던 허변호사님이었다.
"김변, 그냥 자백하게. 부인하면, 검찰이 최사장을 위증으로 추가 기소할 것이네. 뇌물공여죄 무죄는 될지 몰라도 위증죄로 처벌될 것이야"
맞는 말이었다. 최사장은, 황계장의 뇌물수수죄 재판에서 증인으로 나와 선서한 후 "김사장에게 3,000만원 뇌물을 주었습니다"라고 증언을 했었다. 그런데 최사장이 본인의 뇌물공여죄 재판에서 김사장에게 3,000만원을 준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게 되면, 이는 자신의 증언을 스스로 뒤엎는 셈이 되고 만다.
검찰은 그런 최사장을 괘씸하게 볼 것이 분명하고, 곧바로 위증죄로 기소할 것이다.
"김변, 자백은 하되, 최대한 설득력 없게 자백을 하게나. 가령 일시나 장소 등을 가능하면 추상적으로 얼버무리고, 그냥 잘못했다고 빌어!"
허변호사님 말이 정답이 아닐까? 변호사 윤리에 어긋나지도 않으면서, 무죄 판결도 기대해 볼 수 있으니까, 뇌물을 줬다고 자백하더라도 뇌물수수자가 무죄인데, 뇌물공여자만 유죄로 판단하는 것은,,,조금 이상하니.
허변호사님 말대로 변론하기로 결심했다.
드디어 최사장의 1심 재판일, 나는 최사장과 함께 법정으로 들어가 방청석에 앉았다.
우리 차례가 되었다.
"2022고단1305 사건, 피고인 최길영 나오십시오"
나와 최사장은 조금 긴장한 채로 착석했다.
"피고인의 입장은 무엇인가요?" 재판장이 물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피고인은 황계장에게 3,000만원을 준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시일이 경과하여 그 당시 상황을 제대로 기억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자신의 잘못을 모두 인정하고, 선처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한하여 최대한의 선처를,,,,"
갑자기 재판장이 나의 말을 끊었다.
"이 사건은 누구보다 제가 제일 압니다. 황계장 사건은 검찰이 항소해서 2심 진행 중입니다. 2심 결과를 본 후에 이 사건도 선고를 하겠습니다"
재판장님은 거침이 없었다. 알고보니, 황계장 사건의 재판장이었던 것이다.
최사장의 말은 믿기 어렵고, 그래서 황계장이 3,000만원 뇌물을 받았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그 장본인이었다.
"변호사님, 수고하셨습니다."
"네, 최사장님, 고생하셨구요, 일단 오늘은 돌아가셔서 푹 쉬세요."
"변호사님, 저는 어떻게 될까요?"
"글쎄요, 저도 확답은 드리지 못하겠지만, 잘 되지 않을까요?"
황계장 사건의 2심 판결이 선고되었다.
"황계장은 무죄, 검사의 항소를 기각한다."
황계장 2심도 1심과 마찬가지로 무죄가 선고된 것이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만약 황계장이 2심 판결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다면, 곤란할 뻔했다.
최사장도 뇌물공여죄 유죄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최사장의 1심 판결 선고일.
나는 너무나 긴장되었다. 최사장은 이미 법정에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사장님, 너무 걱정 마시구요, 잘 될겁니다"
"네, 김변호사님. 고맙습니다."
재판장님은 엄숙한 목소리로 판결문을 낭독했다.
"피고인은 황계장에게 3,000만원을 주었다고 자백하고 있다. 그러나 피고인의 자백은 여러가지 정황에 비추어 볼 때, 모순되어 믿기 어렵다. 더구나 황계장의 뇌물수수사건은 2심까지 무죄가 선고되었다. 피고인이 황계장에게 3,000만원을 주었다는 공소사실은 증명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피고인은 무죄"
나는 너무나 기뻤다. 정말 오랜만에 무죄 판결을 선고받았다.
변호사로서 무죄 판결을 받는 것 만큼 또 영예로운 순간이 있을까?
"최사장님, 너무 걱정 마시라고 제가 말씀드렸죠? 너무 잘 되었습니다"
"네, 허허, 네 그렇네요,,"
무죄판결을 받은 당사자는 최사장인데, 정작 최사장은 덤덤했다.
머쓱한 느낌마저 들었다.
"김 변호사님, 수고 많으셨구요, 저 때문에 너무 고생했어요, 그리고,,,참 세상이 쉽네요. 판사님도, 검사님도, 변호사님도, 모두 잘 속으시는 것 같아요"
그는 알듯 말듯한 웃음을 지으며 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