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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이야기
게시물ID : sisa_121056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재미없는인간
추천 : 7
조회수 : 90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09/11 14: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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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머리에 앞서,

내가 베오베라니. 베오베라니!!!

오유 고인물 분들에게는 별것 아닐수 있겠지만 베오베는 제게 몹시 특별합니다.

부족한 제 글을 읽고서 공감해 주시고 우려해 주시고, 토론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목은 '보수 우파가 되고자 합니다'인데 의식의 흐름대로 적었더니'국힘이 싫은 이유'가 되어버렸네요.

글을 쓸 당시 뉴스에 권성동이 나와서.. .

이번엔 진짜 각잡고 보수 우파사상에 대한 설파를 해볼까도 했지만 댓글창의 참보수 님들이 여러모로 잘 정의해 주셔서 딱히 제가 덧붙일 말은 없는 듯 합니다.

그럼에도 베오베가 너무 달아서 또 글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오늘 제가 이야기 하고픈 주제는 가슴아픈 이름 '노무현' 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는 제 대학선배인 형님이 한분 등장합니다.

편의상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호칭 생략하고 '노무현', 선배 형은 익명'P'라고 칭하겠습니다.

 

2004년.

당시는 탄핵정국 이었습니다. 

IMF영향으로 심하게 기울어진 집안 환경에서 저는 어렵사리 재수 끝에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 모 대학의 새내기가 됩니다.

그 시절 대학에는 나름의 똥군기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 아르바이트를 하지않으면 생활이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부모님이 어렵사리 준비하신 200만원을 들고와 방 보증금을 내고 나니 수중에는 이미 돈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수업이 끝나면 하루 걸러 한번 선배들의 집합에 불려가 '인사각도' 같은 하찮은 이유로 기합을 받았습니다. 과사안의 사람들로 인해 더워진 그 공기가 아직도 가끔 떠오르곤 합니다. 집합이 끝나면 8시, 헐레벌떡 강남으로 버스를 타고가도 가끔 지각을 했고 그런 날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죠. 새벽3시에 끝나는 알바를 마치고 집에 첫차를 타고오면 새벽 다섯시. 막상 그 시간에는 아무리 자려해도 잠도 오질않고, 되려 수업시간에는 강의실만 옮겨다니며 잠을 자기에 바쁘니 제 대학생활은 표류중 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개강 2주만에 자퇴를 고민하게 됩니다. 이번 몇달간은 버틸 수 있겠지만 몇년을 버티는 것은 다른 문제 였습니다.

 

03학번 P는 주는것 없이 미운 사람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남자후배에게는 말을 걸지 않았습니다. 기합중에 모여 차례로 훈계하는 03선배들 뒤 맨구석 의자같은데 다리를 올리고 앉아 두세시간 핸드폰만 하고 기합이 끝나면 가끔 여후배들에게나 다가가 느끼하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그런 부류의 인간. 저는 P가 싫었습니다. 소리지르고 욕하는 다른 선배들보다도 그 사람이 더 싫었습니다.

 

3월의 어느날, P가 갑자기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아주 재수없는 말투로 "너 전라도 출신이지?" 하고 묻습니다.

속으론 무슨 욕이든 못하겠냐만 제 대답은 "예" 였고 P는 오늘 끝나고 광화문에 같이 가자더군요.

알바때문에 안된다고 했지만 그는 이미 오늘 제가 쉬는 날인걸 알고 있었습니다.

 

"야 너 돈 없지. 너 소고기 먹은지 얼마나 됐어?끝나고 사줄게."

 

자존심이 너무 상했지만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게 제 개인의 '개김'은 단체기합의 명분이 됩니다.

그리고 개기더라도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었습니다.

인천 출신의 P는 키가 190이 넘었고 키가 너무 자라 권투를 그만뒀다는 카더라 프로필을 달고 있던 사람이었거든요.

 

저는 그날 P의 차를 타고 광화문에 갔고 거기서 처음으로 노무현 탄핵 반대 촛불집회에 참석하게 됩니다. 제 인생의 첫 '정치활동(?)'이었지만 감흥은 없었습니다. 제가 노무현에 대해 아는 건 이름 석자와 직업이 전부였으니까요. 밝게 빛나는 촛불들이 예뻤지만 솔직히 좀 지루했었습니다.

