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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일, 기분으로 된 세계
다섯 장의 종이를 오려 기분을 만들었다
다섯 장의 종이가 되기 위해
팔과 다리가 모호해진다
아홉 시가 되려다가 아홉 시 이후가 되는 시곗바늘들 모든 밤이 저녁을
이해하고 아홉 시를 용서했다
빗방울을 세기 위해 열 개의 손가락이 생겼고
맥주를 따다가 손을 발견했다
지나가는 사람의 손목에
백합이 피어 있다
음료수 병을 지나 꽃과 부딪친다 나는 이 거리예요
거리를 걸으면 지나가는 사람의 기분이 된다
기분이 필요한 다리를 건너
기분으로 만든 기둥에 대해
조금 춥다면 가침을 하자 겨울이 올 때까지
밤을 말하려다가 공을 놓치고 손이 으깨어졌다
컵이 깨져 잡을 수 없을 때
컵은 배경 음악이 없고
당신과 낭떠러지와 자동차 바퀴는 한통속이다
저기 날아다니는 것은 작은 벌레인가 시간의 눈인가
밤을 말하려다가
건반 위로 뛰어오르는 고양이를 이야기했다
고양이를 만나려면
고양이의 기분과 피아노가 필요하다
김기택, 눈먼 사람
똑똑 눈이 땅바닥을 두드린다
팔에서 길게 뻗어 나온 눈이 땅을 두드린다
땅속에 누가 있느냐고 묻는 듯이
곧 문을 활짝 열고 누가 뛰어나올 것만 같다는 듯이
눈은 공손하게 기다린다
땅이 열어준 길에서 한 걸음이 생겨날 때까지
팔과 손가락과 지팡이에서 돋아난 눈이 걷는다
한 걸음 나아가기 전까지는
거대한 어둠덩어리이고 높은 벽이고 아득한 낭떠러지다가
눈이 닿는 순간
단 한 발자국만 열리는 길을 걷는다
더듬이처럼 돋아난 눈은 멀리 바라보지 않는다
하늘을 허공을 올려다보지 않는다
나아갈 방향 말고는 어느 곳도 곁눈질하지 않는다
눈에 닿은 자리, 오직 눈이 만진 자리만을 본다
어쩌다 지나가는 다리를 건드리거나
벽이나 전봇대와 닿으면
가늘고 말랑말랑한 더듬이 눈은 급히 움츠려든다
눈이 두드린 길이 몸속으로 들어온다
온몸이 눈이 되고 길이 된다
허리가 잔뜩 줄어들었다가 쭉 펴지며 늘어난다
몸 안으로 들어온 길만큼
한 평생의 체중이 실린 또 한 걸음이 나아간다
홍일표, 태어나는 편지
개의 귀에 도달한 소리의 빛깔에 따라
저녁의 방향이 달라지고
이목구비가 없는 사물들의 심장소리에 감전된 개는
컹컹 보랏빛 꽃으로 핀다
밤을 열면 어젯밤의 결심과
두 번 다시를 중얼거리던 어두운 거리와
심장이 없는 목각인형들이 또박또박 걸어 나오고
소나기는 제 슬픔의 무게에 놀라 쥐고 있던 허공을 놓아버린다
어둠은 어둠을 지우기 위해 태어나지만
물의 목소리를 잊고 얼음 조각이 되는 시간
하늘엔 죽은 새들이 몰려다니며 구름 속에서 폭발하고 가끔
거룩하게 눈이 내린다
순간, 순간 태어났다 죽는
숨기면서 보이는 아침의 역설
파닥이던 물결이 결심하기 전에 다시 개들이 짖는다
얼어붙는 강물을 흔들며 컥컥, 물의 숨결에서 숨이 빠져나간다
강연호, 불우
불우라는 말로 생을 요약하기에는 늘 저녁이 길었다
낮잠을 한숨 자고 일어나니 목젖이 눌렸다
밤은 또 왔지만 눈이 가만가만 내려서 차갑게 따뜻했다
손바닥에 묻은 실밥 어둠을 겨우 뜯어낸 뒤 쌀을 씻으면 세상이 사무쳤다
노안이 오래됐으나 멀리서 보는 게 익숙했으므로 당신을 떠올리지 않아도 견딜 만했다
불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말똥말똥 밥물 끓어오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숟가락이 무거웠다
물그릇에 살얼음이 잡혔다
다시 잠 못 들고 뒤척이면 알전구의 필라멘트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자정 너머의 치렁치렁한 그림자를 불우라는 말로 싹둑 접기에는 언제나 생이 무례했다
송재학, 달맞이꽃
달빛의 불안은 꽃에게도 도착했다
달빛은 손금의 점성술을 믿는다
거기 새겨진 소름들, 달맞이꽃을 배달하는 물결은
소박한 등롱을 얻었다
느린 호흡을 하는 어둠이나 불빛도 기계식 아가미가 필요하려나
달맞이꽃은 달의 통점까지 웃자라서
초승에서 그믐까지의 홍등이 왜 죽음을 따라오는지 프린트한다
물결을 거느리고 꽃냄새가 종이배처럼 도착했다
바람의 손가락들이 죄다 달을 가리킨다
달의 가면이 변색하니까 달의 인기척을 향해 컹컹 개가 짖는다
월식이다
달 속에 빨려 들어가는 것들만큼
달에서 빠져나오는 향기 때문에 사정없이 개가 짖는다
돌아오지 못하는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