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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몇 해째 나는 얼굴을 갖지 못했다
게시물ID : lovestory_9363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4
조회수 : 85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09/30 23:36:12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변종태, 물고기의 호흡법




물에서 태어났다고 흐르는 은유로 말하지 마라

물은 고여 있으나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서

흐르고 있으나 흐르지 않는 영물이라서

깊숙이 뿌리박힌 소나무가 송진을 길어 올리는 일처럼

일상의 낙관적 은유를 낙을 때마다

햇살은 비관적 미소를 던지는 날씨라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물속 소나무가 거꾸로 서서 자는 잠이라서

물고기들이 입만 벙긋거린다고 사는 일이 아니듯

그렇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물고기의 호흡법을 닮는 것이라서

아가미로 뱉은 후 들이마시는 깊은 호흡과도 같은 것이라서

물속에 머리를 담근 채 오백 년 넘게 서있는 삶이라서

그렇게 다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물속에서 곧 숨이 끊어지지 전에

수면 위로 떠올라 긴 한숨을 내뱉는 일이라서

물속 은유를 삼키는 물고기의 호흡법으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2.jpg

 

마경덕, 풀벌레 소리를 수확하는 계절




바람의 체온이 내려가고

풀잎에 열린 벌레소리가 익었다

방울벌레 풀종다리 철써기 귀뚜라미

잡초가 소리를 수확하는 계절

제초제를 뿌린 곳에는 소리의 씨가 말랐다


여름내 소리를 키우느라 허리 굽은 하천가 방가지똥 고마리

오가는 발소리에 흠칫 일손을 멈춘다

땡볕아래 그늘을 짜고 품에 맞는 어둠을 들인 건

누대를 이어온 그들의 농사법


바람에 혀끝이 서늘해질 때

으슥한 둑길에 떨어지는 맑고 처량한 소리

잘 여물었나, 이리저리 흔들어보고 완숙한 소리만 골라 출하하는 야간작업장

물기가 말라 또르르, 먼 곳까지 굴러가면 상품이다


달빛과 주고받는 저 밀거래

제철에 거둔 소리의 값은 얼마일까

만돌린을 켜는 풀종다리, 양금을 두드리는 방울벌레

잡초들이 재배한 완벽한 합주는 어느 악기보다 귀맛이 좋다

그들이 소리를 키운 지는 오래지만

맑고 구슬픈 소리가 잡초의 농사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소리가 젖으면 무거워 구르지 못한다고

일손을 놓고 풀잎도 쉰다

그런 날은 둑길에 빗소리만 왁자하다

 

 

 

 

 

 

3.jpg

 

권운지, 낙화를 따라가다




한 남자가 강물에 투신하였다고 아침 뉴스가 전한다

뉴스를 전하는 화면 속으로 벚꽃 눈부신 봄이 강물처럼 출렁이며 지나간다

그 남자의 지난했을 생애가 간단명료하게 자막으로 처리되었다

낙화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작은 파문도 일으키지 않았다


벼랑까지 떠밀려와 꽃잎처럼 몸을 날린 그 남자를 생각하며

나는 지금 그 화면의 봄 속을 지나가는 것이다

그 남자가 남겼을 유서 속으로 환하게 꽃 핀 길은

분명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

해독이 어려운 은유처럼 햇살 속에는 비밀스런 향기가 섞여있다

어떤 향기는 잠결에 들은 고함 소리 같다


검은 껍질을 뚫고 나와 꽃들은 일제히 절벽에 매달려있다

미풍에도 꽃의 중심은 뜨겁고 소란하다

여린 꽃잎에서 절벽을 들어 올리는 힘을 본다

절벽 하나가 하르르 무너진다

누군가 경적을 울렸다

아찔한 어지러움에 나의 몸이 강물에 기울어졌다

 

 

 

 

 

 

4.jpg

 

문성해, 육필 원고




그저께는 잡지사에서 보내달라는 육필 원고를

주머니에 꽂고 다니다 잃어버렸지요

남의 가게 쓰레기통을 뒤지고

낙엽들 사이를 헤집던 그날 밤

백지를 잘게 찢듯 눈이 내렸어요

눈을 안경에 맞고 숨결에 섞고 보니

그날 나는 시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

시가 내게서 나간 것임을 알았어요

내가 하얀 종이 위에 지문을 묻히며 쓴 것들이

어느 음식점 밑에서 구정물에 젖다가

비루먹은 개나 쥐새끼 코끝을 간질이다가

퉁퉁 불다가

조용히 퍼지다가 마침내 찢어지니

나는 시를 잡지사가 아닌 공중으로 돌려보낸 거라는 거

그날 밤 까칠한 내 얼굴 위로

자꾸만 신발을 벗어놓던 그 눈발도

해진 주머니를 빠져나온

누군가의 졸시였단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되는 거였어요

 

 

 

 

 

 

5.jpg

 

홍순영, 수국의 비애




몇 해째 나는 얼굴을 갖지 못했다

주인의 손이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새파란 입술을 만들어 내밀었지만

그것만으로 나머지 생을 보장받는 건 아니어서 늘 조마조마했다


꽃 피우지 못하는 삶이란

무겁게 깔린 혼잣말로 발들을 덮는 밤의 연속


옆의 수국이 한 계절에도 몇 개의 얼굴을 매다는 동안

나를 묶어 놓은 초록의 집착은 세 해째 불임을 낳았다

면목 없는 계절의 이 숨 막히는 건조함


이유가 무엇일까

문제의 원인을 찾는 일에 골몰하는 한낮

흙의 내력을 의심하고, 부실한 뿌리와 변덕스런 일기를 의심했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절차에 불과하다는 걸

꽃 없는 계절을 견뎌온 내성에 균열이 가고 있음을 시인할 밖에

새벽을 닮은 얼굴로 누군가에게 말 걸고 싶다

아, 누가 내게 얼굴을 달아준다면

세상은 얼굴 없이 살아가기엔 너무 긴 터널

수많은 얼굴을 가진 그대

내게 얼굴 하나만 빌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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