그리고 약속한 소고기를 명동에서 얻어먹게 됩니다. 정확히는 양대창이었습니다.

밥을 먹으며 노무현의 안타까운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솔직히 와닿지가 않더군요. 결국 전 입장을 밝혔습니다.

 

"전 노무현을 걱정 할 여유가 없어요. 제 전재산이 15만원인데 월급날 까지 이걸로 버텨야 되요. 선배님은 차가 있고 후배에게 양대창을 사줄수 있을만큼 돈이 많기 때문에 노무현을 걱정할 수 있는 겁니다. 제 입장을 모르실 거예요."


P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슬며시 손사레를 치고선 다익은 양대창을 제 접시 위에 놓아줬습니다. 그리고는 담배를 물더니 불을 붙였습니다.

 

"미안하다... 많이먹어."

 

뭔진 잘 모르겠지만 속에서 살짝 왈칵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존감이 바닥이던 그때의 제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제 생각을 이리 명료하게 말 해 본것이 언제적 이었을까요. 아마도 그런 뿌듯함 때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위기는 좀 환기하고 싶더군요. 저도 좀 무례했다고 사과하니 P도 괜찮다며 넘어갔고 이후 자리를 옮겨 명동 탐앤탐스에서 밤새도록 각자에 대한 대화를 했습니다. P는 수다를 좋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저도 그랬습니다.

굵직한 이야기로는 P의 부모님은 경기도에서 나이트 클럽을 운영중이시고, 저와 마찬가지로 재수를 했고, 권투는 한적이 없답니다. 천식이 있어 건강때문에 고등학생때부터 헬스를 했다더군요. 

그리고 기합받을때 자기좀 노려보지 말랍니다. 03선배들 사이에서 항상 그이야기가 나온다고 합니다.

 전라도 얘기는 제가 전라도 출신이라 같이 가자고 하면 좋아할 것 같았답니다. 그리고 솔직히 기분나쁘라고 한 얘기가 맞답니다. 제 사정을 알고, 안되어 보여서 챙겨주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한편으로는 제가 좀 재수없어 보였답니다. 그게 뭔말인지 정확히는 납득이 안되었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습니다.

생각해보니 P는 한번도 후배에게 욕하지 않았고 때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좀 오해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럼 여후배들에게는 왜그러느냐 물었더니 꼬시고 싶었답니다. 너무 당당하게 말하니 오히려 할말이 없더라구요. 

 

기합에 관해서는 '좃같아서 기합받기 싫다'고 말 해보더라 하더군요. 제가 어떻게 그러냐고 하니 자기도 그랬더니 기합 안받았다고...

막상 듣고보니 이상하게 뽕이 차오르더라구요. 실제로 전 이걸 하게 됩니다. 바로 다음날 정확하게 똑같이 말하고 나가 버렸습니다.

 

"좃같아서 기합받기 싫다!"

 

그리고 또라이로 분류 되어서 기합에서 영영 열외가 됩니다. 막상 과사문을 쾅 닫고 나오는 것 까지는 했는데 진짜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네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한번에 세칸씩 올라와 행여 누가 쫓아올까 싶어 집으로 도망치듯 왔습니다.

P와는 명동 이후 급격히 친해지게 되었는데 알바하는 데 찾아와 제게 말했습니다.

 

 "이 또라이 새X야, 그걸 하란다고 진짜 하냐?"

 

아니,,,형이 하라면서요...알고보니 자기도 했었다는 건 거짓말이고 본인은 천식이라 열외였고 빠따만 다섯대 맞고 남들 기합받는 동안 서있었답니다. 또 02학번 선배들은 자기를 아주 좋아한답니다.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나이트에 몇번 데리고들 갔답니다. 존나게 무책임한 사람이죠.

그렇다면 또라이로 분류된 제가 얻은 불이익이란, 바로 '선배에게 인사할 수 없다' 와 '내년에 05학번에게 선배노릇을 할 수 없다'이 두가지였습니다. 

