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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아침 항구에서
바다가 아침에 내게 갈치 상자를 건네주었네
해풍에 그을린 어부들의 굵은 팔뚝으로
미로를 헤엄치는 외롭고 긴 영혼을
빛의 날카로운 이빨을
한 번도 건너지 못한 멀고 먼 곳을
깊은 풍랑을
갈치 상자만한 은빛 가슴을
푸른 바다가 검은 내게 배를 대고서
김소연, 꿀벌들의 잘난 척
꽃을 발견했을 때
꿀벌은 하루 종일 방황하던 바로 그 날개로
오로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꽃의 아름다움에
탄복해서가 아니라 꿀이 여기 있다고
소리치기 위해서
오로지 춤의
박자와 동작을
방향과 거리와 맛을
알리는 데에 썼다
꽃이 꽃 한 송이가 아니라 오로지
밥 한 공기로 보였으므로 꽃이 아름다운 색깔을
지니게 된 진짜 이유를
잊지 않고 오로지
살았으므로
이승희, 화분
늙은 토마토는 자라는 것을 멈추고
좀처럼 늙지 않았다
나 이제 늙어서 더 늙을 게 없으니
어쩌면 좋으냐
사각의 흰 스치로폼이 거품을 물고 늘어지는 시간입니다
어두워지길 기다려 뱀처럼 고개를 쳐든 버섯들
그네 타는 아이의 흰 발목처럼
귀두를 쑤욱 내밀며
토마토의 발밑에 제 뿌리를 박아 넣고
집 한 채 짓습니다
고요조차 몸 둘 바를 몰라 비린내를 풍기는
비밀스런 동거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화분은 고요했습니다
아침이면 버섯은 실처럼 가늘어져
흔들리는 이빨을 매달고 사라졌습니다
내 생은 자꾸만 제목이 바뀌는 책
제목 없이 시작되는 영화 같습니다
이채영, 사막의 나팔꽃
줄기도 잎도 없이 곧바로 땅에서 피워 올린다
찢어질 듯 부드러운 입술로 편곡한 악몽을 모래산이 무너지도록 질러대고 있다
모래산의 높이를 알지 못한 채 다투어 피는 용기가 모래로 쏟아지는 귀가 있다
잔향이 짧아서 더욱 또렷한 조화
집요하게 두근거려 혁명을 꽃처럼 펼쳐놓고 시시각각 관찰한다
꽃잎을 뚫고 들어온 태양의 죄질은 가볍다 넘치는 소리에 뜨고 질 뿐
태양 아니고는 무엇도 그 소리에 시선이 부서지지 않는다
이성목, 그 저녁의 흐느낌처럼
어둠에 등을 대고 부음을 듣는다
목덜미를 스쳐 어깨를 넘어가는
울음은 주름살 사이에 고여도 깊다
그렇게 떠날 것은 무엇인가
기별을 꽃처럼 전할 것은 무엇인가
맺혔다가 풀리고
풀려서 수런거리는 강물이
한 몸을 받아 철렁 내려앉은 봄날
낮고 아득한 흔들림에 귀 기울이는데
꽃잎 한 장 이마를 짚는다
그 찬 손에 화들짝 깨어나면
얼굴 가득 번지는 연꽃
붉게 피었다 져도 나에게는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이 있는 듯도 하건만
사는 일이 이렇게
어둑해 질 것은 또 무엇인가
당신에게 살을 섞어도 모를
나는 누구냐고 자꾸 되물으며 여자가
아이를 지우고 돌아온
그 저녁의 흐느낌처럼
아파서 손 댈 수도 없는
멍이 배에 가득 번지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