 

'기수열외'

 

이렇게 되고보니 오히려 너무 허무하더군요. 이런 불이익(?) 덕분에 저는 알바와 잠에 조금더 시간을 할애 할 수 있게 되었고, 수업시간에도 비교적 좀 덜 자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동기들과는 아주 많이 멀어졌습니다. 그건 좀 서운하더군요. 이후 P를 따라 촛불집회에 서너차례 더 참석했습니다. 다행히 노무현의 탄핵 소추안은 헌재에서 기각 되었고, 5월 어느 날 난생 처음 나이트라는 곳을 경험하게 됩니다. 와..정말...어...음....

 

노무현에 대한 연민은 없었습니다. 잘못된 세상에 대한 대항심도 없었고요. 집회에 간 것은 그저 P에대한 작은 도리라 생각 했고 배려에 대한 보답이었습니다. 

어쨌든 학교생활에 대한 큰 고민을 하나 해결해주고,  미안할 정도로 많은 음식을 사주고 수다라는 취미를 공유해준 것에대한 보답, P덕분에 서울에서의 첫 봄은 여전히 제게는 좋은 추억입니다.

특히 명동에서 헤어질 때 해줬던 말은 긴 서울살이를 하는동안 울림이 꽤 오래 갔습니다.

 

"15만원이 전재산이라 불행하면 30만원은? 그럼 절반만큼 불행하니? ...택시타고 가라."

 

P는 제 손에 15만원을 쥐어 줬습니다. 

집은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고, 그 돈은 제게 가뭄의 단비가 되어 전 첫 월급때 까지 어찌저찌 잘 지낼 수 있게 되었지요.

 

알바와 학교의 루틴이 몸에 익으니 이것도 좀 나름 할만 해졌습니다. 참 사람이 웃깁니다. 이게 되더군요. 조그맣게 나마 마음에 여유도 생기게 되고, 또 그러다보니 연애도 할 수 있게 되었고 여자친구와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니 자연스레 P와 함께 보내는 시간도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서운함은 없었을 것입니다. P는 저 말고도 친구가 많았기에. 학교에서는 거의 모르는 척 했지만 종종 보면서 지냈고 늘 만나면 탐탐이나 커핀그루나루에서 밤새 담배를 피우며 수다를 떨었습니다. 한번씩은 강남 단코나 준코같은 곳에서 재밌게 놀기도 했죠. P와 놀때는 항상 체력이 필요했습니다.

 

그해 가을, 제 짧은 연애는 끝이나고 P는 입대를 합니다. 저 또한 이듬해 봄에 입대를 하게되어 P와는 자연스레 연락이 끊기게 됩니다.

P가 입대하기 전 여름에 그의 집에서 하루 잘 일이 있었는데 집에 의외로 책이 많아 몇권 빌려와서는 아직도 반납을 하지 않았네요.

 

전역 후에 P와 다시 학교에서 조우를 했지만 각자의 일이 바빠 다시 친해지는 건 좀 어려워 졌습니다. 아니, 어색해 졌다는 표현이 좀 더 맞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그 예전에 P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지요. 돈을 빌려 쓰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자잘하게 얻어먹은 밥값만 하더라도 백만원을 족히 넘으니까요. 15만원도 받은 다음달 다시 갚기는 했지만 그걸로 그날 둘이 신천 '헤라클레스'에 가서 다 써버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왜그리 내게 잘 해주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기에 한편 내가 너무 빌붙지는 않았나라는 생각을 군에 있을때 자주 했었습니다. 내가 거절하기 어려운 자잘한 민폐를 계속 끼치고 있지는 않았었나라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먼저 드니 내가 다시 친해지고자 한다면 저의를 의심받을 것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떠올리면 참 못난 생각이죠. 연락처를 교환 했지만 기약없는 약속만 몇번 잡고서 막상 만나지는 않았습니다. 

 

2009년,

노무현의 서거소식을 뉴스로 접하고 가장먼저 생각난 것은 P였습니다.

당시 저는 사정상 대학을 중도에 그만두고 영업쪽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그날은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늦게서 퇴근해 들어오자마자 P에게 전화를 걸었고, 모르는 사람이 바뀐번호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때서야 소원해진 관계에 대한 후회가 밀물처럼 들었습니다.

둘다 싸이도 하지 않아서 전화가 아니면 연락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연락처를 구하고 싶어도 학교 내에서 전 기수 열외된 아싸기에 물어 볼 사람도 없었구요. 

 

그러다 전에 P의 집에서 빌려왔던 책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직 읽지 않았던 책들, 그 중 한권이 노무현의 저서 '여보 나 좀 도와줘' 입니다. 헛헛한 맘에 방 모서리에 어정쩡 하게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제껏 P의 행동중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것 하나가 마침내 조금은 이해가 되던 날, 제가 처음으로 앉은자리에서 책한권을 다 읽은날,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제 안에서 태어난 그 날은 바로 노무현이 죽은 날입니다.

사실 P는 그저 평범한 대학생이었죠. 다만 집이 좀 부자고 사회의식이 있었던. 노무현이 사망했다고 해서 그의 일상이 무너지진 않았을 겁니다. 다만 좀 많이 슬퍼했겠죠. 그만큼 P는 노무현을 사랑했습니다. 나이트에서 부킹한 여자에게도 노무현 얘기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생각 나니까 웃기네요. 진짜 미친X 인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그날은 정말 진심으로 P가 걱정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부터 제 일상에는 잔잔한 파문이 생깁니다.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저는 뉴스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가끔은 김어준의 팟캐스트를 듣고, 한번씩 문재인이나 유시민의 책을 사보기도 했죠. 그것은 쌓여 저의 사회의식이 되고 이데올로기가 됩니다. 

지금 저는 노무현을 압니다. 문재인을 알고 김대중을 알고 유시민을 압니다. 물론 아주 잘은 모릅니다. 그리고 제가 가장 사랑하는 정치인은 노무현이 아니라 문재인 입니다.

이건 그냥 제 취향입니다. 그리고 노무현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노무현을 두번째로 좋아해도 됩니다. 제가 아는 한 그것이 노무현이 바라는 노무현의 시대일 것입니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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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017년

저는 다시 광화문으로 갑니다. 이번에는 순전히 저의 의지로. 아픈 사람에 대한 연민으로, 잘못된 사회에 대한 대항심으로. 온 마음에 분노와 소명을 담아서. 

그리고 지금은 2022년입니다.

현재 저는 행복하지만 행운은 조금 메마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 정도면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비는 옵니다. 그러면 행운도 다시 차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현재의 저는 아주 행복합니다.

긴 시절 동안 P의 소식은 건너건너 가끔 들을수는 있었지만 사실 여부는 알 수가 없죠. 하지만 현재 외국에 살고 있는 것만은 맞는 것 같습니다. 20대의 한때 좋은 추억을 선사해 준 그가 어디서든 최소 저만큼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반드시 노무현을 알 필요는 없습니다. 반드시 기억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눈에 불을 켜고서 깨어있어야 합니다. 유시민은 편식이 몸에 해롭다고 했습니다. 편식을 하면 눈에서 불은 나올지언정 깨어있지는 못 할 수도 있습니다. 조심스레 적자면 가끔은 저쪽얘기도 들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일상을 살아가고 생업을 유지하는 삶. 어쩌면 그것이 오유에서 가장 사랑하는 노무현이 바라는 유토피아가 아닐지.

이 말은 사실 저 자신에게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한번씩 상기가 필요하니까요.


마지막으로 이 긴 글을 읽는 여러 분들은 제 이야기에 공감을 하셔도 되고 안하셔도 됩니다. 비판을 하셔도 되고 아예 읽지 않으셔도 상관 없습니다.

하지만 비판을 밝힐 때는 근거가 필요합니다. 비단 제 글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비판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남의 생각에 욕을 하든 현자 코스프레를 하며 컬트적인 한줄평을 하던 그것에는 반드시 '근거'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당신은 어쩌면 무늬만 다른 일베과의 벌레입니다. 저는 그런 비판은 존중하지 않습니다.

 

와이프가 아들과 함께 친정에 가서 간만에 자유가 생긴 오늘,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한번씩 이렇게 혼자 있을 수 있는  날은 추억을 떠올리기도 좋은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추억 한켠 펼쳐 볼수있는 여유있는 명절 연휴가 되시길 바랍니다.

써놓고 나니 정말 너무 기네요. 읽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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